함부로 말할 수 없다

사진마을 2017. 10. 25
조회수 3361 추천수 1

gundal7.jpg » 함부로 말할 수 없다. 96쪽. 피지 난디 2013 © 허영한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축복이다. 사진을 잘 찍는다는 것도 축복이다. 이 둘을 다 한다는 것은 단순한 축복이 아니라 뛰어난 재능이다. 세상엔 사진과 글을 모두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사람이 꽤 있으나 흔하진 않다. 신문사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20여 년간 했고 지금은 사진가인 허영한씨는 사진과 글을 다 겸비했다. 이번에 나온 책 <함부로 말할 수 없다>(도서출판  새움)는 그의 인간을 보여준다. 그와 술자리, 말자리를 자주 하진 않았지만 그가 말을 아끼는 사람이란 것은 익히 알고 있다.
 책장을 아무렇게나 넘겼다. 그렇게 두어 번 넘겨서 읽어보고 다시 목차를 본다. 맨 뒤로 갔다가 맨 앞부터 정독한다. 그러다가 이 책은 30개의 에세이가 들어있는 사진에세이집이란 것을 문득 깨닫는다. 하나의 에세이가 끝나면 꼭 한 장의 사진이 등장한다. 직접 글과 관련이 있는 사진도 있고 간접적으로 연결되는 사진도 있다.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들고 종종 우리는 웃는다. 사진의 어느 장면이나 사람의 행색, 아니면 사진 구석에 있는 작은 물건 하나에서라도 우리의 과거나 들어서 알고 있었던 지나간 사실과의 연관성을 발견하면 그 시점으로 돌아가 한동안 머물 수 있다.” (76쪽, ‘사진 속의 시간, 사진 밖의 시간’)
 “사진은 때로 철학을 사진의 언어로 말할 수 있다.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해 인식하고 언어가 닿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들에 대해 함께 생각한다. 세상에 대한 관찰과 오랜 사유, 인간적 교류와 삶의 방식 등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람과 세상의 관계들에 대해 사진으로 말하는 것이 사진가의 일이다.” (151쪽, ‘세상의 당연한 일들’)

gundal1.jpg » 함부로 말할 수 없다. 66쪽. 서울 2011 ⓒ허영한

gundal2.jpg » 함부로 말할 수 없다. 26쪽. 전남 진도 2014 ⓒ허영한

gundal4.jpg » 함부로 말할 수 없다. 87쪽 러시아 힐로크 2016 ⓒ허영한

gundal5.jpg » 함부로 말할 수 없다. 72쪽. 몽골 홉스굴 2017 ⓒ허영한
 
 더 옮길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어느 쪽을 펼치더라도 담담한 사색의 언어들이 시선을 잡아끈다. ‘주옥’이란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 오히려 무신경해 보이는 허영한씨의 표정이 떠오르면서 끝없는 침잠이 이어진다. 일전에 사진기자 강윤중씨가 펴낸 책 ‘카메라, 편견을 부탁해’를 두고 “현장에서 활동하는 사진기자가 펴낼 수 있는 책 중에서 가장 모범적인 사례가 아닌가 싶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었다. 허영한씨의 이번 책은 전혀 다른 길도 있음을 보여준다. 사진기자든 사진가든 사진에 방점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거기에 글이란 도구가 붙으니 날개를 단 격이다.
   또 한 권의 책이 떠올랐다.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이다. 원제는 <Photocopies>. ‘photocopy’는 복사, 복사하다란 뜻의 단어다. 존 버거의 이 책은 한글 제목이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 든다. 존 버거의 책에는 딱 한 장의 사진이 있을 뿐이고 전체 29개 에피소드에는 사진에 관한 이야기가 전무하다. 그럼에도 photocopies 혹은 한글 제목 <글로 쓴 사진>이 적합하다는 이유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
 16번째(순서는 중요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존 버거가 세상을 떴으니 확인할 길은 없다.) 글의 제목은 ‘길가에 엉켜 쓰러진 두 남자’다.
 “일곱 달이 흘러갔다. 모하메드는 어느 날 밤 라호르의 한 식당에서 나오다가 보도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가까스로 멈추고 보았더니 무사였다. 말을 걸어 보았다. 무사는 전혀 알아듣질 못했다. 흔들어 보았다. 무사! 무사! 외쳐 불렀다. 흔들고 흔들다가 모하메드는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서로 붙들면서 인도 위를 뒹굴었다. 무사야!” (90쪽)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은 탁월하다. 글을 읽으면 사진이 떠오른다. 처음에 제목을 보고 좀 과장이 심하다고 판단했었다. 어떻게 글로 사진을 쓴다는거야? gundal01.jpg » <함부로 말할 수 없다> 표지
  29개의 에피소드를 하나씩 꺼내 읽으면 사진이 선명히 떠오른다. 더 놀라운 것은 다른 날 같은 에피소드를 다시 읽으면 또 다른 사진이 떠오른다는 점이다. 존 버거....
 
 허영한씨의 <함부로 말할 수 없다>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30개의 에세이엔 하나의 예외도 없이 사진 혹은 카메라라는 낱말이 들어있다. ‘아카시아 향기와 시간 여행’ 편은 끝이 다가오도록 ‘사진’이 나타나지 않아서 두근두근했다. 그러다 결국 끝에서 6번째 줄에서 ‘사진’이 등장하고 말았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결국 책 전부를 읽어야 했다)
  사진교육과 관련된 사진이야기도 있고 광고사진 이야기도 있고 사진철학에 관한 에세이도 있다. 그러므로 순서 없이 이것저것 아무 페이지를 열어도 기승전사진까지는 아니지만 사진에 대한 저자의 깊이 있는 생각 혹은 저자 본인이 직접 관계된 사진추억을 만날 수 있다. 어디 여행갈 때 들고 다니면서 읽기에 가장 적합한 장르가 아닌가 싶다. 추천한다.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사진/사진가 허영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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