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서 하나, 8년 만에 피어난 약속

곽윤섭 2011. 05. 18
조회수 11500 추천수 0

 조현예·박태희의 <사막의 꽃>
 글과 사진의 만남, 그러나 하나는 먼저 세상을 뜨고
  쓸쓸함이 베어있지만 “두 영혼의 합일”이 웃고 있다

 

a1.jpg

 

 13년 전 둘은 미국에서 처음 만났다. 한 명은 글을 쓰고 한 명은 사진을 찍는 사람이었다.  둘은 2002년 10월에 향후 포토에세이집을 내기로 의기투합했고 책 내용에 대한 구상도 진행중이었다. 그러나 세상일은 알 수가 없는 것. 글을 맡았던 조현예가 두 달 후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버렸고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사진을 맡은 박태희는 홀로 남아 8년 만에 그 약속을 지켰다.
 
 현실과 추상 넘나들면서도 경계 크게 벗어나지 않아

 

 조현예의 글 53편과 박태희의 사진 66장이 어우러진 포토에세이집 <사막의 꽃>은 그런 사연 속에 나온 책이다. 17년간 사진을 찍어온 박태희에겐 어떤 형태든 자신의 사진집을 낼 만도 했는데 이 번이 첫 사진집이다. 자신의 책보다는 먼저 세상을 뜬 조현예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던 모양이다. 책의 에필로그에서 박태희는 이렇게 썼다.
 
 “오래도록 바라만 보던 그녀의 글과 나의 사진을 엮어 책을 만들고 있다. 개인적인 고백과 상황을 넘고, 시간과 장소를 넘어, 각자의 본질을 잃지 않고서 두 영혼의 합일을 이루어내는 작업이다. 살아있는 현실이며 동시에 추상이기도 한 그 무엇,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인식으로서의 사진, 그래서 나조차 무엇이라 정의할 수 없었던 그 내용들이 그녀의 글에 의해 존재를 증명받고 있다. 나는 혼자가 아닌 것이다.”

 

a2.jpg

 

a4.jpg


 책은 기본적으로 한 편의 글이 나오고 다음 쪽엔 사진 한 장이 실리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편집도 있다. 글이 두 편 연속해서 나오기도 하며 사진만 두 장 연이어 배치되기도 한다. 어떤 쪽에선 글이 있어야 할 왼쪽은 빈 채 오른쪽에 사진만 덩그렇게 실려있다. 모든 글쓰기와 사진찍기는 본질적으로 고독한 작업이란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 책의 편집, 제작 과정은 더 고독했을 것이다.
 조현예가 살아남아 둘이 같이 글과 사진의 배치를 의논했다면 한결 편했으리라. 가끔 둘 간에 의견이 갈리기도 했겠지만 그런 장면이 박태희에겐 더 그리웠을 것이다. 사진과 글은 모두 쓸쓸함을 바탕으로 내달리고 있다. 사진이 쓸쓸해 보이는 이유는 이렇다. 거의 다 흑백이고 간단한 구성을 자주 구사하며 정면에서 마주보지 않는다. 대체로 먼 곳에서 건너다 보듯 하고 현실과 추상의 세계를 넘나들며 경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글이 쓸쓸한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다. 몇몇 글과 사진을 소개하니 읽어보면 이해가 될 것 같다.
 
 엉화 학도와 사진 학도가 만났을 때
 

a5.jpg


 72쪽:

   한꺼번에 너무 많은 말을 했어
 평화와 고요가 무너졌어
 말을 아낄 필요가 있어
 내 자신에게 할 말이 줄어드니까

 

a3.jpg


 
 108쪽:
 어쩌면 이제 마지막이야 서로를 놓아주는 마지막 사랑
 울지 않는 헤어짐 연습과도 같던 시간들
 하얀 재, 건조한 작은 바람에도 흩어져갈 낱낱의 작은 점들
 아마도 기억조차 못할 것 너무나 먼 얘기들
 아마도 몇 천년 전 그림 같은 짧은 단상
 그렇게 될 때까지 기다린거야
 
 우리 이제 인사할 때
 덤덤한 짧은 인사
 안녕
 
 글을 쓴 조현예는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뉴욕 뉴스쿨에서 영화 공부했다.
 사진을 찍은 박태희는 서강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의 프랫에서 사진 공부했다. 필립 퍼키스의 명저 <사진강의노트>를 번역하는 등 여러 책을 엮고 옮겼다.
 <사막의 꽃> 38,000원/안목 www.anmoc.com


 a6.jpg

 

 


  곽윤섭기자 kwak1027@hani.co.kr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List of Articles
취재

브레송도 카파도 못 찍는 아줌마들의 힘 [12]

  • 곽윤섭
  • | 2011.06.03

30대 이상의 여성만 참여한 공모전, 생활이 팔딱팔딱 좋은 사진 어떻게 찍나? 나만의 다른 사진이 있을 뿐! 강지영 앙리 카르띠에 브...

전시회

사진, 내일을 찍다

  • 곽윤섭
  • | 2011.06.03

현대사진의 향연-지구상상전  ‘지금-여기’만 찍을 수 있는 속성 벗어나 생각의 날개  컴퓨터 합성까지…그저 눈으로만 보고 멋대로 즐기길 ...

취재

기억 너머 풍경 No 28. [8]

  • 곽윤섭
  • | 2011.06.02

기억 너머 풍경 No 28. 어제 사진을 오늘 소급해서 올립니다. 바쁘다보니 놓쳐버렸네요. 그러므로 어제 찍은 따끈한 사진이 올라갑니다. 한겨레신...

취재

기억 너머 풍경 No 27. [4]

  • 곽윤섭
  • | 2011.05.31

기억 너머 풍경 No 27. 지난 주에 회사에서 찍었던 실패담을 올립니다. 실패였긴 하지만 그 과정을 소개하는 것이 나쁘진 않을 것입니다. 그리...

취재

기억 너머 풍경 No 26. [10]

  • 곽윤섭
  • | 2011.05.30

기억 너머 풍경 No 26. 다시 한 주가 시작되었고 내일이면 5월이 지나갑니다. 그냥 짧게 말하면 오늘은 5월 30일이고 월요일입니다. 지난주에 ...

취재

불행과 고통을 아름답게 찍으면 안되나 [27]

  • 곽윤섭
  • | 2011.05.30

 [논쟁이 있는 사진] <5> 타인의 고통  세계 곳곳의 참담한 현장 담은 살가두에 비판 과녁  “다큐 어법 어기고 감상주의적 엿보기·상업적 미화...

전시회

찾기도 찍기도 힘든 한국 맹금류들 생생히

  • 곽윤섭
  • | 2011.05.27

 김연수 사진전 ‘바람의 눈’ 매, 참매, 수리부엉이, 참수리, 물수리 등 ‘야생조류사진가 로망’ 순간 포착 30여 점 매사냥 현직 ...

취재

기억 너머 풍경 No 25. [13]

  • 곽윤섭
  • | 2011.05.27

기억 너머 풍경 No 25. 어제였네요. 지하철로 이동중이었습니다. 어떤 분이 빈 액자를 들고 계셨습니다.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저도 지하철에선 ...

취재

기억 너머 풍경 No 24. [8]

  • 곽윤섭
  • | 2011.05.26

기억 너머 풍경 No 24. 30분 가량 넋을 놓고 구경을 했습니다. 물론 카메라 렌즈 너머로. 얼마나 신나게 노시든지..... 정말 청춘이 부러웠습니...

취재

기억 너머 풍경 No 23. [6]

  • 곽윤섭
  • | 2011.05.25

기억 너머 풍경 No 23. 지난 4월 어린이대공원에서 찍었습니다. 싸이월드페스티벌 행사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어린이대공원은 제가 가장 추천하는 ...

취재

기억 너머 풍경 No 22. [5]

  • 곽윤섭
  • | 2011.05.24

기억 너머 풍경 No 22. 부제: 겨울이야기(창고 대방출) 하루가 다르게 낮 기온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꽤 덥군요. 사람이 얼마나 간사...

취재

죽어가는 소녀를 찍지 말아야 했을까 [41]

  • 곽윤섭
  • | 2011.05.23

 [논쟁이 있는 사진] <4회> 사진가의 현장윤리  화산폭발 참사 고통 증언한 것이 파렴치한 행위일까 ‘독수리 앞 굶주린 아이’ 상 받은 뒤 ...

취재

기억 너머 풍경 No 21. [2]

  • 곽윤섭
  • | 2011.05.23

기억 너머 풍경 No 21. 오늘은 노무현 전 대통령님의 기일입니다. 2년 전 오늘이 아직도 기억에 나는데 세월이 무심해도 이렇게 빨리 지나갈 ...

취재

기억 너머 풍경 No 20. [7]

  • 곽윤섭
  • | 2011.05.20

기억 너머 풍경 No 20. 비오는 금요일입니다. 어제 점심때 풍경입니다. 제가 근무하는 부서가 '스페셜콘텐츠팀'입니다. 외부에 가서 명함을 내밀...

취재

기억 너머 풍경 No 19. [9]

  • 곽윤섭
  • | 2011.05.19

기억 너머 풍경 No 19. 대학마다 축제가 한참입니다. 여기 저기 찍을 것이 많습니다만 별로 찍고 싶지가 않아서 학생들에게 축제의 행사...

사진책

둘이서 하나, 8년 만에 피어난 약속

  • 곽윤섭
  • | 2011.05.18

 조현예·박태희의 <사막의 꽃>  글과 사진의 만남, 그러나 하나는 먼저 세상을 뜨고 쓸쓸함이 베어있지만 “두 영혼의 합일”이 웃고 있다 ...

취재

기억 너머 풍경 No 18. [10]

  • 곽윤섭
  • | 2011.05.17

기억 너머 풍경 No 18. 월요일밤과 화요일 새벽 사이에 찍은 사진이 아닙니다.^^ 기억 너머 어느날 밤과 새벽 사이죠. 노래를 들었습니다. 엘비...

취재

공공장소, 소녀시대 사진 안 찍힐 권리 있나 [34]

  • 곽윤섭
  • | 2011.05.16

[논쟁이 있는 사진] <3회> 표현의 자유와 초상권의 대립  프랑스에선 지하철에서 몰래 찍어 책 낸 작가 법정에  아슬아슬한 경계, 헌법을 봐도...

사진책

정치학자의 눈에 찍힌 금지의 경계 [2]

  • 곽윤섭
  • | 2011.05.13

 노보셀로프와 네쓰 <사람 사이의 벽들>  베를린 장벽, 한반도 DMZ 등 8곳 풍경 ⓒFrank Neisse-Sahara_Vue aerienne du mur_2001  만리장...

취재

기억 너머 풍경 No 17. [7]

  • 곽윤섭
  • | 2011.05.13

기억 너머 풍경 No 17. 주말이 또 왔습니다. 이번 주엔 석탄일이 있어서 횡하니 한 주가 사라져버리는 기분입니다. 월화수일목금토일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