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내순의 첫 개인전 ‘흐르는 집’이 서울 종로구 청운동 류가헌에서 열리고 있다. 6월 11일까지. 전시장을 지키고 있는 송내순 작가와 전화로 인터뷰했다. 그가 사진을 시작한 것은 2013년쯤이라고 했다. 특별한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누가 뭘 시작한다는 것은 파티마의 세 목동이 성모 마리아의 계시를 받는 것처럼 그렇게 각인되게 강렬한 사례는 잘 없다. 어느날, 문득 그렇게 다가오고 사진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 더 보편적이다. 나중에 알고 보면 그게 문득 다가온 것이 아니었음을 깨닿게 되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렇다.
송내순은 이렇게 말했다. “여행을 좋아했으니 사진도 찍었겠지. 나이가 쉰을 넘어가고 보니 인생 100년이라는데 후반부에 뭘 할까 싶어 둘러보다 사진을 취미로 잡았다” 그렇다. 대게 이런 식의 말을 한다. 그렇지만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면 뭔가 다른 것이 있을 것이다.
주변을 기웃거리면서 사진을 배우기도 하고 그랬다. 처음엔 사진은 먼 곳으로 출사를 가서 찍는 것인줄 알았다. 그러다가 집 가까이 있는(원래 거기 있었던) 한강이 눈에 들어왔다. 아침 출퇴근 때마다 아파트와 방음벽을 사이에 두고 88도로와 한강이 보인다. 아름다운 풍경도 보이고 데이트하는 연인, 산책 나온 가족…. 이런 것이 보였으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걸어서 한강으로 가보기로 했다. 그제야 색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람이 부는 한강, 흙탕물 범벅인 한강, 어느 날은 시시각각 변하는 강물 같은 것도 보였다. 맥주 캔도 보이고 담배꽁초도 보였다. 이런 게 다 무엇이겠는가? 결국, 어떤 사람, 삶의 힘겨운 흔적 같은 거 아니겠는가? 처음부터 고민했던 것이었는데 타인의 흔적을 쫓는다고 했던 것이 결국 나를 보는 것이었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그래서 한강에 몇 차례나 갔을까?
=수십 번은 더 갔겠지. 처음에 강변에서 맘에 드는 것이 있었으나 카메라를 들고 다니지도 못했다. 강가에 가서 치킨 배달해서 맥주도 먹어보고 라면도 먹어봤다.
-한강 어느 지구인가? 계절은?
=동작대교와 반포대교 사이, 잠원지구인가? 거의 대부분 내가 사는 한강변인 잠원지구에서 찍었다. 다 좋지만 특히 겨울철 아침 일찍 나가면 한강의 색깔이 푸른 빛이 나서 좋았다.
-한강은 얼마나 더 찍을까?
=계속 작업한다. 만약 이사를 가게 된다면 이사 간 곳에 가까운 또 다른 작업을 할 것이다.
-집에서 가까우니 한강을 찍었다는 이야길 하고 있다. 누가 한강 찍으면 어떻겠느냐고 충고나 조언을 준 것이 아닌가?
=절대 남의 권유에 의한 것이 아니다. 어릴 때 진안 장수에서 살았는데 등굣길 근처에 작은 강이 하나 있었다. 여기서 멱도 감고 도시락을 싸와서 먹기도 했다. 바쁘게 살다가 한강변으로 이사 오고 나니 어릴 때 기억도 나게 되었고 그래서 한강이다. 강물과 이야기도 주고받는다. 외로움을 나눈다. 강물아~
인터뷰를 마쳤다. 작업노트를 다시 읽었는데 이젠 완전히 공감도 가고 이해도 되었다. 전문 옮긴다. 송내순의 ’흐르는 집’은 여러모로 장점이 있는 작업이다. 자신의 내면을 읽어낸 작업이기도 하고 동시에 한강 잠원지구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자신의 내면을 투사하였으나 그게 공감대를 형성한다면 이 시대 현대인과의 교감일 것이다. 인터뷰 도중에 “타인의 흔적을 쫓다가 결국 나를 본다”라고 했었는데 다시 말하면 송내순이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과 중첩되는 현재의 자아를 다스리는 이 사진들은 결국 타인들도 위로하는 사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물어보니 사진을 찍어온 사오년 사이에 한강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변할 것이고 변하는 모든 것은 기록할 가치가 있다. 전시장엔 30여장이 걸려있다고 하는데 보도자료엔 6장만 따라왔다. 따라서 내가 전체를 다 못봐서 단언할 순 없는데 지금 이대로라면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없지 않다. 이 6장만 보면 여기가 한강 무슨 지구인지 알아볼 조각이 없다. 일부러 그렇게 했다면 그것도 존중할 일이긴 한데 기록의 측면에서 가치가 떨어진다. 의도인가 아니면 한계인가 가서 확인해볼 생각이다.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작업노트
흐르는 집/송내순
아파트의 사람들은 바쁘다. 이른 아침 일어나 급히 밥을 먹고 저마다 어디론가 바쁘게 달려간다.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는 수없이 오르락내리락하며 그들의 발걸음을 맞춰준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대신 유치원 버스의 경적소리가 아파트 사이사이를 맴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생활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분주하다.
빨래를 널다 멍하니 창 밖 사람들을 바라본다. 행선지가 어디인지 모르지만 하나 둘 집을 빠져나와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회색빛 콘크리트 사이사이로 뿔뿔이 흩어져 간다.
이른 아침이나 호젓한 저녁이면 베란다 앞 한강으로 자연스레 발걸음이 향한다. 보는 이 아무도 없이 쉬지 않고 물결은 밀려왔다 밀려가고, 반기듯 흔들거리는 버드나무는 어릴 적 초등학교 기억때문인지 반갑다. 게다가 나무 아래 떨어지는 햇살의 산란은 꿈꾸는 듯 아련함까지 든다. 갈대는 저희들끼리 서로 몸을 부비고 바람은 부드러워졌다 드세졌다 반복하며 흐르는 강물 위로 세월을 굴린다. 그 풍경에 문득 사람들이 틈입하듯, 나 또한 그 욕망의 틈으로 서서히 걸어 들어간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 성장과 결혼, 이사를 거듭하며 삶은 나도 모를 방향으로 나를 데려왔다. 마침내 다다른 인구 천만의 도시 서울, 아파트 너머에 흐르는 한강을 통해 지금까지 흘러온 삶의 메타포를 발견한다. 딱딱한 콘크리트 아파트 안의 박제된 삶과 가까운 한강의 흐름을 통해, 어느 날 불현듯 깨달은 불안하게 ‘흐르는’ 삶의 풍경을 쫓고자 했다. 강물은 유유히 흐르고 우리네 삶도 빠르게 흐른다. 직선과 견고함으로 채워진 서울. 매일 문을 열면 눈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방음용 투명 플라스틱 벽을 끈질긴 생명력으로 치고 오르는 담쟁이 넝쿨과도 같은 경계의 삶 속에 ‘흐르는 나’와 ‘흐르는 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