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수필 4
면도를 했어야 했다.
지하철을 탔다. 요즘은 나도 ‘중년여성들’처럼 빈자리를 향해 몸을 날리는 편인데 그날은 빈자리가 없었다. 앉을 자리를 노린다면 아무 데나 설 수는 없으니 여러 가지 경험법칙을 동원한다. 이 판단은 꽤 정확한 편이어서 내가 서 있는 곳 앞의 승객이 그 줄에서 가장 먼저 내리는 일이 왕왕 있었다.
이날도 촉을 곤두세워 빨리 자리가 날 것 같은 곳에 섰다. 여자 중학생 2명이 나란히 앉았고 오른쪽으로 하나 건너 또 한 여학생이 앉아있는 곳이다. 이때 초기 판단부터 틀렸던 것을 지금도 후회한다. 학생들은 나를 힐끔 보더니 별 반응이 없었다. 한 역이 지나서 60살은 훨씬 넘어 보이는 여성 두 명이 탔다. 나란히 앉은 여학생들의 얼굴이 빨개지더니 10초 정도 있다가 일어서서 60살 여성들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보기 좋았다. 그래도 씩 웃어주진 못하고 혼자 웃었다.
‘학생들이 착하군’ 여기까진 좋았는데 문제는 하나 남은 여학생이 나를 쳐다보기 시작한 것이다. 혼잣말로 ‘너 나한테 자리 양보하려고 그러는 거니? 나 아직 50대 초반이거든’ 라고 중얼거렸다. 정말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나이 많다고 자리를 양보받은 적이 없다. 이 여학생,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기세다. 최대한 웃는 표정을 지으면서 “그냥 앉아있어요”라고 입 밖으로 말을 꺼냈다. 이 여학생, 끝내 벌떡 일어나버렸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노인대접을 받은 적이 없다니까? 자리는 비었고 나는 그 빈자리 앞에 서있는데 ‘절대 앉지 않을테야’ 다짐하면서 위기를 넘기기 위해 한 달 전에 읽던 한병철의 <투명사회>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나에게 양보한 여학생은 내 옆에서 “왜 앉지 않을까? 이 노인네”라고 생각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책에 집중했다. 헐 어제 47쪽까지 봤고 넘기니 하필이면 48쪽이었다. 48쪽의 소제목은 <포르노사회>. 왼쪽에 선 여학생이 행여 볼까 봐 책을 기역 자로 꺾어서 들었다. 다음 역에서 다행히 ‘내 생각에’ 나보다는 더 들어 보이는 여성이 탔고 힐끔 내 얼굴을 보더니 아주 잠깐 머뭇거리다가 빈자리에 앉았다. ‘그냥 앉지 내 얼굴은 왜 봐?’ 어쨌든 나에게 자리를 양보한 여학생과 빈자리에 앉은 여성과 나까지 우리는 모두 편안해졌다. 열 개의 역을 지나서 내리기 직전에 여학생들에게 학교를 물어봤다.
착한 아이들이다. 그건 그렇고 아침에 면도를 했어야 했다.
글 사진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 이 글은 경제월간지 <이코노미 인사이트> 2017년 1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