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근씨 사진전 ‘감정 조각’
“담담하게 때로는 시리도록 아프거나 벅찬 행복의 모습들”
정진호씨 사진전 ‘서울 걷기’
“마음 내키는 대로 천천히 혹은 빠르게, 온전한 세상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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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년보다 춥지 않아서 서민적인 겨울인 것 같은 12월이다. 11일 같은 날 다른 두 장소에서 사진전이 따로 개막된다. 두 사진은 많이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생각에 잠기게 한다.
남인근씨의 사진전 ‘감정조각’은 11일부터 서울 마포구 상수동 코코갤러리에서 열린다. 12월 23일까지. 남인근씨를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올 봄에 페이스북을 통해 광주청소년수련원의 중학생 사진교육에 필요한 카메라 기부를 받을 당시 흔쾌하게 동참하면서 처음 그의 이름을 들었다. 나만 처음 들었던 것이고 이미 남씨는 유명인사였다. 아이들을 위한 카메라 기부에 여러 분들이 동참했고 일일이 고마움을 표시하진 못했으나 내년 1월에 광주에서 사진전을 할 무렵 사진교육과 관련된 기사를 쓸 때 도와준 분들을 기억할 것이다. 남인근 사진가의 사진집 <위로>를 보면서 사람을 감동시키는 사진을 잘 찍는다는 생각을 한 것은 그가 카메라를 기부해서 호감이 생겼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페이스북페이지에 올라오는 아이슬랜드, 마다가스카르, 일본, 쿠바……. 세계 각국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면 어느 하나 감탄사가 나오지 않는 것이 없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세 번 볼 때도 좋아야 정말 좋은 사진이다. 남인근 사진가의 사진이 그랬다. 세상은 민주적이지 않으나 최소한 사진과 관련해서는 민주적으로 변했다. 굳이 대한민국 최고의 사진가라는 자기 과시가 없어도 네티즌들이 알아보고 실력을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19세기 초반부터 사진은 혁명적 도구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이걸 뒤엎을 재간은 아무에게도 없다. 누군가에게 어떤 사진이 좋으면 좋은 것이다. 역도 성립한다. 다만 끝없이 경계해야 할 일은 누군가의 권위나 지시나 유도에 의하여 여러분들의 취향을 결정해선 안된다는 점이다.
혁명적이며 민주적인 매체인 사진이 완성되기 위해선 사진민중(사진인구라고 불러도 좋다)들이 자발적으로 사진을 읽고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토대로 페이스북에서 ‘좋아요’를 누를 줄 알아야 하고 그가 사진집을 내면 구매할 줄 알아야 하고 전시를 한다면 보러 갈 줄 알아야 한다. 이 구조가 이루어지면 사진의 민주화가 완성될 수 있다.
외국에서 찍은 사진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에 대해 아쉬움이 있다. 낯선 곳에 대한 그리움을 자극하기 위해선 외국이 압도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란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이해한다. 한국 안에서 이런 사진들을 찍어내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그렇게 하는 사람이 분명 있으니 앞으로 남인근 작가는 한국에서도 사진을 많이 찍어주길 바란다. 내가 그의 사진을 많이 못 봤기 때문일 수 있는데 그가 보내온 보도자료에 포함된 사진이 모두 외국의 것이라서 이런 주장을 한다. 따지고 들자면 이 중에서 아이슬란드의 오로라 한 장을 빼고 나면 한국에서도 찍을 수 있을 것 같다.
생각에 잠기게 하는 사진은 위험하다고 R.B가 말했다. (Camera Lucida, 15장 To Signify 마지막 문장. Ultimately, Photography is subversive nor when it frightens, repels, or even stigmatizes, but when it is pensive, when it thinks.) 남인근의 이번 사진들은 깊은 상념에 빠지게 한다. 수심에 잠기게 한다. 헤어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의 작가노트가 과하지도 않고 어렵게 (보이도록)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전량 소개한다. 사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게 작가노트가 아니다. 그의 작업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남인근 작가노트
감정이란 덧씌워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순수하고 더럽히지 않은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지나간 과거 혹은 다가올 미래가 아니며» 남인근
바로 지금의 나이기도 한 것이다.
이번 감정조각 전시에서는
자신의 모습인 동시에
우리가 늘상 보고 스쳐지나던
내 이웃의 모습이기도 하고 친구의 모습이기도 하며
그 풍경의 모습들이 감정을 대변한다.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수많은 감정의 조각들을 작품 속에
담담하게 혹은 시리도록 아프거나 벅찬 행복의 모습으로 담고 싶었다.
“ 나는 좌절하고 슬퍼하며 극복해 나가고 행복해 가는 것들을 담아
우리가 살면서 만들었을 수많은 순간 속 감정의 조각들을 그려 넣고 싶었다. ”
여행이 특별한 이유는
어떤 풍경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보기 보다는
낯선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삶의 사유일지도 모른다.
작품 속의 감정은 지친 삶의 시간을 치유하고 멍든 마음을 위로하며
새로운 희망을 그려나가는 우리의 모습이며 나의 모습이다.
정진호씨의 사진전 ‘서울 걷기’도 11일부터 서울 충무로에 있는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린다. 19일까지. 이번 전시는 ‘다큐멘터리사진가가 찍은 풍경사진’ 18번째이다. 정진호씨도 페이스북을 통해 수시로 온라인 전시를 하고 있는 사진가다. 하루에 두 장도 올라오고 거의 매일 빠지지 않고 사진을 볼 수 있다. 한국, 그것도 서울의 사진이 많은데 외국 사진도 간간이 볼 수 있으니 한국만 고집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최근엔 스리랑카였고 그 전에는 크로아티아였다. 어느 곳에서 찍었느냐가 중요하지 않는 듯한데 왜냐하면 그가 어디에 있든 사진을 찍어서 올리기 때문이다. 서울 풍납동에 있으면 풍납동을 찍고 크로아티아에 있으면 그곳의 동네와 사람을 올린다. 누군가 별생각 없이 사진작가와 아마추어의 구분을 이렇게 했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 외국에 간다면 사진작가이며 외국에 간 김에 사진을 찍는다면 아마추어다.” 지금 봐도 별생각 없이 뱉은 소리 같다. 이 문장에 외국이란 낱말 대신 한국을 넣어보자. 주체는 한국인이다. “사진을 찍기 위해 한국에 있다면 사진작가이며 한국에 있는 김에 사진을 찍는다면 아마추어……?” 한국사람은 한국에서 태어났으니 한국으로 갔다고 할 수는 없다. 말이 꼬이는 것 같으니 정리하자. “사진을 찍기 위해 풍납동에 간다면 사진작가이며 풍납동에 간 김에 사진을 찍는다면 아마추어다….” 누군지 생각이 안 나지만 어쨌든 참 생각이 없는 소리다.
정진호는 그가 어디에 있든 사진을 찍고 (페이스북을 통해) 꾸준히 전시를 하고 있으니 사진가다. 내가 생각하는 기준은 이렇다. “꾸준히 작업을 계속하고 있으며 정기적으로 사진을 발표한다면 작가라 할 수 있다.” 남인근씨도 그에 해당하고 정진호씨도 그러하며 임재천씨도 그렇다. 이름을 몇 개 더 불러보려고 하는데 별로 떠오르지가 않는다. 한국에 사진가가 이렇게 없었나? 내가 친한 사람이 별로 없어서 그런 모양이다. (더 있는데 이하 생략) 물론 꾸준히 작업하고 꾸준히 발표한다는 두 가지 기준만 충족하면 작가라는 소리는 아니다. 최소한의 기준이 저렇다는 것이고 무엇보다 사진가라고 한다면 “그 만의 목소리”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필수조건이며 나의 주관적인 주장이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 사진가 혹은 사진작가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를 나는 사진가 혹은 사진작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언제 날 잡아서 내가 사진가라고 부르지 않는 명단을 쭉 발표하고 싶다. 명단과 그 이유도 함께.
‘그 만의 목소리’는 그 사진가가 보여줄 수 있는 그 만의 특징일 수도 있고 스타일이기도 하고 주제의식일 수도 있다. 나는 이것을 테마라고 부른다. 그만의 테마가 없다면 사진작가라고 할 수 없다. 한국의 모 사진단체에선 9천 명 가까운 작가를 배출했다.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단체에서 사진작가를 배출하는 기준에는 포인트가 있고 특정 포인트는 돈을 내지 않으면 취득할 수 없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가만 생각하면 그 포인트란 것은 동호회의 연간 회비, 혹은 가입비일수도 있으니 넘어가자. 그런데 그 9천 명 작가들은 어떤 테마로 작업하는지 알 길이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내가 접해본 몇 십 명 정도의 그 단체 작가들은 테마라는 것이 없었다. 주제의식도 없고 ‘그 만의 특징‘도 없었다.
이번 정진호사진가의 전시는 ‘서울 걷기’라고 하였고 작가노트를 읽어보니 걷기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으므로 주제의식이 분명하게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나에게 제공된 일곱 장을 관통하는 무엇인가가 있으므로 겉으로도 속으로도 모두 ‘그의 목소리’가 분명하게 들린다. 남인근작가의 작가노트와 마찬가지로 정진호작가의 작가노트도 쉽고 이해할 수 있게 쓰여있어서 좋았다.
그런데 정진호씨의 사진도 남인근씨의 사진처럼 생각에 잠기게 만들었기 때문에 무거웠다. 발 닿는 데로 “목적 없이” 걸었다고 했는데 왜 이리 무거운 장면들만 눈에 들어왔을까? 예전에 무슨 유행어 마냥 “모든 것이 노무현 탓”이라고 한 적이 있었다. 11일에 개막하는 두 사진전이 모두 R.B의 표현처럼 ‘생각에 잠기게 만들었기 때문에 체제전복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무조건 “박근혜 탓”인 모양이다. 체제전복(subversive)이란 단어를 보고 경기가 들 사람들이 있을까 봐 친절하게 밝혀둔다. 나나 정진호씨나 남인근씨가 쓴 표현이 아니고 롤랑 바르트 선생이 쓴 표현이다. 주 프랑스 한국대사관에 연락하여 문의할 생각 하지 마시라. 롤랑 바르트 선생은 세상을 뜬지 오래되었다. 그리고 정부 당국의 담당자께서 “생각에 잠기게 하는 사진이 왜 위험한지” 이해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 한국에 몇 없다.
정진호씨의 ‘서울’은 그래서 볼 만하다. 낯선 서울, 익숙하지 않은 서울, 그리고 살아있긴 하지만 암울해 보이는 서울이다. 암울해 보이지만 그래도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란 것을 사진 곳곳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무겁고 서글퍼지는 2015년 겨울의 초입에 서서 우리는 ‘체제전복적’인 두 사진전시를 만나게 되었다.
사진민중 혹은 사진인구 중의 한 명이라고 생각된다면 사진책은 못 사본다고 하더라도 사진전시는 좀 보고 다니길 부탁한다. 게다가 무료이고 게다가 지하철역에서도 가까우니 못 갈 일이 없다. 이번 두 전시는 생각할 것이 많아서 좋다.
정진호 작가노트
서울 무작정 걷기
나는 거의 매일 목적 없이 걷는다. 몸의 건강을 생각해서 걷기 시작한 것이 어느덧 4년이 넘었다. 서울의 거리와 뒷골목, 변두리 동네, 산동네를 무작정 걸었다. 아무 계획 없이, 특별한 순서 없이 발길 가는 대로 거닐면서 일상의 풍경들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장소와 낯선 공간 사이를 오가며, 서울을 관찰하고 기록하였다.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다”고 한 프랑스의 사회학자 다비드 드 브르통(David Le Breton,2010:21)의 말은 걷는다는 것은 머리가 아닌 몸으로 세상을 느끼고, 사물들의 본래 의미와 가치를 새로이 일깨워주는 인식의 방식이다. 걷는다는 행위는 거리, 골목길 혹은 동네와 정서적으로 관계를 맺게 되고, 걷는 동안에 내 몸의 피부와 감각 기관은 끊임없이 사물과 공간에 반응하는 신체적 경험이기도 하다.
자동차,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등에 의지하여 수동적으로 움직이던 내 몸이 걷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세계를 온전히 경험”할 수가 있었다. 마음내키는 대로 천천히 때로는 빠르게 걸으면서 낯선 거리와 골목들, 낯선 얼굴들을 발견하고 한다. 나에게 있어 서울을 걷는 것은 이렇듯 미처 알지 못했던 장소, 호기심조차 없었던 도시의 구석구석을 온몸으로 체득하는 행위이다. 건축가 정기용은 서울은 단일한 하나의 도시가 아니고, 수백 개의 각기 다른 동네가 모인 집합이고 연대라고 했다. 각기 다른 동네의 분화와 집합은 서울의 다채로운 지형과 함께 천문학적인 수의 네트워크를 이루고 길을 만든다. 어느 누구도 다 걸어볼 수 없는 서울의 미로 속에서 진정한 의미의 서울을 만나보고 싶었다.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