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뒷골목 시간이 멈춰 있었네

곽윤섭 2014. 0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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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이안 <청계천- 기억될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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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가 제이안의 5번째 개인전 <청계천- 기억될 시간들>이 3월 25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열린다. 이번전시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로서, 청계천 공구상 골목의 독특한 정서와 풍경을 작가의 컬러감각으로 해석하고 기록한 사진을 선보인다. 보도자료와 평론가 김승곤의 전시서문을 그대로 옮긴다. 

 

 

 보도자료
 거친 노동과 영세한 경제활동이 이루어지는 청계천 공구상 골목은 삶의 고단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보이는 동시에, 눈부시게 발전한 서울의 도시미관 중심에서 낙후된 상태로 남아있는 모순성으로 인해 현대 자본주의의 이면을 상징하기도 한다. 오랜 기간 동안 도시의 이미지를 색으로 포착하고 표현하는 사진작업을 해 온 사진가 제이안은 그 만의 독특한 시선과 색감으로 청계천 골목의 구석진 어귀에서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그동안 뉴욕, 파리, 쿠바 등의 도시에서 작업하며 각도시의 이미지를 일관되게 색으로 선보였던 작가는, 청계천의 좁고 낡은 골목 사이에서 그 어떤 도시 이상의 파격과 아름다움을 발견한다고 강조한다. 고단한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수많은 물건들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색감과, 오랫동안 켜켜이 쌓인 때와 의미 없이 놓여 진 기구들이 만들어내는 부조화의미는 단순한 기록을 넘어 포스트모던의 미학을 경험하게 한다. 이번 전시는 이제 곧 사라져 볼 수 없게 될 청계천 공구상 거리, 그곳을 살아온 사람들의 냄새와 이야기가 가득한 골목안의 풍경들을 새롭게 해석하고 경험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력  제이안 (안정희)
 
 한국여성사진가협회(KOWPA)회장
 숙명여자대학교 졸업동양방송(TBC)아나운서New York 한미방송 아나운서
 개인전
 청계천 - 기억될 시간  (2014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컬러와 쿠바(COLOR & CUBA) (2010. 윤당 아트갤러리)
 윤당 아트갤러리 초대전 (2010, 윤당 아트갤러리)


 
 

 

  전시서문

 제이 안의 멈춰선 시간/김승곤 (사진평론가, 순천대 교수)
 
 아마 평생을 서울에서 살아도 이곳에 한 번도 발을 들여놓지 않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청계천 세운상가 뒷골목. 불과 몇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의 양쪽 대로변에는 도시 재개발로 세워진 고층빌딩과 서구화된 카페들이 늘어서 있지만, 세운상가를 끼고 청계천 남쪽과 을지로 3, 4가 사이에 자리 잡은 이 일대는 한국전쟁이 끝난 60년 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모습으로 남아 있다. 미로와도 같은 골목 안으로 한 발 들어서면 검은 천막과 함석으로 지붕을 얹은 납작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빼곡히 늘어서 있다. 초현대적인 번화가에서 몇 발짝 안으로 걸음을 옮겼을 뿐인 곳에 시간에 버림받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 진 것 같은 불가사의한 공간이 느닷없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균열 진 담벼락에는 영문 모를 그림과 문자들이 어지럽게 그려져 있다. 절단, 절곡, 양공, 판금, 형제주물, 미래정밀, 천안공업사, ‘타이야’ 체인을 만드는 신우상회, ‘개는 이곳에 오줌을 싸도 좋다’, 시스템 경비구역, 금형, 부식, 밀링, 연마, 시대아크릴, 가마솥 설렁탕…, 투박한 옛날 식 글씨로 적힌 이런 갖가지 문구와 간판들이 마치 이곳에서만 통용되는 비밀스런 기호처럼 영세한 금속가공 공장의 낮은 지붕과 담벼락과 전신주와 붉게 녹슨 철문 여기저기에 붙어 있다. 공장을 찾는 사람도, 그 광고를 읽는 사람도 아마 그다지 많지 않으리라. 하루 일을 마친 공장노동자 몇이서 ‘도라무깡’에 둘러앉아 연탄불에 구운 돼지갈비를 안주로 ‘호프’ 잔을 기울이며 웅얼거리는 모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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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렬한 코발트색 플라스틱 물통과 지난해 여름이 끝났을 무렵부터 먼지를 뒤집어쓴 채 그 자리에 놓여 있었을 선풍기, 시꺼먼 기름에 찌든 목장갑, 아무렇게나 버려진 빈 페인트통, ‘알마니’ 맞춤전문 서울패션, 전신주에 붙은 전화대출 광고, ‘남녀종업원 모집’과 ‘공장 급매물’이 적힌 ‘찌라시’, 커다랗게 틈이 벌어진 벽에 걸린 시계 바늘은 여섯 시에서 일곱 시 사이의 어중간한 시간을 가리킨 채 오래전부터 멈춰져 있다. 거의 맞닿을 듯 붙어 있는 낡은 함석 처마 사이로 빛바랜 하늘이 허옇게 뚫려 있고, 얇은 합판 벽에 붙은 계량기와 배전판에서 나온 검은 동력선이 굵은 신경 다발처럼 사방으로 뻗쳐 있다. 수북이 쌓인 시멘트 부스러기와 금속 쓰레기더미 속에서 용도 불명의 거대한 톱니바퀴가 마치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괴물 같은 모습을 반쯤 드러낸다.
 
 폐허의 미궁(迷宮)으로의 타임 슬립…. 오랫동안 미국에 거주하면서 뉴욕을 비롯한 유럽 대도시의 거리의 분위기를 독특한 컬러와 세련된 조형감각으로 채집해온 제이안의 이번 작품은 바로 청계천 일대의 영세 금속가공 공장골목 안의 그런 소재들을 찍은 것이다. 현대적인 조형과 화려한 색채를 가진 도심의 번화가가 아닌 청계천의 으스스한 뒷골목을 공장이 닫힌 일요일마다 누비고 다니며 수년 동안 촬영한 작품들이다. 이 버려진 거리를 다룬 작품에도 특유의 회화적인 느낌은 살아 있지만, 이번 작품들에서는 그가 지금까지 다뤄온 강렬한 원색의 대비와 조화로 구성된 대도시의 거리 모습과는 다른 무거운 공기 감과 절제된, 그래서 더욱 깊이 있는 서정을 느끼게 한다. 청계천의 골목 안 풍경은 조금 쓸쓸하고 슬프다. 그것은 그가 보여주는 세계가 영세공장들이 밀집된 거대도시 속의 동공(洞空)과도 같은 불가사의한 이 공간을 심리적인 풍경으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풍화를 거친 과거의 시간은 그것이 아무리 어둡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아름답다. 시간의 흐름에 대한 기억은 항상 그런 낭만적인 감정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뉴욕과 런던과 파리에서의 긴 시간의 터널을 거쳐 나온 그는 이제 ‘고향’에 돌아온 것이다.
 
 왜 청계천이었을까? 그 무질서하고 음울한 어둠이 지배하는 장소에는 분명 과거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다. 미래를 꿈꾸고 그것을 성취시켜 나온 어떤 에너지 같은 것들이 과거의 시간과 함께 이 장소에 아직도 계속해서 머물러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리고 현대화와 경제개발의 거대한 그늘에 짓눌린 청계천 일대의 ‘마찌코오바’의 좁은 골목 안에서 제이 안은 한국의 현대사를 빚어낸 빛과 어둠의 편린(片鱗)들을 자신이 오랫동안 다뤄온 컬러라고 하는 매개체를 통해서 그려내 보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이 골목 안으로 한 발 들어서면 누구나 일상적인 방향감각을 잃고 이차원(異次元)의 공간으로 떨어진 듯한 독특한 분위기에 휩싸이게 된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구불구불한 골목 안은 미궁(labyrinthos)의 세계다, 이곳에는 두세 평도 되지 않는 좁은 공간에 쇠를 깎는 선반이나 프레스 기계 하나를 들여놓고 금속제품들을 주문 받는 영세 공장들이 한 치의 틈도 없이 반세기 전의 모습 그대로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한쪽 구석에는 수십 년 동안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던 듯한 플라스틱 용기와 용도를 알 수 없는 공구들,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된 크고 작은 기계들이 벌겋게 녹이 슨 채 버려져 있다. 찢어지고 녹슨 철문, 양 옆으로 높게 쌓인 붉고 푸른 형광 색 플라스틱 호스와 울툭불툭한 바닥에 널린 금속 파편들, 머리 위를 위협적으로 가로지른 덕트, 빗물이 고여서 만들어진 작은 물웅덩이…, 허리를 구부리고 걷다 보면 자칫 같은 골목길을 맴돌게 되거나, 눈앞을 막아선 막다른 여인숙 담벼락에 부딪히게 된다.
 
 어느 골목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눈으로 뛰어드는 무엇인가가 그의 전 감각을 얼려놓는다. 홀연히 나타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그 광경은 놀라울 정도로 강렬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오랜 세월 그곳에 켜켜이 쌓여서 높은 밀도로 응축된 시간의 흔적이다. 그의 사진에는 연약하고 습기 찬 광선이 드러내는 물체와 색채와 그림자와 그 속에 깃든 기억과 시간의 흐름이 축적되어 있다. 이질적이고 자극적인 것들로 가득 찬 이 미궁에서, 머지않아 사라져버릴 운명에 놓인 존재들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게 움직이고 귀에 들리지 않는 아주 작은 소리를 낸다. 그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천천히 걸어나가면서, 그의 내부에 있는 감각기관들은 그 빛과 그림자와 색채와 그들이 빚어내는 초현실적인 광경에 즉각적으로 감응할 수 있도록 민감한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 그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골목 안을 채우던 금속성 소음과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멈춘 밤, 감시자처럼 차고 날카로운 빛을 밝힐 수은등과 그 불빛에 드러나는 공장의 낮은 지붕과 골목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우리를 슬프게 만든다. 근대화의 이름으로 어둠의 부분을 지워버린 서울에 남은 이 ‘쓸모없는’ 마지막 공간은 머지않아 영원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무인의 풍경을 찍은 제이안의 사진에는 과거에 그곳에 존재했던 많은 것들의 기억과 함께 그들과의 심리적 교감의 흔적이 짙은 농도로 정착되어 있다.
 
 그의 사진은 보는 사람에게 어떤 종류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그리스어의 ‘귀향’(nostos)과 ‘마음의 아픔’(algos)이 합성된 향수(nostalgia)란 단어 속에는 흘러간 과거의 시간이나 공간적으로 멀어진 장소를 그리워하는 감정이 깃들어 있다, ‘고향에 돌아가고 싶지만, 두 번 다시 가는 것이 실현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아니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마음의 아픔’. 그의 사진에 중복적으로 나타나는, 결코 거꾸로 되돌아가지 않는 시곗바늘과 붉은색으로 산화(酸化)된 쇳덩어리의 둔탁한 빛, 무겁게 닫혀 있는 철문, 비바람에 찢긴 천막, 벗겨진 페인트, 빗물이 벽에 남긴 얼룩, 찢어진 포스터…, 어느 것 하나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적인 사실을 환기시키지 않는 것이 없다.
 
 혼돈과 불규칙이 지배하는 좁은 골목, 낮은 담과 오래된 함석지붕을 얹은 집들에 둘러싸인 작은 공터 여기저기에 쓰레기와 누렇게 시든 잡초가 널려 있다, 버려진 듯 한쪽에 놓인 선반기계, 벽과 철문에 아무렇게나 뿌려진 원색의 스프레이 페인트, 담벼락과 지붕아래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간판들에는 아무 꾸밈도 없이 가장 명확하고 간결한 문자체로 상호와 전화번호, 취급하는 품목이 적혀 있다. 지붕 위에서 멋대로 무성하게 자라서 담장에 오후의 그림자를 떨구고 있는 이름 모를 잡초만이 이곳에서 생명을 가진 유일한 유기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머지않아 해체되고 결국은 그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붉은 녹이 피어 오른 쇠기둥도 아무도 살지 않는 집들도 골목길에 버려진 의자와 모퉁이의 전신주에 매달린 차가운 수은등도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밝고 위생적인 초록색 공간이 들어설 것이다. 그리고 몇 년인가 지나고 나면, 이 좁은 골목길과 수많은 작은 공장들, 오랫동안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하던 사람들도 모두 어디론가 떠나고, 우리들의 뇌리에서 그들의 존재는 영원히 지워져 버리고 말 것이다.
 
 자신은 왜 이 장소를 선택한 것일까? 무엇이 그를 이처럼 매료시키는 것일까? 집을 나서면서 금속공장이 늘어선 청계천 골목 안의 풍경을 찍는다는 행위의 의미를 잠시 생각해 본다. 근 미래의 폐허적인 풍경 속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가, 자신이 바로 지금 그 자리에 입회하고 있다고 하는 증표를 하나씩 사진으로 남겨 간다. 카메라를 손에 든 채 그곳에 숨 쉬고 있을 무엇인가를 찾아서 청계천의 좁은 골목 안으로 빨려들어가듯 조용히 들어서는 그의 뒷모습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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