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다른 길>
나눔과 평화 화두, 아시아 빈국 삶의 현장 담아
‘사진’ 이외의 말로 하는 ‘전시 군더더기’ 아쉬움
» 꽃다운 노동
박노해의 사진전 <다른 길>이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고 있다. 3월 3일까지. 지금으로부터 4년 전 첫 개인전을 열었던 박노해는 그동안 꾸준히 아시아 각국에서 사진을 찍어왔고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사진전을 열었으니 시인 박노해가 아니라 ‘사진가’ 박노해의 자격으로 제대로 활동을 해 왔다. 이제 그를 사진가라고 불러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길>전시는 티베트, 파키스탄, 인디아, 버마(미얀마), 라오스, 인도네시아까지 총 6개의 아시아 국가들에서 찍은 사진 120점이 전시된다. (2010년 첫 개인전을 열던 당시에 사진마을에 소개한 기사를 참고하라. )
지난 7일 전시장을 둘러보고 왔다. 평일 낮시간인데도 사람이 적지 않았다. 어떤 식이든 이미 유명한 인사가 사진전을 열면 관심을 더 많이 받는 법이다. 탤런트나 영화배우, 개그맨, 대기업 회장 등이 사진전을 열면 전시된 사진의 수준 이상으로 사람들이 몰린다. 명백히 그 사람의 지명도 덕분이다. 이를 그 사람의 사진과 바로 결부시켜 착각을 해선 곤란하다. 박노해는 어떤 경우인지 뜯어볼 필요가 있다. 그는 누구인가를 살펴보기 위해 전시기획사가 보내온 보도자료에 첨부된 이력을 요약해서 소개한다.
1957년 전라남도 함평 출생. 16세 때 서울로 와서 낮에는 노동자로 일하면서 선린상고(야간)를 다녔다. 1984년에 ‘노동의 새벽’을 냈다. 본명은 박기평. 필명 박노해는 ‘박해받는 노동자의 해방’이란 뜻으로 붙였다. 박노해의 시는 당시 노동자와 대학생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며 ‘얼굴없는 시인’으로 불렸다. 1989년 ‘남한사회주의 노동자연맹(사노맹)’을 결성했고 오랜 수배생활 끝에 1991년 체포되었으며 무기징역형에 처해졌다. 1998년 석방되었으며 민주화운동유공자로 복권되었으나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며 국가보상금을 거부하고 사회적으로 침묵상태에 들어갔다. 2000년 사회운동단체 나눔문화를 설립했고 이후 이라크를 시작으로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중남미 등의 분쟁현장에서 평화활동을 이어왔다. 2010년 첫 사진전 ‘라 광야’전을 열었다.
전시장 맨 안쪽의 벽엔 위와 같은 이력과 함께 박노해를 시인, 사진가, 혁명가로 소개해둔 코너가 있다. 그 곁에는 1984년 첫 시집 ‘노동의 새벽’도 전시되어있어 책장을 넘겨 볼 수 있게 해두었다. 대학시절 몰래 보던 그 책이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시들이 몇 있었다. 그러다가 참으로 오랜만에 어떤 시를 만났다.
“사람들은 날 보고 신세 조졌다고 한다. 동료들은 날 보고 걱정된다고 한다. 사람들아 나는 신세 조진 것도 없네……. (중략) 노동자가 언제는 별볼일 있었나 조질 신세도 없고 찍혀 봤자 별 볼일 없네. (중략) 노동운동을 하고부터 동료와의 깊은 신뢰와 나눔과 사랑 속에 참말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알았네. (중략) 이 땅의 노동형제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발하는. 죽음같은 저임금과 장시간노동의 형틀을 깨부수는 노동운동의 열기찬 대열 속에서 보람과 자랑스런 노동자로 노을도 낯설은 현장에서 지루함과 수모도 차근차근 삭여가며 지칠 줄 모르는 투쟁의 불꽃은 타네”
시의 제목은 ‘아름다운 고백’이었다. 후에 민중가요로 만들어져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이라면 들어본 사람들이 많을 것 같은 바로 그 시다. 시를 노래로 따라 읊조리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노동해방은 지금 왔는가?
전시장의 분위기를 참고하면서 박노해의 사진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오른쪽 편에 안내문이 붙어 있다. 하나는 사진전시에 걸린 흑백사진을 아날로그로 대형인화한 이야기며 하나는 전시와 더불어 펴낸 사진집의 인쇄에 관한 이야기다. 둘 다 장인정신을 발휘하여 “세계 최고의 아날로그 인화와 인쇄를 만날 수 있다”라고 보도자료에 나와있다.
정통 흑백 아날로그 인화로 전시된다. 유명 해외 사진작가들의 사진전이 연달아 열리는 요즘, 박노해 사진전은 국내 작가의 대형 사진전시를 만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이것은 박노해 시인과 뜻을 같이하며 고독한 장인의 길을 걸어온 두 사람이 있어 가능했다. 이젠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보기 힘든 대형 흑백 아날로그 인화 전문가로, 박노해 시인의 사진작품 인화를 전담해온 유철수(47), 그리고 독일에서부터 17년 동안 사진과 그림 인쇄만을 연구하며 파고든 유화(41)는 이 책의 제작에 온 심혈을 기울였다. 박노해 사진에세이 『다른 길』을 통해 코리아의 독자들은 인쇄술의 선진국인 유럽과 일본에서도 보기 힘든 세계 최고의 아날로그 인화와 인쇄를 만나는 ‘안복眼福’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사진전시는 하나의 종합예술이라 부를 수 있을만큼 사진집이나 인터넷으로 보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 사진의 크기, 사진이 걸린 공간의 힘, 사진의 배치, 관람을 고려한 동선, 조명, 그리고 최근 들어 전시장에서 빠짐없이 틀어주는 배경음악까지 모두 총체적으로 한꺼번에 다가오기 때문이다다. 혹자는 말한다. 사진가는 사진으로 이야기해야한다고. (기본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어떻게 생각해도) 맞는 말인 것 같다.
그러나 ‘사진’과 ‘사진전’이 다르다. 여기서 ‘사진’은 사진의 메시지와 형식을 말한다. 사진가는 ‘사진’으로 얼마나 중요하거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얼마나 설득력있고 진지하게 전달하는지 고민해야한다. ‘사진전’이란 것은 앞에 말한 ‘사진’을 포함한 나머지 여러 요소들의 결합상품쯤 될 것이다.
사진가는 사진으로 말하는 것이 맞지만 아무 사진가나 사진전을 열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비록 시설이 완벽하진 않다고해도 한국에서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쯤 되는 공간에서 전시할 수 있는 사진가는 손꼽을 정도다. ‘사진’으로 말할 것이 아무리 많은 사진가라도 전시할 능력이 없으면 골방이나 자그마한 갤러리에서 혼자 말해야 한다. 물론 요즘엔 SNS라는 훌륭한 온라인 공간이 있어 그곳에서 자신과 자신의 사진을 소개할 기회가 열려있긴 하지만 여전히 반듯한 전시장에서 전시를 여는 것은 사진가의 로망이다.
따라서 박노해의 사진전의 출발지점에 인화에 관한 설명이 자랑스럽게 붙어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사진전시가 종합예술이라곤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진의 내용으로 말해야 한다. ‘대형’, ‘흑백’, ‘아날로그’, ‘유럽에서도 보기 힘든’ 같은 수식어는 박노해 사진전에 걸린 사진의 메시지에 도움이 되질 않는다.
그런 이야기는 그저 보도자료 한구석에 참고 삼아 밝혀둘 일이다. 대형이라서, 보기 힘든 아날로그라서 “이 전시의 가치가 더 높다”라는 이야기를 어떻게 할 수 있는가? 낯이 간지러워서 혼났다. 하기야 한국의 원로사진가들이라 불리는 사람들도 다른 사진가의 전시를 보면서 “인화는 잘했네”라고 말하는 것이 현실이니 저렇게 낯 뜨거운 자랑을 할 수 있나 보다. 당장에라도 인화 자랑은 내리면 좋겠다.
» 노래하는 호수
» 노래하는 다리
» 커피 체리를 딸 때마다
» 아침 안개 속의 라오스 여인
» 인디아의 아침마음
시간을 갖고 천천히 한 장씩 감상했다. 대형사진 중에는 필름 테두리의 구멍(perforation)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인화한 것이 다수 있었다. 보도자료엔 이렇게 쓰여있다. “또한 모든 흑백 사진의 필름 테두리는 ‘노 트리밍No trimming’의 증거로, 치열한 현장에서 이루어낸 결정적 구도 미학을 확인할 수 있다.”
이건 뭔가? 앙리 카르띠에 브레송이 “누르고 나면 절대 손을 대지 않는다”고 하면서 몇 장의 작품에서 필름구멍의 흔적을 슬쩍 남겨서 인화한 것을 보고 혀를 찬 적이 있었는데 이번 박노해의 전시장에선 그 정도가 아니었다. 브레송의 인화는 애교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트리밍을 안했으면 그 뿐이다. 트리밍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치열한 현장에서 이루어낸 결정적 구도 미학”이라고 주장한 이가 누군지 궁금하다.
유치하기 짝이 없다. 로버트 카파처럼 총알이 빗발치는 현장에서 완벽한 프레임을 즉석에서 잡아냈다고 하더라도 저런 표현을 쓰는 것은 과하다.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은 저런 군더더기의 수식어를 이 사진전에 갖다붙여야할 정도로 사진의 내용이 열악한 것인가.
불쾌함을 억누르면서 다시 사진을 순례하기 시작했다. 지난번 전시에서 본 적이 있는 반가운 작품도 몇 있다. ‘노래하는 다리’, ‘노래하는 호수’ 같은 작품은 볼수록 정겹다. 그는 사진을 왜 찍었을까? 그래서 사진마다 열쇳말을 붙이면서 세어보았다. 가장 많은 것은 아시아 각국의 농경문화였다. 20장 넘는 사진에서 남녀 농부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땅에서 일하고 있었다. 여성의 노동도 많았고 ‘인레호수’ 같은 고기잡이 풍경, 아이들이 노는 풍경, 놀이문화, 가사노동 등이 두 장 이상씩 걸려 있었다. 이런 것을 모두 아우르는 낱말은 바로 ‘삶의 현장’이다.
박노해는 중앙일보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양극화를 해소해야 하고 약자의 인권도 옹호해야 한다. 그런데 이제 우리 사회에 가난한 사람은 없다. 부자가 되지 못한 사람만 있을 뿐이다. 여느 시골집 옷장에도 안 입는 옷이 쌓여 있다.”
가난과 부의 기준이 달라졌을까? 시인 박노해가 노동의 해방을 외쳤던 30년 전과 사진가 박노해가 아시아의 빈국에서 노동의 현장을 찍은, 길게 잡아 최근 10년 사이에. 그렇다고 볼 수 없다. 80년대 한국과 21세기 아시아의 빈국들은 (자본주의에 의해 강요당한) 같은 모순에 잡혀 있다.
21세기 한국은 거기서 벗어났는가. 4년 전 사진가 박노해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최근의 용산참사 등 국내에도 사진으로 기록할 만한 굵직한 사안이 많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말이 통한다. 내가 굳이 사진으로 옮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국내엔 국내의 현장을 기록하는 수많은 사진가들이 있다. 그분들이 아주 잘하고 있기 때문에 내 몫이 아니라고 본다. 내가 다닌 분쟁지역은 남이 할 수 없고 잘 하지 않는 대상이다”라고 했다. 좋다.
그렇다면 박노해는 남들이 잘 하지 않는 곳인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아시아의 오지에서 민중의 삶을 돌보고 있는 것이니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책의 인세와 사진전 등의 수익금을 국내외 어려운 이웃들에게 전해 온 박노해 시인의 뜻에 따라, 이번 사진전의 수익금 역시 사진 속의 주인공들인 파키스탄의 아이들, 버마의 농부들, 인도네시아 아체 고아와 주민들을 위해 쓰인다”(보도자료)고 하니 따뜻하다.
그런데 박노해가 말한 “국내에서 국내의 현장을 기록하는 수많은” 사진가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박노해의 전시 ‘다른 길’은 분명하게 가난한 이들의 삶의 현장을 보여준다. (보면서) 고통스러운 장면이 없다는 것이 특이하다. 사진가 박노해의 의도다. 소박하게 살고 있으나 남루하지 않다. (가난한 사람이 없는) 21세기 한국의 관객이 보기엔 불편한 삶인 것 같으나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시와 함께 보는 사진은 소화가 잘되어서 좋았다. 더구나 사진가가 직접 쓴 시가 시인이 직접 찍은 사진과 같이 걸려있으니 금상첨화였다. 요약하면 이렇다. 본격적인 사진가의 길로 들어선 박노해의 장도를 축하한다. 이제 사진가라는 이름이 분명히 붙었으니 이제 제대로 사진을 찍어야할 것이다. 그건 그거고 그 전에 사진가 본인의 뜻에 따라 ‘유럽에서도 보기 힘든, 대형, 흑백, 아날로그’ 전시로 포장했는지 확인하고 싶다. 필름을 쓰는 마음은 소중하다. 낡은 만년필을 쓰는 마음과 같다. 그러나 필름으로 찍고 현상하고 인화하면서 발생하는 화학폐기물이 얼마나 많은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여러모로 디지털이 더 값싸고 친환경적이다.
전시장을 나오다 보니 같은 세종문화회관 1층에서 열리는 '점핑위드 러브'전시의 대형 포스터가 박노해 사진전의 포스터와 나란히 걸려있었다. 겉만 봐선 모른다. 오드리 헵번이 인생의 황혼기에 얼마나 아름다운 나눔의 삶을 살았는지. 그러므로 점프하는 여배우와 티베트의 한 마을에서 아이에게 젖을 먹이러 천막집으로 들어가는, 야크 젖을 짜던 스무 살 엄마가 다같이 아름다운 것이다.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사진/나눔문화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