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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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화 사부 쿠라토미 선생의 단골 와시(和紙, 일본전통종이)가게가 있다. 판화 찍는 연습을 하다가 종이 만드는 곳을 언젠가 보고 싶다고 말했더니 사부는 즉각 그곳에 전화를 걸어 덜컥 약속을 잡아 버렸다. (뭔 말을 못한다니까….) 사부는 뭔가 내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거라면 항상 발 벗고 나선다. 사진을 찍고 싶은 곳이 있다면 어떻게 든 다리를 놔 준다. 내가 당신의 사람이라 여겨 그렇기도 하겠지만 남을 배려하는 마음은 이곳 사람들의 천성이 아닌가 싶다. 어쩌겠나. 이런 사람들을 만난 것도 팔자려니 생각하고 고맙게 누리고 사는 수밖에.

 약속한 날이 왔다. 사부와 사모, 나까지 셋이서 야메(八女)를 향해 길을 나섰다. 야메는 후쿠오카현 가장 남쪽에 있는 인구 7만 명 급의 시. 일본 국내에서도 전통 차와 와시 생산지로 꼽히는 곳이다. 야메는 생각보다 멀었다. 자동차로도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간선도로를 벗어난 후에도 강둑을 따라 한참을 올라갔다. 사부가 멀리 오래된 일본집 한 채를 가리켰다. 예로부터 와시 장인들은 닥나무를 강물에 담가 가공하며 살았기 때문에 강과 밀접하단다. 집안에 들어서니 서까래가 보이는 높은 천정이 온통 제비집이다. 제비들은 매년 돌아와 집을 짓는단다. 오랜만에 보는 제비집에서 자연 친화적인 환경이 물씬 느껴진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와시 장인 구마모토(熊本,70)씨가 반갑게 맞아준다. 그는 고집스럽게 생긴 얼굴에 후쿠오카 사투리가 강했다. 가만히 있어도 외관에서 장인 분위기가 풍기는 스타일이다. 그는 젊은 시절에 직업 사진가로 활동했다 한다. 10여 년 간 주로 상품관련 카탈로그 사진을 찍었다. 도쿄에서 7년 일하다가 후쿠오카로 이동해 3년쯤 될 무렵 미련 없이 사진 일을 그만두고 야메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종이 만드는 일을 잇기 위해서였다. 그의 나이 서른 살 때였다.
 
 92세의 아버지는 지금도 정정하시다. 평생 종이를 만들며 산 노인이다. 가업을 잇기 위해 아들을 불러들인 것이 40년 전이다. 종이 만드는 일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해 온 일이다. 당시는 이 근처 사람들이 모두들 종이 만드는 일을 하며 살았다. 1901년의 국내통계로 보면 생산업체는 7만 호에 종사자는 20만 명이었다. 하지만 메이지 후반부터 신문이나 도서 등의 대량 인쇄가 본격화하면 와시는 서양 종이에 밀려나는 신세가 됐다. 전통와시는 양지에 비해 생산 효율이 떨어지고 잉크, 인쇄기계와 궁합이 나빴기 때문이다. 전성기 때는 강 주변에 1,800여 가구가 종이 일을 하던 때도 있었다. 이 마을 주민 50여 가구가 모두 와시 일을 했단다. 지금은 6가구만 남아 겨우 전통 야메 와시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전통 와시 만드는 일은 대단히 복잡하지만 크게 6단계로 나눌 수 있다. 1. 샤주쿠(煮熟) - 2년생 닥나무를 겨울에 베어 큰 솥에 삶는다. 2. 치리토리(ちり取り) - 검은 껍질을 벗기고 흰 섬유질만 추출한다. 3. 다가이(打解) - 때려서 섬유질을 잘게 푼다. 섬유질을 잘게 푼 다음 큰 그릇에서 물과 3~5% 비율로 휘저어 섞는다. 이 과정을 고카이(叩解)라한다. 고카이가 끝나면 일단 물을 짠 다음, 다시 물에 풀어서 토로로 아오이라는 식물추출 용액을 섞는다. 토로로 아오이는 원료의 부유도를 높이고 종이와 종이가 쉽게 떨어지게 만드는 성질이 있다. 4. 카미스키(紙

漉き) - 물에 푼 용액에서 종이를 뜬다. 다른 과정도 그렇지만 특히 종이를 뜨는 일은 종이 만들기의 핵심으로 숙련된 기술이 필요한 과정이다. 5 앗사쿠(圧搾) - 뜬 종이를 켜켜이 쌓아 하룻밤을 두었다가 압착시켜 물을 뺀다. 6. 칸소(乾燥) -종이를 떼어 뜨거운 스테인레스 판에 솔로 붙여 말린다. 최종과정으로 한 장씩 꼼꼼히 품질을 확인하여 출하하면 끝이다.  
 
 야매 와시의 특징은 양지에 비해 섬유가 길어 얇고 질기다는 점이다. 그래서 수명이 길고 독특한 감촉을 갖는다. 물론 목재 펄프 원료에서 생산되는 양지와 비하면 제한된 원료에 생산성도 극히 낮아 가격이 비싸다는 흠이 있다. 그럼에도 1000년 와시라는 뛰어난 보존성으로 일본화 용지, 목판화 용지 등 다양한 용도로 쓰이고 있다. 에도시대는 문의 창호지 외에 기모노와 침구까지도 사용하고 있었다 한다. 부드럽고 질긴 특성을 잘 살려 쓴 것이다.
 
 커피가 나왔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부인이 한국드라마 팬이다. 주로 사극을 좋아한다. 얼마 전 주몽을 재미있게 봤단다. 그 덕분에 그녀는 일본역사보다 한국역사에 더 밝아진 것 같다며 웃는다. 한국어 인 고구려, 백제라는 용어가 거침없이 나온다. 발음도 유창하다.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는 폐하라든가 하는 한국말들은 인토네이션까지 그대로 흉내 낸다. 드라마는 자연스럽게 국경을 넘어 서로의 이해를 돕고 있다. 한류는 문화 전파에 요긴한 장르다.
 
 요즘 와시는 불황이다. 와시가 잘 팔리지 않는 것은 오래된 일이다. 와시가 서양 종이에 밀려나면서 침체는 시작됐었다. 최근에는 외국에서 수입되는 종이도 많아졌다. 타이나 중국에서 많이 들어온다. 중국은 예로부터 좋은 종이로 유명한 나라였다. 물론 와시의 품질은 정평이 있긴 하다. 써 본 예술가들은 반드시 다시 찾는다. 먹의 번짐이라든가 어떤 느낌이 나는가가 가장 중요한 거니까. 하지만 사람들은 경제적인 이유로 와시를 가까이하지 못한다.
 
 요즘 매출은 계속 하향세다. 밥벌이가 되지 않으니 뒤를 이을 사람도 없다. 가업이라는 인식이 이미 희박해지 오래다. 자기 아이라고 뒤를 잇게 할 수는 없는 세상이다. 시대 흐름에 따라 용도가 줄어 와시가 사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오랫동안 이어온 조상의 지혜가 중단되는 일이 안타까울 뿐이다. 희망은 있다. 산업으로서 와시는 사라지겠지만 ‘아트’로서 종이 만들기는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다. 그를 위해 와시를 이용한 다양한 문화 상품들이 시도되고 있는 중이다. 와시의 질감을 이용한 등(燈)도 그 중 하나다.  
 
 사무실 한쪽에 와시 등이 걸려있다. 은은한 불빛이 마음을 끈다. 그 옆에 단아한 수제 판화 달력도 걸려있다. 전통 와시에 먹으로 찍은 문화 상품이다.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고 새기는 건 어른들이 도와 줘서 공동으로 완성한 작품이란다. 서로 돕고 살려는 따뜻한 마음들이 느껴진다. 희망은 어디든 있다. 그것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뿐.  

 

 



유신준 작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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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고도 먼 이웃 일본을 깊이 알고 싶어 조기퇴직하고 백수가 됐다.

 

지인의 소개로 다누시마루 산기슭의 오두막을 거처로 정했다.

 

자전거를 벗삼아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하며 유유자적하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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