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근대사회에서는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서낭당(城隍堂)을 세웠습니다. 그 형태와 이름이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기도 한데, 마을 수호신을 조그만 건물 안에 모시는 당집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마을의 당집이 대부분 사라졌지만, 부안군의 섬인 위도의 진리마을에는 아직도 그것이 남아있습니다.

  진리(鎭里)는 조선시대의 숙종 때 왜구를 막기 위해 설치한 수군의 진영이 있어서 그 이름을 얻었습니다. 오늘날에 위도면 소재지이기도 하지요. 이 마을 서쪽으로 높지 않은 산 숲속에 당집이 있습니다. 여름철 무성하게 자란 잡초와 나뭇가지가 길을 가렸지만, 이미 찾아가기로 작정했으니 등산용 스틱으로 풀과 나뭇가지를 치면서 무작정 올라갔습니다. 마침내 당집을 품고 있는 숲에 도달하였는데, 울창한 나뭇잎으로 말미암아 빛이 닿지 않는 바닥에는 풀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두컴컴한 신당 안에는 부처님, 공자님, 산신령, 그리고 단군 할아버지와 관운장으로 보이는 그림이 벽에 가득 걸려 있었습니다. 만일 바람이라도 불어 처마 끝에 달린 풍경이 요란하게 소리라도 냈더라면 으스스한 공포감을 느꼈을 법한 분위기였지요.

  대개 당숲이나 당산나무를 훼손하면 동티가 난다고 하여 함부로 손대질 않습니다. 그래서 진리 당숲은 학술적으로도 가치있는 나무들이 고목이 되도록 잘 보존되어 왔습니다. 오후의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간간이 스며들며 고목들을 비추고 있어서 신비롭게 보이는 나뭇가지들을 몇 장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당숲 밖으로 나오니 초가을 높고 파란 하늘에 부드러운 새털구름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사진을 정리할 때 마치 꿈 속의 일이었던가 싶은 사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진리 당숲의 고목에 용처럼 보이는 괴수가 찍혀있는 것입니다. 혹시 신당을 수호하는 괴수가 아니었을까? 정월 초이튿날 동제(洞祭)를 치를 때 외에는 사람이 들지 않는 숲속에 그것도 이방인들이 무리 지어 들어왔으니 우리들의 동태를 은밀히 살피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공주의 무령왕릉을 수호하는 무덤 속 석수(石獸)는 왕릉 발굴 전날 밤 한 발굴단원의 꿈 속에 나타났었다고 하는데, 아마 떠들썩하게 소문이 난 발굴작업에 대한 경고를 보내기 위함이었겠지요. 여기 진리 당숲의 괴수는 우리 일행의 침입을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어쩌다가 카메라에 담겼나 봅니다. 이렇게 우연히 그 실체를 드러낸 진리 당숲의 괴수는, 빛과 어둠의 조화 속에서만 나타나는 영물이니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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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랑

2020.10.05 04:28:33

명문입니다~ ^^ (실례의 마씀이 될지 모르지만~ 요~)

todamhs

2020.10.05 18:50:16

한낱 부러진 나뭇가지에 불과한 것을 제멋대로 용이니 괴수니 하면서 상상해 본 것인데, 으랑님께서 동의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땅나라

2020.10.05 20:29:04

그것을 볼수 있는 안목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저도 동의합니다)

푸른 하늘에 봉황도 한마리 있던데. . .ㅎ

 

todamhs

2020.10.06 00:38:40

어두컴컴한 당숲에서 나왔을 때의 푸른 하늘이 대비되어 찍었던 장면인데, 땅나라님은 하얀 새털구름에서 봉황을 읽어내시네요. 땅나라님의 상상력에 감동을 받습니다. 감사합니다.

으랑

2020.10.06 07:55:20

-  그리고 어두컴컴한 신당 안에는 부처님, 공자님, 산신령 그리고 단군 할아버지와 관운장으로 보이는 그림이 벽에 가득 걸려 있었습니다. - 라는 이 말씀은 매우 귀중한 자료입니다. 숙종 때 위도 사람들의 신앙 생활입니다. 민간신앙의 생생한 모습이지요. 서해(황해)의 작은 섬에 남아 있는 자료입니다. 이 그림 들도 담아 오셨으리라 여겨지는데요.....  

todamhs

2020.10.07 00:34:53

으랑님의 지적처럼 신당 안의 그림을 사진으로 찍었어야 했는데, 카메라의 플래시를 지참하지 않아서 어두운 실내의 모습을 담을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그리고 일행 중의 한 분이 안으로 들어가 휴대폰 플래시를 이용해 그림을 비쳐보았기 때문에 저는 밖에서 대충 보았을 뿐입니다. 그 기억에 의지하여 신당 안의 모습을 간략하게 소개했는데, 으랑님의 지적을 받고 인터넷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마침 한 블로그에 진리 당집 안에 모신 신들의 사진과 그 이름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칠성, 용왕, 산신, 대신할머니, 장군 등. 앗뿔사! 저의 설명이 잘못되었네요. 11매의 그림 중에 공자님이나 단군 할아버지는 없습니다. 이름이 밝혀져있지 않은 경우도 어린 시절 그림책에서 보았던 옥황상제나 신선풍의 노인 그림 등입니다. 위도에 다시 들어갈 기회가 온다면 진리 당집 신들에 대한 주민들의 의견을 구해야겠습니다. 아무튼 으랑님으로 인해 저의 잘못을 깨닫게 되어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으랑

2020.10.07 04:34:50

자세한 추가 정보를 올리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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