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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어날 때부터 이를 악다물고 태어났답니다. 내 의지대로 입을 벌려 말할 수도 없지만, 내가 헤벌쭉 입을 벌리고 있으면 이젠 내 삶이 끝났다는 표시니 살아 있는 한 나는 언제나 입을 꽉 다물고 과묵하게 살아야 합니다. 빈틈없이 다물고 있는 입이야말로 내가 살아있는 증거랍니다.

 

내 삶의 시작은 엄밀하게 말하면 빨랫줄에 걸린 빨래를 처음 붙잡는 그 순간부터랍니다. 그렇게 내 삶이 시작되면 빨래를 물고 있든 아니든 빨랫줄과 더불어 삶을 살아간답니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면 이리저리 휘날리는 빨래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정신이 아뜩해질 때도 있습니다.

 

물론 바람 없이 햇살 따스한 날이나 비라도 오는 날이면 편안하게 쉴 수는 있지만, 빨래를 문 날이면 늘 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칫 빨래라도 떨어뜨리는 날이면 버림을 받을 수도 있으니 이가 아파라 입을 악 다물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게 사는지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그저 그게 내 모습이니까 그렇게 살아갑니다.

 

어느 따스한 겨울날 아침, 주인집 아주머니가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콧노래를 부르며 청소를 합니다. 이 모습을 본 빨랫줄이 한숨을 쉬듯 한마디 합니다.

 

"야, 오늘은 아무래도 더러운 걸레를 걸치고 있어야 하나 보다."

"너는 그냥 네 몸에 걸치고 있으면 되지만 나는 저 더러운 걸 입에 물고 있어야 해."

"에이, 날씨도 좋은데 기왕이면 예쁜 옷 같은 것을 빨아서 널면 좀 좋아!"

"그러게 말이다. 아무래도 오늘은 더러운 걸레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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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랫줄도 아마 나와 같은 기분인가 봅니다. 그 많은 빨래들 중에서 양말을 물어야 할 때는 그런 대로 봐 줄만 한데, 걸레를 물어야 하는 날이면 정말 기분이 확 잡치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청소를 끝내고 나서 걸레를 빠는데 저렇게 더러운 것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구정물이 나왔습니다. 오늘은 아무리 악다문 입이지만 만일 저 걸레를 또 물어야 한다면 "퉤!"하고 뱉어 버릴 작정이었습니다.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주머니는 콧노래를 부르며 걸레를 탈탈 털어 빨랫줄에 널고는 내 입에 걸레를 물렸습니다. 놓아 버리고 싶었지만 악 다문 입술은 그저 더러운 걸레를 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 그 기분이란 겪어 보지 않은 분들은 모를 겁니다.

 

마음으로는 뱉어 버리고 싶어도 자갈 물린 것처럼 꿈쩍도 안 하는 내 입술이 원망스러웠습니다. 너무 화가 나서 걸레에게 화풀이를 했습니다.

 

"야, 더러운 걸레. 넌 나하고 빨랫줄한테 미안하지도 않니?"

"미안해. 그래도 그게 내 일인걸."

 

걸레는 아직 제 몸에 남아 있는 물방울들을 뚝뚝 흘리는 척하며 쏟아지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좀 심했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기왕 시작한 것인데 걸레를 물고 있는 내 기분이 어떤지 오늘은 다 말해 버리고 싶었습니다. 빨랫줄도 거들었습니다.

 

"이 화창한 날, 너 때문에 기분 다 잡쳤어. 너 때문에 저 따스한 햇살도 맘껏 쬘 수가 없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넌 미안하다고 하면 다 되는 줄 아나 본데, 우린 기분이 더럽다고."

"애들아, 내 얘기 좀 들어줄 수 있니?"

"......"

"나도 깨끗하게 살고 싶었어. 그래서 나도 맨 처음에는 내 몸이 더러워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단다. 더러워지기만 하면 좋겠는데 내 몸이 더러워질수록 내 몸도 점점 닳아 없어진다는 것도 참을 수 없었지. 어떤 때는 더러운 먼지들을 온몸에 묻힌 채 화장실 한구석에서 온밤을 지새워야 할 때도 있었단다. 그리고 어떤 날은 밤새 물에 담가 놓는 바람에 내 몸에 묻었던 먼지들이 다 빠져나와 숨도 쉬지 못할 구정물 속에서 잠 한숨 못 잔 적도 있었어. 게다가 펄펄 끓는 뜨거운 물은 얼마나 견디기 어렵던지 몇 번씩 기절하기도 했어.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걸레로 태어나 고생을 하나 생각도 해 봤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단다. 나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 쉼의 시간이 있다면 지금처럼 너희를 의지해서 나른한 햇살과 바람을 쐬는 시간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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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는 말에 조금은 뜨끔했습니다. 걸레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요, 쉼의 시간인데 우리에게는 가장 끔찍한 순간이라고 투덜대기만 했으니 조금은 미안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걸레는 그동안 품고 있었던 것들을 다 털어 내겠다는 듯이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사실 얼마 전부터 더 행복한 순간들을 발견했어. 그것은 내 몸이 더러워지는 순간이었지. 내가 더러워지면 더러워질수록 다른 것들은 더 깨끗해진다는 것을 알게 된 거야. 참 신기하더라. 내가 더러워진 만큼 깨끗해진다는 것을 알고 난 뒤로 나는 내 더러움이 더럽게 느껴지지 않았고, 그 일은 나 외에는 누구도 할 수 없다는 것도 안 이후로는 걸레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어. 그러나 때로는 더러운 것들을 말끔히 씻어 내고 걸레가 아닌 다른 것이 되고 싶은 욕심이 없는 것도 아니었어. 어느 날 몇 번 기절할 정도로 뜨거운 물에 삶아진 후 백옥같이 하얗게 변한 나를 발견했지. 너무 기뻤어. 항상 나보다 높은 곳에서 순백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행주 못지않게 하얗게 변한 나를 보고는 나도 이젠 행주가 되나 보다 했어. 그런데 걸레는 아무리 깨끗하게 빨아도 걸레라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되었지."

 

빨랫줄과 나는 그만 키득거리며 이구동성으로 말했죠.

 

"맞아, 걸레가 행주가 될 수 없지. 걸레는 아무리 깨끗해도 걸레지."

"그런데 그냥 내가 걸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니까 편안해지더라. 걸레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잖아. 하필이면 그 많은 천 쪼가리 중에서 내가 걸레가 되었습니까 항변도 했지만 이젠 그런 항변 따위는 하지 않아. 세상에 중요한 일들이 많지만 뭔가를 깨끗하게 한다는 일 또한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오히려 내가 걸레인 것을 감사하게 되었어. 존재의 이유를 알게 된 것이지. 단 하루를 사는 하루살이에게도 존재의 이유가 있듯이 말이야."

"존재의 이유?"

"그래,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다 그 이유가 있기 때문이래."

 

더럽다고 우습게 여겼던 걸레가 내가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질문을 했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나는 그저 부러워하며 한탄하고, 비교하며 우쭐해 할 뿐이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날 밤, 한숨도 못 자고 내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악 다물고 있는 내 입술, 걸레도 마다하지 않고 물어야만 하는 내 입술이 그토록 미워 보였는데 조금씩 예쁜 구석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김민수의 어른들을 위한 동화 희망우체통 중에서>

 

 

*게시판 성격에 맞는지 모르겠지만, 아래 보영님의 빨래집게 사진을 보고 전에 써 두었던 글이 떠올라 올립니다.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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