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산한 내 pc에 메일이 들어왔다. ‘한겨레 제5기 태안 포토워크숍’ 소식이다. 2천 년대로 넘어오던 몇 해 사이 한겨레문화센터의 사진 초급반 강좌를 전후 두 차례나 들었으니, 예우해서 소식을 알린 것은 있을 법한 일이다. 가족이 서둘러 참가비를 내고 등록을 끝내 버렸다. 아마도 할망구의 오랜 병치레를 하면서 한결같이 간병인 구실을 잘했다고 이를테면 포상휴가를 보내는 셈일 것이다. 그래서 카메라를 둘러메고 꿈에도 그리던 출사 여행이려니 쭐레쭐레 따라나섰다.
첫날은 숙소를 배정하는 것으로 마쳤지만 이튿날 아침, 일정은 천리포수목원 견학 겸 사진 작업으로 시작되었다. 수목원에 도착하니 미인 안내원이 수목원 지리부터 안내를 했고 이내 안내원의 안내를 따라 희귀하고도 다양한 나무를 구경하면서 “민병갈 선생님은 결혼도 하지 않고 이 수목원에 평생을 바치셨습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신 분입니다”라는 말을 거듭거듭 들으며 수목원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아름답게 잘 가꾸어진 꽃밭에 당도했다. 안내원은 자유롭게 사진을 많이 찍으라고 당부하면서 우리를 꽃밭에 남겨두고 가버렸다. 꽃밭은 농약을 쓰지 않은 탓인지 나비들의 천국이었다. 나도 한 마리 나비가 되어 한참 나비를 따라다니다가 주변을 살피니 일행이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꽃밭에서 미아가 된 것이 분명하다. 꽃밭을 벗어나려는데 꽃밭의 또 다른 한쪽에서 패랭이꽃이 무리 지어 내 발길을 막아서는 것이 아닌가. 내게는 분명 놀라움이었다. 패랭이꽃이 무리지어 나타나는 것은 풍쿠툼이라 할 감흥이었다.
풍쿠툼. 전혀 개별성 감흥이라 했던가. 어찌 이런 감흥이 도상이 된 연후에야 일어난다는 것인가. 지금 저 패랭이꽃은 어느 꽃의 도상보다도 더 강렬한 감흥을 내게 일깨워 주고 있다.
스물일곱 살, 무기력한 청년은 시골에 내려와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소나기가 지나간 뒤 허리를 조르는 허름한 군용 점퍼를 우비 삼아 걸치고 금강의 미호천 둑길에 마음을 버리러 나서면 시오리 둑길 가득히 허리까지 차는 패랭이꽃이 군락을 이루어 환한 웃음을 보내는 것이다. 그 후 서른일곱, 나는 서울의 한 고등학교 국어교사가 되어 시골을 찾아가는 길에 미호천 둑길을 다시 찾았다. 빨간 패랭이꽃이 반겨야 할 강둑에 난데없이 하얀 개망초가 바람에 물결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후 방송 대담에서 “개망초는 어느 미군 병사의 UN백 자루에 묻어온 씨앗이 지금 이 나라 천지를 뒤덮고 있는 것입니다.”라는 화훼학자의 말을 들은 뒤 그날부터 어디서나 패랭이꽃을 찾으려는 버릇이 생겼다.
패랭이꽃의 무리, 정말 반가웠다. 벌만 날아드는 패랭이 꽃밭에서 꽃사진을 찍다가 이제 내가 미아가 되었나 왕따가 되었나 생각하며, 겨우겨우 길을 더듬어 일행을 찾아가서 버스에 올랐다.
“꽃밭에 패랭이꽃이 많았거든요. 이 꽃 말이지요, 다른 데서는 전혀 볼 수가 없습니다.” 시간에 늦은 변명이나 하듯 지꺼려 댔다.
“작년에 몽골에 갔더니 거기 패랭이꽃이 많더라구요.” 옆에서 신미식 작가가 편이라도 들듯 거들어 주었다.
아하, 그렇구나. 몽골의 초원에는 지금도 패랭이꽃이 많이 피는구나. 그러고 보니 몇 년 전 광개토대왕비를 보러 장군총(광개토대왕릉이 분명하다)이 있는 만주 지안에 갔을 때 지안의 산하 언덕에도 패랭이꽃이 많이 피어 있었다. 몽골과 만주는 우리 먼 조상들이 거쳐 이주해 온 고토가 아니던가.
개망초는 20세기에 들어 이 땅에 들어온 귀화식물이다. 패랭이꽃은 귀화식물인 개망초에 밀려나 이 땅의 산하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그 패랭이꽃을 귀화인 민병갈 선생님의 천리포수목원에서 무더기로 만나다니,이 또한 무슨 아이러니인가.....
윤철중/상명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