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기 일본 한겨레포토워크숍 수상작을 발표합니다. 심사는 지난 1월 12일(목요일) 한겨레신문사에서 열렸습니다.
심사위원: 신미식(사진가), 박태희(사진가), 노순택(사진가), 곽윤섭(한겨레 사진기자)
최우수상: 박호광 <신화와 인간이 공존하는 곳 큐슈>
우수상: 정용기 <관광지에서 일하는 사람들>
제8기 일본 한겨레포토워크숍 심사평
어설픔이 때로는 강렬한 호소력이 되는 역설
머리품 이전에 발품, 떨리는 ‘육체노동 중독’
우리는, 보는 만큼 알게 되는 걸까, 아는 만큼 보게 되는 걸까?
인간에게 ‘본 것’ 혹은 ‘보는 행위’에 대한 신뢰의 역사는 짧지 않다. 의심 많은 인간이라지만,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이상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시각의 신화’가 옛사람과 오늘의 우리 안에 자리를 잡아 왔다.
알다가도 모르겠다면, 사람이거나 사진이거나
동양에 “백번 듣는 것이 한번 보는 것보다 못하다(百聞 不如一見)”는 고사성어가 있다면, 서양에는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Seeing is Believing)”라는 속담이 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 또한 시간과 공간을 아우른다. 이는 시각에 대한 믿음이 과거와 오늘을 넘나들 뿐만 아니라, 동서양을 넘나드는 보편성이 있음을 알려준다.
“아, 눈이란, 우리의 믿음마저 움직이누나!”
“시각이란, 어찌하여 우리의 마음마저 흔들어 놓고, 좌지우지하는 겐가!”
하지만, 과연 그럴까?
보는 행위에 대한 보편적인 신뢰만큼은 아닐지라도, 보는 행위에 대한 불신 또한 만만찮다는데 우리는 동의할 수 있다. 시각의 우월에 고개를 끄떡이던 이도, 다시 마음의 우월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아, 믿음이란, 우리의 눈마저 멀게 하누나!”
“마음이란, 어찌하여 우리의 눈에 ‘또렷’과 ‘흐릿’의 서로 다른 필터를 갈아 끼우는 겐가!”
시각과 지각은, 깊숙이 주고받는다. 우리는 주고받은 것들을 모은다. 조선 정조 때 문인 유한준의 글에는 이러한 ‘앎과 봄과 모음’의 삼각관계를 담겨있다.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며, 볼 줄 알면 모으게 되니, 그때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앎과 봄과 모음’의 세 가지 행위가 한데 모이는 지점을 찾으라면, 그곳이 바로 사진이다. 보려는 욕구와 알려는 욕구와 소유하고 모으려는 욕구가 뒤얽힌 그 속에서 사진이 만들어진다. 아울러 그것들을 내보이려는 공감의 욕망, 과시욕이 덧붙는다.
황금이 돌인 세상은 없거나 오지 않고
하루에 밥숟가락 뜨는 횟수보다 카메라 셔터 누르는 횟수가 많은 이들이 늘고 있다. 가히 대한민국은 사진공화국이고, 거리마다 집집마다 사진작가가 넘쳐난다. 사실 이것은 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왜일까? 앞서 짚어본 서너 가지의 욕망 때문에?
그 때문만은 아니다. 반박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사진이, 쉽기 때문이다. 만약 사진이 어려운 것이라면, 제아무리 욕망이 부글부글 끓어도 이렇듯 쉽게 카메라를 들 수 없다. 디지털 시대의 사진은 너무도 쉬운 것이어서, 단지 보고, 셔터를 누르기만 하면 된다. 단지 붓질을 한다고 명화를 그릴 수 있다거나, 글씨 좀 끼적댄다고 그럴싸한 시나 소설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닌데, 사진에선 그게 된다.
사진기는 사람을 용감하게 한다. 디지털 시대의 사진기는 직업사진가마저 우습게 만든다. 사진은 쉬운 거니까. 누구나 내일부터라도 사진작가가 되어 볼 결심을 하게 해주니까.
쉽다는 것이야말로 사진의 첫 번째 매력이다. 하지만 두 번째 매력도 있다.
사진의 두 번째 매력이야말로, 사진의 진정한 매력인데, 그것은 사진이 쉽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첫 번째 매력을 담뿍 누린 이들 가운데, 몇몇이 이 두 번째 매력 앞에 선다.
만약 사진이 쉬운 것이기만 했다면 사진을 향한 욕망은 쉽게 사그라졌을 것이다. 황금이 넘쳐나는 세상이 있다면, 거기선 황금을 욕망하는 짓이 가장 우스울 테니까.
병 주고 약 주고가 아니라, 약 주고 병 주고
근래 한국 사진판(?)에 나타난 특이현상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사진워크숍’이 아닐까? 물론 예전에도 사진워크숍은 있었지만, 근래 들어 손에 꼽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진워크숍이 생겼다. 이 같은 현상은 장비시장의 성장이라는 한 축과 늘어난 사진생산자들의 욕구증대라는 또 한 축이 만들어내는 게 아닐까 싶다. 이른바 진지한 아마추어가 새로운 시장을 이끌어 갈 것이라는 장비제조사들의 기대와, 단순진지함을 넘어 제대로 배우고픈, 심지어 ‘사진작가’가 되고픈 이들의 배고픔이 선후 없이 얽혀있는 듯 보인다.
‘사진작가등용문’을 타이틀로 내건 ‘한겨레사진워크숍’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이 워크숍은 특이하게도,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사진작가가 될 수 있을 것처럼 꿈꾸게 해놓고는, 막상 참가한 이들에겐 이런 워크숍에 참여한다고 해서 사진작가가 되는 건 아니라는 당연한 현실을 일깨운다. 병 주고 약 주고가 아니라, 약 주고 병 주는 식이어서 부작용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선 병을 얻어가는 것이야말로 남는 것이다. 병도 병 나름일 텐데, 장비병 셔터누름병 말고, 다른 병 말이다.
다 보여줄래, 덜 보여줄래
세상에 공표된 숱한 심사들의 대부분은 불필요한 것들이다. 사진심사는 특히나 불필요하다. 게다가 내 사진에도 확신이 없어 갈팡질팡하는데, 누구 사진을 솎아내고, 누구 사진을 건져낸단 말인가. 점수 써내는 용지를 쫙 찢어버릴 수 있는 용기가 다음번에는 솟기를.
아무튼, 이른바 ‘심사위원’ 네 명이 모여앉아, 참가자들이 보내온 사진들을 한 장 두 장 넘기는 가운데, 어떤 사진은 짧게 보고, 또 어떤 사진은 길게 보며, 얘기를 나눴다.
결론은 박호광 씨였다. 희한하게도 네 명 모두의 의견이 일치했다. 좋은 사진을 고르는 것은, 나쁜 사진을 고르는 것만큼이나 우스운 짓이라 여기고, 그것을 가르는 기준이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만장일치’의 한 배에 오를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이 ‘좋은 사진’을 골라내는 일이라기보다는 이른바 ‘잘 찍은 사진’을 고르는 일이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잘 찍은 사진의 기준은 무엇일까?
박호광 씨의 사진은, 다 좋은 것이 아니었으며, 모두에게 좋은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사진은 모두에게 좋은 것을 찾아 찍어대는 짓이 아니다. 그의 사진은 어떤 것은 정교했지만, 어떤 것은 어설펐다. 그 정교함이 의도된 정교함인지, 우연한 정교함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와는 별개로 사진에서 어설픔이란, 때론 강력한 호소력을 가진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다. 아울러 사진은 필연적으로 보여주지만, 사실은 가림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그래서 ‘다 보여주는’ 사진이란 세상에 없으며, ‘덜 보여주는’ 매력이 오히려 눈길을 잡아끈다는, 사진의 역설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다. 박호광 씨 사진의 매력은 이런 데서 드러났다.
우수상 정용기 씨의 작업에선, 사진이 만들어내는 ‘관계’가 눈에 띈다. 사진은 프레임 안 피사체들 사이에 관계를 만드는, 참으로 인위적인 행위인데, 그것이 이미지 안에 묘한 긴장을 불어넣는다. 그것이 사람이건 사물이건, 사진에 담기기 전에도 그것들은 나름의 질서와 관계를 가지고 있었겠지만, 사진이 보여주는, 사진에 담겨버린 관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진이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매체다.
머리품, 발품, 하품
이미 말했듯 사진은 쉽다는 매력과 쉽지 않다는 매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앎과 봄과 모음’의 삼각욕망 안에 ‘드러냄’의 욕망을 보태면서 작동한다.
사진은 ‘머리품’을 요구한다. 강력히 요구한다. 그래서 매력적이다.
정녕 그뿐일까. 사진은 ‘머리품’만으론 만들 수 없다. 사진이 구체적으로 요구하는 건 머리품 이전에 ‘발품’이다. 발품이 없다면, 사진은 없다. 남을 찍은 사진에 나는 보이지 않는 법이지만, 남 앞에서 서 있던 건 바로 나다. 어떤 존재에 ‘피사체’의 지위(?)를 부여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그 앞에서 셔터를 누를까 말까를 결정했던 것도 나다. 그런 점에서 사진은 정신노동 이전에 ‘육!체!노!동!’이다.
아, 떨려. 이것이야말로 사진의 너무도 강력한 매력이어서, 우리는 사진에 중독되곤 한다.
노순택/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