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향교가 자리한 동네란 의미의 교동은 200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풍남동으로 편입됩니다.
구한말 유림은 크게 4대학파로 구분되는데, 간재 전우 선생은 국망의 위기에 선비가 취해야할 3가지 처세 처변삼사(處變三事)중에서 살아남아 유교의 계승하는 것 즉 교육에 뜻을 담은 거이수지(去而守之)에 뜻을 두었습니다.
물론 처변삼사중에서 거의소청(擧義掃淸) 의병활동과 같이 적극적인 처세가 아니라 비난받기도 했지만, 미래를 내다본 처세라는 점에서 탁월한 선경지명의 처세라 할 수 있습니다.
그 간재 문하중 삼재가 활동한 지역이 지금의 교동지역이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선비가 금재 최병심인데, 거이수지하면서 군자금을 조달하였습니다.
한벽당은 금재선생의 17대 조상이 세웠는데, 일제가 전라선 철도을 놓을 당시 한벽당을 통과하지 못하고 터널을 뚫어 통과하도록 만들었기에 보존되었습니다.
지금의 "전주 자연 생태 박물관"에 금재 선생의 집이 있었는데, 일제에 의한 한전사건으로 일제가 집을 불태워져, 옥류동으로 옮겨 옥류동사(염수동)에서 후학을 양성하였습니다.
유교의 맥을 있는 거이수지의 뜻을 쫒아 전국의 유생들이 향교 주변에 모여들었던 곳이 교동일대입니다.
교동지역은 전북에서 사진하는 분들이 정말 자주 나가는 곳입니다.
그 곳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한번쯤 찾아 정리해 보는 것도 좋은 의미일 것 같은데, 저도 대략적으로만 알아서 이렇게 밖에 정리를 못하겠네요.
사진을 하면 역사공부도 하게됩니다. ㅎㅎㅎ
사진을 하면 꽃이름도 알게 됩니다. ㅎㅎㅎ
한벽당(작년 여름 사진)
교동의 어느 담벼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