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동네' 까치밥

사진마을 2018. 01. 06
조회수 3596 추천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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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있는 수필 #20


2017년 11월에 한국형 농촌 힐링스테이 시범운영팀을 따라 경상남도 하동군을 다녀왔다. 지리산 자락의 악양에서 하룻밤 잤다. 악양은 국내에서 다섯 번째로 슬로시티 인증을 받은 곳이다. 첫날 전세버스에 탄 우리 일행에게 악양을 안내하기 위해 마을 면장이 버스에 올랐다. 전문가이드 못지않은 정도가 아니라 이상이었다. 면장은 첫 마디를 우스개가 아닌듯한 우스개로 시작했다. “알아야 면장을 합니다.” 일행 사이에서 웃음꽃이 피어났다. 면장이 던진 말에 등장한 면장을 이장이나 동장 같은 직책으로 생각하면 사람이 우습게 된다. 논어 <양화>편을 보면 공자가 아들에게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아야 담장에서 얼굴을 면(免)한다”라고 충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얼굴 면자와 담장 장자를 써 면장(面牆)이며 면장의 상태에서 벗어나야(면해야) 면장하는 것이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공부를 부지런히 해야 담장 앞에서 얼굴을 대하고 있는 답답한 상황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소설 토지에 나오는 최참판댁의 실제 모델은 조씨 고가이며 만석꾼은 일만 섬이 아니라 이만 섬을 수확할 수 있는 부자다. 두 섬 농사지으면 한 섬은 소작꾼에게 돌아가야 하니 그렇다.” 이튿날엔 면장의 친절하고 재미있는 설명을 들으며 줄을 지어 악양의 들판을 걸었다. 따뜻한 늦가을 볕을 쬐며 바쁜 일 하나 없이 걷다 보니 마을 전체가 감밭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감이 지천이었다. 하동군 악양면 일대는 특히 대봉감으로 유명하다. 일손이 부족해서 높은 가지에 열린 감을 손도 대지 못할 형편이었고 우리 같은 관광객들에게도 따놓은 것 말고 나무에 달린 것은 따서 먹으라고 했다. 타박타박 걷다가 가로수 마냥 길가에 선 감나무에서 절로 홍시가 된 대봉감을 먹는 맛은 최고였다. 그러다가 이 나무를 만났다. 아이 손도 닿을만한 곳이었으나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시인 송수권은 시 <까치밥>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고향이 고향인 줄도 모르면서
  긴 장대 휘둘러 까치밥 따는
  서울 조카아이들이여
  그 까치밥 따지 말라
  남도의 빈 겨울 하늘만 남으면
  우리 마음 얼마나 허전할까”


 까치밥은 인정과 사랑과 공존이며 무엇보다도 여유다. 지식과 정보가 넘치는 이 세상에서 몰라서 면장을 못할 수도 있겠으나 파란 하늘에 빨간 점 하나 정도는 여유로 간직하며 한 해를 보내고 또 한 해를 맞으면 좋겠다. 지금 내 책상엔 악양에서 선물로 받아온 대봉감이 슬슬 홍시로 익어가고 있다.


글 사진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이 글과 사진은 경제월간지 <이코노미 인사이트> 2018년 1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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