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읽다가 지붕위로 올라간 우리

곽윤섭 2015. 01.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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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우리 곁에 있는 70년대

박신흥 사진집 '예스터데이'

 

yester01.jpg » 1977, 청평/박신흥

 

 ‘추억의 70년대’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눈빛포토에세이 ‘예스터데이’가 나왔다. 사진가 박신흥씨와 7일 전화인터뷰를 했다. 박씨는 대학교 시절 호영회에서 처음 사진을 배웠다. 대학에 입학하자 부친이 콘탁스 3a카메라를 물려주면서 “이제 네가 더 카메라를 많이 쓰게 될 것 같다”고 하셨다고 한다. 본체에 부착된 렌즈는 명품으로 불리는 소나 50밀리 1.5였다. 콘탁스는 독일제로 본체와 렌즈의 디자yester0001.jpg » 콘탁스+소나 1.5 인이 아름다웠고 귀한 카메라였다. 로버트 카파가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첫 상륙정을 타고 오마하해변으로 뛰어들 때 그의 손에 콘탁스가 들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귀한 카메라를 물려주셨다면 부친의 취미도 사진이었을까?
 “취미는 아니셨지만 운수업계통에서 일을 하시다가 사진관련 회사, 정확히 말하자면 인화지를 만드는 회사 <신성사진화학공업주식회사>로 옮기셨고 나중엔 사장까지 역임하셨는데 그쪽에 조예가 깊었다기보다는 관리능력이 뛰어난 분이셨다. 어쨌든 그 덕을 많이 봤다. 공장이 도봉구 창동에 있었는데 근처는 온통 배밭이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군대 갔다 제대하고 복학하기까지 6개월 공백이 있었는데 이때 날마다 출근하다시피 공장의 연구실에서 필름 현상과 사진 인화를 배웠다. 인화지 만드는 공장이니 최고의 암실이 있었겠지. 
 -자세히 들려달라
 2년 전에 사진전시를 열었는데 어떤 관객이 ”40년이 지났는데 마치 어제 찍은 것처럼 인화상태가 깨끗하다“고 놀라더라. 그도 그럴 것이 필름 현상의 프로세스를 정확하게 지켰다. 적정온도가 20도인데 칼같이 지켰고 코닥이나 후지필름의 매뉴얼을 보면 약품을 희석하는 물을 증류수로 쓰라고 되어있으니 그도 지켰다. 암실작업을 해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중간에 야광판으로 보면서 현상을 더 할지 말지를 결정하지 않는가? 나중엔 야광판도 필요 없었고 타이머만 놓고 시간을 맞췄다. 무슨 말이냐면 찍을 때 정확한 노출을 했다면 온도와 약품배율이 정확하니 중간에 점검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사진집을 보니 서울과 경기도가 많고 연천, 부천이 자주 등장한다. 촬영지와 어떤 연고가 있었는가?
 “살던 집이 당시 서울 변두리, 그러니까 남가좌동이었는데 시간이 나는 날이면 카메라를 매고 발 닿는 데로 갔다. 불광동에 시외버스터미널이 있었고 아무 버스나 타고 경기도 일원에서 내렸고 찍었다.  책의 표지는 서울의 주택가였고 책의 뒷면에 나오는 게 강원도 홍천 외삼촌 집인데 그때까지도 호롱불을 켜고 살았다.

 -책 72쪽에 나온 인물은 아시는 분인가? 아마도 화장실에서 볼 일 보고 나오는 장면 아닌가 싶은데?
 “판단은 보는 사람의 몫이다. 하하 지금은 목사님이 되셨다. 당시만 해도 사진은 귀한 것이었고 사람들이 카메라와 자주 접하지 못하던 시대라 신기해했다. 지난해인가 갤러리에서 초대전을 했는데 전시한 사진중에 지게로 돌을 지고 옮기는 소년이 바로 자신이라며 굉장히 반가워했고 전시장에 와서 두 점을 사갔다.


 -카메라가 귀한 것이라는데 얼마나 비싼 것인가?
 “71년 대학등록금이 6만 5천 원이었는데 콘탁스는 아마 대여섯 배가 넘었을 것이다. 거의 50만 원쯤 될 것 같다. 50밀리 단렌즈 하나만 갖고 쭉 쓰다가 이안식이라서 속사가 힘들었다. (이안식이란 것은 눈으로 보는 파인더 창문과 빛이 들어오는 창문이 다르다는 것이며 속사, 즉 빨리 찍는 것이 힘들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75년 니콘을 구입했다. 당시에는 나도 사진공모전에 내보곤 했는데 어떤 공모전에서 입상을 했더니 한 학기 등록금에 해당하는 상금을 주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때 출품하는 공모전마다 입선은 되곤 했는데 수상자 명단을 보면 아주 빈번하게 김녕만이란 이름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내가 입선이면 김녕만은 입상…. 이런 식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동아일보 사진기자가 되더라.
 -현상과 인화는 부친의 회사에서 배웠는데 사진은 어떻게 배웠나?
 “대학의 동아리였던 ‘호영회’에서 홍순태선생을 모셔와서 1주일에 한 번씩 지도를 받았고 한 달에 한 번꼴로 야외로 출사를 갔다.
 -당시만 해도 살롱 풍의 사진이 유행하지 않았는가? 동아리의 분위기는 어땠는가?
 “맞다. 그런데 나는 처음부터 다큐멘터리로 했다. 전시장에 온 내 연배의 관객들이 ‘나는 왜 저 시절에 저렇게 안 찍었을까!’라고 아쉬워하는 것을 많이 봤다. 다큐멘터리 쪽이냐 살롱 쪽이냐에 대해서 동아리 전체의 방향성 같은 것은 없었고 개인의 취향을 존중했다. 당시 홍순태선생은 조사진(낱장의 사진이 아닌 연작, 시리즈, 포토스트리 같은 여러장을 말하는데 조사진이란 일본식 표현이다)을 강조했다. 어떻게 한 장으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시면서. 나는 어쩐지 그게 맞지 않아서 점차 호영회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당시엔 사진잡지라는 게 지금 월간사진의 전신인 ‘월간포토그래피’가 있었고 이달희선생이 하던 ‘영상’이란게 있었는데 나는 영상의 멤버가 되었다. 그리고 ‘아름사진동호회’에서 열심히 활동했다.
 -그렇게 열심히 했다면 사진기자, 사진가가 되고 싶었을 것도 같은데….
 “맞다. 김녕만처럼 사진기자가 되고 싶어했으나 결국 공무원의 길을 걸었다. 안양 부시장을 지냈고 경기도의회 사무처장까지 하고 2011년에 명퇴했다. 공직에 있으면서 도무지 바빠서 사진을 할 틈이 없었다. 그래서 카메라를 내렸다. 그동안에도 사진에 대한 애정이 왜 없었겠는가. 2007년 안양예술공원에 세계적 건축가인 알바로 시자가 설계한 '알바로 시자홀'이 준공되었는데 준공기념전시로 ‘20세기 최고의 다큐멘터리 사진가-세바스티앙 살가도전’을 한국최초로 열었고 그때 내가 안양시 부시장이었다.


 -사진을 하면서 영향을 받은 사진책이나 전시나 사람이 있다면?
 “역시 인간가족전이 많은 영향을 주었다. ‘타임-라이프’에서 나온 책자들도 그렇고 사람, 희로애락 같은 데서 나오는 감동이 가장 와닿았다. 아름사진동호회의 멤버 중에 부산대사진동아리를 하던 강일웅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중학생시절인 1954년부터 사진을 했던 분이다. 최민식, 김기찬선생 모두 훌륭하신데 꼭 따지자면 김기찬의 사진에 더 끌린다. 외국작가야 누구나 이름을 대는 브레송이 좋고 살가두, 마크리부…
 -이번 책 ‘예스터데이’ 다음은 뭐가 될까?
 공직에서 물러난 뒤 2011년에 근 30년 만에 다시 장롱에서 카메라를 꺼내서 다시 찍기 시작했다. ‘행복’을 주제로 찍고 있는데 이게 정리가 되면 ‘투데이’가 될 것이다. 여기까진 스트레이트한 사진이지만 ‘투데이’ 다음 ‘투마로우’를 할 땐 현대기법인 설치, 후보정 등으로 옮겨볼까 하고 (아직까진) 마음만 먹고 있다.
 

 

yester02.jpg » 1974/박신흥

yester03.jpg » 1977/강원도 홍천

yester04.jpg » 1979/공주

yester05.jpg » 1972, 연천/박신흥

yester06.jpg » 1972, 서울/박신흥

yester07.jpg » 1972, 서울/박신흥      
 인터뷰를 마쳤다. 박신흥씨의 포토에세이집 ‘예스터데이’는 마치 사진기자가 찍은 스케치사진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기서 말하는 사진기자는 첫째 아주 빠르게 뭘 찍을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둘째 핵심(이른바 언론계에서 사용하는 일본식 용어인 ‘야마’)을 똑 부러지게 표현하는 능력이 있으며 셋째 대상에 아주 가까이 다가갈 줄 아는 과감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진심으로 사진기자를 하고 싶어했다는 것을 (사진기자 출신인 나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사진기자를 했으면 대단히 잘했을 것이다. 그런데 뭐 어떠랴 사진기자가 아닌 다른 길을 걸었지만 사진기자 이상의 실력이 있었고 지금 30년 만에 다시 장롱카메라를 꺼내들었으니 앞으로 오늘과 내일을 잘 보여주면 되는 일이다.

 

 박신흥의 ‘예스터데이’에는 그가 영향을 받았다는 사진가들의 사진이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정확하게 짚어보면 분명히 김기찬의 “이웃집 아저씨 같은 친근함”이 있다. 최민식의 “밑바닥 인생에 대한 돌직구접근, 예를 들자면 순식간에 찍어서 미처 카메라에 대한 반응이 표정에 나타나기 직전의 절묘한 얼굴 클로즈업”이 있다. 마크 리부의 “고단한 삶 중에서도 문득 우아한 일상, 혹은 일상에서 발견한 우아함”이 있다. 김녕만의 ‘해학’도 빼먹을 수 없다.

 

 자 그렇다면 박신흥의 사진은 잡탕밥일까? 그렇지 않다. 김기찬과 다르고 김녕만과 다르다. 사진을 보면서 예를 들면 더 좋겠지만 사서 보시라고 그 사진은 소개하지 않겠다. 118~119쪽에 걸쳐 실린 사진에서 이제 막 20대에 들어섰을 아가씨가 처마 끝에 고드름이 걸린 기와집 대문 앞 벽에 살짝 기대어서 있다. 표정이 절묘하다. 볼에 살짝 홍조가 들어있으니 수줍어한다. 다소곳하다. 박신흥은 “대문을 막 나서다 햇빛과 마주친 표정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그늘에 있다가 햇빛을 받았다는 것은 집 안에 있다가 외출을 하게 되는 심정과 연결된다. 오늘 이 아가씨는 데이트라도 할까, 동무들과 만나 수다라도 떨까…. 혹시 대문을 나서다 스물두 살 청년 박신흥의 카메라와 마주쳐서 당황했을지도 모르겠다.

 

자 이 절묘한 표정 하나 가지고 무슨 요란을 떠느냐고 할 수도 있으니 보충한다. 70년대 저 아가씨의 표정은 그 당시 우리의 누이들의 표정이다. 쉽게 말해 시대의 표정이다. 126~127쪽에 걸쳐있는 운동회날 운동장을 질주하는 할머니는 옆모습보다는 뒷모습에 가까운 옆모습이어서 표정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표정이 보인다. 우리는 이 할머니의 표정을 심판 보는 선생님과 뒤편 관중들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다. 이런 시대의 표정을 잘 잡아냈고 또 동시에(한 컷 안에) 어려웠던 시대상의 흔적을 모른척하지 않고 다 받아내면서 시대의 희로애락을 표현했다. 김녕만은 오랜 기간 사진기자를 했으니 산업화, 민주화의 스펙트럼을 쭉 치고 나갔고 박신흥은 72년~79년 사이에만 찍었고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사진을 그만두어야 했으니 사진이 압축될 수 있었다. 이것이 차이다. 그래서 사진집을 만드는 것은 찍는 것과 전혀 다르다. 정리와 맥락 짓기에 따라 결과물이 천차만별인데 압축할 수 있었으니 박신흥은 오히려 더 유리했다.

 

전화인터뷰를 하다가 몇 장에 대해 ‘살롱풍’의 냄새가 난다고 했더니 완전히 동의하진 않았다. 70년대 한국사진에선 살롱풍과 다큐멘터리가 섞여 있었으니 이 것은 나의 판단일 뿐이다. 3 장 정도는 빼는 게 더 좋았겠다. ‘국제시장’을 찍은 윤제균감독은 다음 영화에선 70년대, 80년대 민주화시대의 ‘꽃분이네’를 그려보겠다고 했으니 기대된다. 30년 만에 장롱에서 카메라를 꺼냈으니 박신흥의 '예스터데이'와 이어질 ‘투데이’도 기대된다. 홍순태선생이 ‘조사진’을 강조하는 바람에 조사진, 즉 테마로 찍기에서 멀어졌다고 박신흥은 말했는데 이 사진집 ‘예스터데이’ 한 권이 바로 테마로 찍어 “엮어낸 것”이니 아쉬워할 것도 없다. 조사진이 아니라 엮어내기를 잘하고 계신다. 추천사 혹은 서문을 쓴 둘 중에 배평모 소설가는 이렇게 썼다. “박신흥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누구라도 지나간 생의 어느 길목으로 자신도 모르게 돌아가 있을 것이다.” 좋다. 박신흥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축구공을 찾으러 지붕 위로 올라간 어린 시절(42~43쪽)의 우리로 돌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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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윤섭 선임기자kwak1027@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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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곽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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