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와 편견의 벽, ‘이웃’이 허물다

곽윤섭 2014. 0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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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태 ‘우리 안의 한센인-100년만의 외출’

단종-낙태-생이별 등 수십년 상처

소통과 교류로 ‘똑같은 우리’ 확인


 

park00004.JPG » 백합식당앞

 

1. 지난 4월 29일 광주지법 순천지원은 한센인의 강제 단종과 낙태에 대해 처음으로 국가배상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한센인의 명예 회복과 함께 국가가 한센인에게 자행한 반인륜적 인권침해 행위를 최초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보름 뒤인 5월13일 피고 대한민국 정부는 순천지원 판결에 대해 항소했다.

2. 지난 1992년 세계 나학회 서울총회에서 한센병 종료가 선언되었다. 이제 한센병은 조기발견하면 100% 치료가 되는 피부질환이다. 현재 정착촌 등에 있는 한센인 1세대는 오랫동안 치료를 받지 못해 장애가 심할 뿐, 사실상 건강을 회복한 상태이다. 그럼에도 한센인 2,3세대에 걸쳐 뿌리 깊은 사회적 편견은 여전하다.
 
3. 여수 애양재활병원(애양원)은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에 있고 요양원인 <평안의 집>에 50여명, 한센인 회복자 정착촌인 여수도성마을에 100여명이 있다. 윌슨 등 의료 선교사에 의해 1909년에 지어진 애양원은 부산 상애원, 대구 애락원 등과 더불어 경술국치 이후 1916년 일제에 의해 세워진 국립 소록도(당시 도립 자혜의원)보다 이전에 세워진 한센인 재활 병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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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의 사진가인 박성태(47)씨가 오는 18일부터 8월 3일까지 여수진남문예회관에서 여수 애양원 <평안의 집>과 여수도성마을에 거주하는 한센인들의 일상을 담은 사진전 ‘우리안의 한센인-100년만의 외출’을 연다. 여수 사람이라면 애양원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지역에서 언론에 몸담고 있었던 박씨도 “애양원은 알고 있었는데 기자생활을 하면서도 상세한 상황엔 무관심했었다. 1년 전에 우연히 ‘평안의 집’과 ‘여수도성마을’을 알게 되었는데 귀신에 홀린 듯 이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사진찍어 편견과 경계를 허물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날부터 사진을 찍기 위한 과정은 투쟁의 나날과 다름없었다. 한센인들은 일반인들을 경계하고 일반인들은 한센인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다. 때문에 카메라에 대한 거부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떻게 경계심을 허물 수 있었는가?
 “대학때 신학과에 다녔고 지금도 기독교인이다. 한센인들은 대부분 독실한 기독교신자들인데 성경과 찬송가는 달달 외울 정도다. 이들은 이승에선 차별을 받았지만 죽어 천국에선 인간다운 대접을 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예배시간에 자주 갔다. 어떻게든 허락을 받은 다음에도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자주 만났고 얘길 많이 들었고 사진 찍는 것보다 소통하는 것이 더 중요했고 어려웠다.”
 -끝내 거부한 사람들은 없었는가?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분들이 서넛 있었다. 사진을 왜 찍느냐는 것이다. 마을의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하고 사회적 관심을 받을 필요도 있다고 역설했다. 부부가 같이 사는 분들중에서 할머니 한 분이 카메라에 대해 아주 민감하게 거부반응을 보였다. 내가 결혼을 늦게 해서 7살짜리 아들이 있는데 한 번은 그 할머니를 만나러 갈 때 데리고 갔다. 아이를 낳더라도 격리시켜 생이별을 하게 되니 한센인들은 모든 아이들을 좋아한다. 그게 사연이 있다. 내가 4살 때 한번은 한센인이 나를 업어준 적이 있었다. 결국 아무 일도 없었지만 무서웠다. 그 당시만 해도 한센인들이 아이들을 잡아가서 가마솥에 어떻게 한다는 소문이 돌 때였다. 그 어렸을 때의 오해가 이 날 풀렸고 할머니도 나에 대한 경계심을 풀었다. 내 아들을 얼마나 귀여워하시는지...”
 -이번 전시의 의미는 무엇인가?
 “처음 이 사진을 시작할 때 주제를 <이웃>으로 잡았다. 도성마을에서 개를 10마리나 키우던 분이 있는데 소리를 못 듣는 분이다. 어느 날 나를 보더니 차를 좀 태워달라고 했다. 모시고 가자는데로 갔더니 식당이었다. 배가 고파서 밥을 먹고 싶었던 것. 율촌에 있는 백합식당이란 곳인데 식당 아주머니를 만나더니 서로 웃으시더라. 말하자면 둘은 이웃 사이다. 주변의 다른 식당에선 “한센인에게 밥을 주면 식당 망한다”는 소리가 나올 법도 한데 이 아주머니는 “우리 아들이 저분들에겐 더 잘해줘야한다”라고 했다면서 숫제 밥을 같이 먹는 것이 아닌가. 전율을 느끼면서 사진을 찍는데 눈물이 나오더라. 일반인과 한센인의 교류가 핵심이다. 사진전을 계기로 또 한 사연을 알게 되었다. 기아자동차 여천지점의 이형운 지점장인데 25년동안 한센인들에게 차를 팔면서 보증을 서줬다는 것이다. 주변에서 “할부금이라도 연체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고 만류했다고 한다. 이 지점장은 “수십명의 한센인들에게 차를 팔아왔지만 그동안 단 한 사람도 단 한 번도 날짜를 어긴 적도 없다. 만약 무슨 사정이 있어 못 오는 날이 있으면 그 전날 와서 동네 슈퍼에 맡겨서라도 날짜를 지키는 분들이다”라고 했다. 이런 사연들이 모여서 이웃이 늘어가는 것이다.
 
 -전시장에는 이웃들이 얼마나 올까?
 “시장 상인들을 포함한 외부인들이 한 열 분은 오지 않겠나 싶다. 무엇보다도 사진에 찍힌 분들이 이제 사진을 보고 싶어한다.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으니 전시장 가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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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촬영은 했는데 전시 허락을 받는 것도 아주 어려웠다고 들었다.
 “전시를 못 할 뻔했다. 20년 동안 전도사생활을 한 송찬석 전도사가 ‘작품을 보고 판단하자!’라고 중재해주셨다. 전시를 허락받기 위해 사진을 동영상으로 만들어 마을 도성교회에서 장로님들을 모셔놓고 틀었다. 그 자리에서 이야길 했다. ‘4살 때 여러분이 업어주었던 사람입니다. 40년 만에 다시 여러분 품으로 찾아들어왔습니다’ 장로님들의 반응이 좋았다. 사진의 내용에서 따뜻한 시선이 보였다는 것이다. 마을 안에서 적극 지지해주신 분 중에는 한나엄마란 사회복지사도 계신다. 그렇게 해서 어렵게 전시가 성사되었다. 이제 이 분들도 자신의 모습이 외부에 전시된다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1세대 한센인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후손들이다. 사진전을 계기로 2세대 3세대 한센인들에 대한 이미지 개선 작업이 있어야 하고 그게 나의 후속작업이 될 것이다.”
 -일본에서 한센인을 찍어서 전시를 하고 책을 냈던 권철작가와 공동작업을 한다고 들었다.
 “서로 연락이 닿아서 만났고 5월 15일 소록도축제에 같이 갔다. 앞으로 협력해서 한일 공동 작업을 하기로 했다. 전시 기간중인 8월 1일에는 권철작가가 와서 일본 내 한센인에 대해 강연을 하기로 되어있다. 그전에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닌데 만나 보니 우리는 공통점이 많다. 나이도 같고 사진의 관심사도 일치한다.
 -한국내의 다른 작가들도 한센인을 찍는가?
 “잘 모르겠다. 일부 작가들이 소록도를 찍었다고 하는데 그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인터넷에 가끔 (한센인) 사진들이 뜬다는데 이곳 주민들은 굉장히 불만스러워한다. 일시적 작업이 되어선 곤란하다. 이번 전시의 주인공은 사진에 찍힌 한센인들이다. 나는 한센인 문제 해결의 도구로 사진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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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이야길 하자면 컬러와 흑백이 별 이유없이 섞인 것 같은데?
 “거의 다 흑백이다. 컬러가 들어있는 이유가 있다. 이곳의 어르신들은 화려한 색을 좋아한다. 그러니 그 느낌을 살리기 위해 컬러가 포함되어있다. 전시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꼭 한 장 포함하고 싶은 장면이 있었는데 어르신이 거울앞에서 화장하는 모습이었다. 드디어 허락을 받아 찍을 수가 있었다. 주일에 예배 보러 가기에 앞서 아침 8시쯤 화장하는 장면이었는데 거울 없이 화장을 하시더라. 앞을 못 보시는 분이었다. 본인은 앞을 못 보지만 “여자니까” 화장을 하는 것이었다. 이분은 소록도에서 결혼했다가 사별하고 혼자 남은 신영례 할머니로 올해에 84살. 일제 강점기 때 소록도에서 일본군의 학살이 있었고 신 할머니는 요즘도 매일 밤 총소리의 트라우마 때문에 고통스럽게 주무신다고 들었다.“
   
 이 마을의 한센인들은 대부분 아픈 사연을 안고 산다. 최근에 박성태작가는 자신의 에스엔에스에 이야기를 올렸다. 올해 88세인 한센인 한 분이 지난해 아들을 수소문 끝에 찾아 사회복지사와 김해에 있는 아들이 사는 아파트로 갔다. 한 주민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가 못 찾고 내려왔는데 다시 올라가 아들을 만나보니 조금 전에 엘리베이터를 함께 탔던 주민이었다는 것. 모자가 서로를 못 알아본 것이다. 박 작가는 에스엔에스에 “내 어머니, 내 아들을 알아볼 수 없게 누가 만들었습니까. 단지 한센인의 자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생이별을 해야 했던 이들의 삶을 누가 어떻게 보상해줄 수 있을까요”라고 썼다. 할머니는 아들에게 수십년을 모은 100만원을 쥐여주었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OO아 니가 OO이냐. 애미가 죽더라도 니는 오지마라” 박성태 작가는 이 사연을 전하면서 “내가 찍은 사진에선 할머니의 가려진 삶을 볼 수 없었다”라고 민망해했다.
 
 -이들은 어떻게 생계를 해결하는가?
 “한국엔 한센인들의 정착촌이 84곳 있다. 대부분 축산업을 했는데 사료값이 폭등하는 바람에 경제 기반이 완전히 무너졌다. 마을이 폭격을 맞은 듯한 분위기…. 수십 년 동안 축산업의 원형이 보존된 곳이라서 이 시대 다른 곳에서는 찾기 힘든 곳이다. 양계, 양돈이 호황이었을 때는 감사헌금으로 1,000만원씩 내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지금은 국가로부터 장애인 수당이 나와 그걸로 생활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1년동안 몇 번이나 갔을까?park0000001.JPG » 박성태작가
 “(나도) 여수에 산다. 자동차로 20분 걸리는 곳이라서 가깝다. 거의 매일 갔다고 해도 될 정도로 자주 갔다. 주변에서 누군가 ’사진 찍은지 1년 만에 전시를 하는 이유?’라고 하더라. 마을 분들은 평균 연령이 80을 넘을 정도로 고령이 많다. 마음이 급했다. 살아계실 때 사진을 보여주고 싶은 바람이 있다. 다음달에는 <애양원 역사 박물관>이 개관된다. 이번 전시의 사진들을 그 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했다.”
 
 -이번 전시가 끝나면 다음 계획은?
 

“아까 말했듯이 2, 3세대의 미래를 지켜볼 것이다. 죽을 때까지 한센인을 찍을 것이다. 이들을 찍으려면 사진 이전에 파트너정신을 먼저 가져야 한다. 2, 3세대의 인권과 복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

 
  

곽윤섭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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