꽉 짜이고 이야기 풍성한 100여 명의 위인전

ylight20 2011. 0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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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만에 다시 여는 ‘인물사진의 거장, 카쉬전’
14살의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 1명 1명 ‘알맞춤’
빛 한 점 그늘 하나도 꼼꼼…에피소드도 곳곳에

 

 

대학에 입학하고 보니 대통령이 군인 출신이었다. 학교 안이나 바깥이 모두 살벌했다. 학교 인근에 있던 어떤 선배의 자취방을 간 적이 있다. 그 선배는 학회의 지도부 중 한 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기억이 틀릴 수도 있지만 어쨌든 당시 운동권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의 방은 정갈했다. 앉은뱅이책상이 있고 책꽂이엔 일본 원서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또한 기억이 틀릴 수도 있지만 어쨌든 운동권 학생들이 보던 책들이었다. 그러니 방의 공기는 그 시대만큼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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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izabeth Taylor @ 1946 Yousuf Karsh

 
 

 

 

운동권 선배의 정갈한 자취방에도 있던 그녀
 
아무런 장식물도 없는 황량한 방의 벽에 연필로 그린 어떤 여자의 얼굴이 있었다. 그 방과 그 시대와 그 선배에게 정말 어울리지 않는 초상화였다. 그녀가 엘리자베스 테일러였다. 아마도 사진을 보고 베낀 그림 같았는데 16살 무렵의 리즈 테일러라고 했다. 청순하면서도 매혹적이었다. 내가 그녀를 발견한 그해에 리즈 테일러는 벌써 50대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전성기를 지났고 간혹 결혼과 이혼에 관한 기사가 해외토픽으로 전해질 뿐이었다. “이게 몇 번째지?” 사람들은 그렇게 그녀를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흑백의 연필그림에서도 광채가 뿜어나오던 10대의 리즈는 그렇게 아름다웠다.

 

향년 79세. 지난 23일 세기의 연인, 모든 남성들의 연인이었던 그녀가 이 세상을 떠났다.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았던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다시 하늘의 별로 돌아갔다. 우연인지 그녀를 이번 주말부터 서울에서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막 피어오르는 꽃봉오리 같은 나이였던 14살 적의 사진이 20세기 인물사진의 거장, 유섭 카쉬의 솜씨로 다시 태어났다.

이 사진이 찍힌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65년 전쯤 되겠다. 그 후에 영화판을 주름잡고 세기적 아이콘이 되었으며 아카데미상을 두 차례나 받고 통산 9번의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는 인생역정의 주인공인 그녀가 아닌, 어린 시절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얼굴에서 어찌 파란만장한 인생을 예측할 수가 있을까? 전 세계 팬들은 그녀를 마음에 이제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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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 Dior @1954 Yousuf Kar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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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an Miro @ 1965 Yousuf Kar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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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nard Bernstein @ 1985 Yousuf Karsh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하나 하나
 
2009년 당시 10만 관객을 넘기면서 인물사진전의 이정표를 세웠던 유섭 카쉬가 다시 한국을 찾아왔다. 오는 3월 26일부터 5월 22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인물사진의 거장, 카쉬전’이 열린다. 지난번 전시 때는 볼 수 없었던 앤디 워홀, 넬슨 만델라, 샤갈,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이 새롭게 선보인다. 전시작들은 카쉬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카쉬의 오리지널 빈티지 필름으로 소개된다.

카쉬 사진의 장점은 풍부한 구성과 풍성한 이야깃거리에 있다. 카쉬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다. 얼굴과 손에 떨어지는 빛 한 점마다 세심하게 배려했으며 인물의 표정과 시선과 손의 자세 등 모든 세부사항에 대해 일일이 명령하여 움직이게 하였다. 지휘자의 지시를 받는 오케스트라단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지휘봉을 바라본다. 이윽고 신호가 오면 자신의 임무에 따라 자세를 취한다.

모든 사진은 치밀하게 구성되어있다. 주먹 쥔 손을 허리에 올린 무하마드 알리의 도도한 시선이 그렇고, 오른손 검지를 입술 끝에 대고 있는 크리스찬 디오르의 얼굴에 드리워진 절반의 그늘도 그렇다. 분신과 다름없는 미키마우스 그림 옆에서 웃고 있는 월트 디즈니의 편안한 미소와 작품구상 삼매경에 빠진 레너드 번스타인은 또 어떤가. 미키마우스는 모자를 벗어들고 디즈니를 내려다보며 특유의 개구진 웃음을 웃는다. 번스타인의 구성은 완벽하다. 악보, 피아노의 건반, 반지와 손목시계가 슬쩍 보이는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다시 터틀넥을 거쳐 입에 물고 있는 담배를 통해 제자리로 돌아온다. 완벽한 창작을 위한 대가의 고민은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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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hammad Ali @ 1970 Yousuf Kar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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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dolph Nureyev @ 1977 Yousuf Karsh

 
 

사진 읽고 뒷얘기 일고 다시 사진 보면…
 
카쉬전은 친절하다. 등장인물들이 모두 당대 각계의 유명인사이니 인물 그 자체로도 많은 이야깃거리를 품고 있다. 그와 더불어 그 인물과 조우한 카쉬의 아기자기한 에피소드가 곳곳에서 사진을 뒷받침하고 있다. 사진을 보고 뒷이야기를 읽고 다시 사진을 보면 인물에 대한 이해가 두 배 세 배로 늘어난다.

그 어떤 전시보다 작품관람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 그래서 2년 전 전시 때도 사진을 보고 나면 위인전기를 읽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는 관람객이 많았다. 이번 전시엔 100여 점이 걸린다. 100여 명의 위인전을 보는 셈이다. 기대가 큰 전시다.
 

 

곽윤섭기자kwak1027@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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