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그후 40년, 미싱은 여전히 밤을 돌린다

곽윤섭 2015. 02.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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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상빈 사진전 ‘창신동 이야기’
   도심 공장 3천여 개, ‘봉제 1번지’ 노동풍경
 가파른 언덕 좁은 골목, ‘시다의 꿈’ 불 밝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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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을 몰아쉬게 할 정도로 가파른 언덕과 계단들, 거리 곳곳에 나붙은 ‘시다 구함’, ‘객공 구함’과 같은 사람 구하는 쪽지들, 그리고 열린 문틈으로 내려다보이는 지하 공간의 공장들, 골목마다 어김없이 버티고 서 있는 오토바이들 …. 이런 모습들이 우리나라 봉제산업의 1번지, 창신동 현재의 얼굴이다.” (엄상빈 작가노트 중에서)

 

 “1976년 열 여섯 살에 상경해서 성동구 하왕십리에서 시다로 시작했어요. 월급은 첫 달에 5천9백 원 받아서 9백원은 용돈으로 쓰고 5천 원은 주말에 내려가면 집에 갖다 드렸어요. 부모님은 그 때 춘천 효자동에서 장사 같은 것을 하셨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는 돈의 가치가 컸던 것 같아요. 9백 원 가지고도 춘천 가는 기차 130원, 라면 20원, 그리고 기숙사에서 뭐 필요한 것을 다 샀으니까요. 3개월 지나니까 1만 1천 원으로 올려줬어요. 너무 너무 좋아서 제대로 걸어가질 못했어요” (창신동 이야기 51쪽, 김정자, 김정수 자매)

 사진가 엄상빈의 사진전 ‘창신동 이야기’가 스페이스22에서 열리고 있다. 2월 17일까지. 스페이스22는 내가 아는 한 전철역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진전시장이다. 강남역 1번 출구에서 5미터 정도. 같은 이름의 사진집이 눈빛에서 나왔다.
 
 엄상빈은 20년 동안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으며 퇴직 후에는 대학에서 사진을 가르쳤다. 민예총 속초지부장, 강원지회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동강사진마을 운영위원으로 있다. ‘청호동 가는 길’, ‘학교 이야기’, ‘들풀 같은 사람들’ 등 호흡이 긴 사진전과 사진책을 냈다. 지난 28일 전시장에서 작가를 만나 인터뷰했다.
 
 -창신동 작업은 언제, 어떻게 시작한 것인가?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창신동이 어떤 곳인지 대략만 알고 있었다. 2012년 7월 11일이었는데 저한테 사진을 배우신 두 분하고 창신동엔 어떤 게 있을까 하고 답사 겸 갔다. 봉제라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이건 어떤 곳인가 싶어 물어봤다. 여성분들은 재봉틀에 매달려서 일에만 열중하지만 남자들은 가끔 골목에 담배 피우러 나오기도 하지 않는가. 이분들 말씀은 한 10년이면 봉제공장이 없어질 것 같다고 하더라... 옛날처럼 젊은 사람들이 일을 배우러 찾아오곤 하는 게 없어졌다는 거다. 아 그렇다면 나라도 찍어두지 않으면 후회하겠다 싶어서 결심했다.”
 
 -처음 찍은 공장은 어디인가?
 “그 집이 특이했던 것은 문을 여니 바로 전체 공장이 보이는 곳이었다. 보통은 문 열고 계단 내려가면 다시 문을 하나 열거나 꺾어져야 보이는데 거긴 신기했다. 내려갔다가 이야기 좀 하고 올라오면서 찍었다. 첫 집에서 운이 좋았던 편이다. 쌀쌀맞았으면 ‘여기가 사나운 동네구나’하면서 주춤하거나 봉제공장 작업을 안 했을 수도 있는데 친절했다. 말을 붙였지 당연히…. 구경 좀 해도 되느냐? 뭘 만드는 곳이냐? 라면서 공장 구경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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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현황은 어떻게 되는가? 창신동엔 봉제공장이 몇 개나 있는가?
 “창신동의 범위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달라지겠는데 3천 개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고 6천 개란 말도 하고…. 인터뷰 대상자를 보면 영광, 화순, 신안, 보성, 무안 등 호남 출신이 월등히 높았다. 물로 소수지만 경북 상주, 충북 중원도 있었다. 뜻밖에 강원도는 정선, 동해, 양양, 철원 등 많았지만 막상 인터뷰는 춘천, 원주 밖에 못했다. 강원도 사람들은 숫기가 없어서 그런 것 같다. 전라도와 강원도가 많은 것은 과거 그 지역에 힘을 쓸 만한 공장지대가 없었으니 일자리도 적었다는 것을 뜻한다. 내가 찍은 2~3년 사이에 숫자가 많이 줄었는지는 모르겠고 계절이 바뀌는 것을 몇 번 보니 성수기, 비수기가 느껴졌다. 엊그제 전시 초대장을 들고 동네를 한 번 돌았는데 노는 공장이 많더라. (계속 놀다가) 어제 일을 받았다는 사람도 있고 3주째 일감이 없다는 사람도 있다. 내가 말을 붙이거나 사진을 찍기 어렵게 되더라도 일을 많이 하는 공장을 보는 것이 좋은데….
 
 그 사이에 숫자가 줄었다? 그런 것은 체감하지 못했고 계절을 두 번 세 번 겪어보니 어느 계절에 많이 나가고, 어느 계절에 덜 나가고 이런 것 알겠더라. 성수기, 비수기, 느껴진다. 엊그제 초대장 동네 돌고 했는데 가게에 공장들이 노는 게 많더라. 어제부터 일을 받았다. 3주째 놀고 있다. 이런 사람.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 소이 좋다. 말 붙이기 힘들어도 일감이 많은 게 좋다.
 
 -봉제공장은 어떤 곳이던가?
 “이분들은 상호가 없는 경우가 많다. 공장 이름을 대보라고 하면 △△네 하듯 딸 이름을 붙이거나 원청업체의 이름을 따서 통용하는 경우가 많다. 봉제를 40년~50년 하신 분들이 자기 브랜드가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거의 대부분이 하청업체다. 여성복 바지가 대세이고 남자양복이나 특수분야도 일부 있다. 주머니나 단춧구멍 같은 것이지. 특수분야는 저녁이 바쁘고 완성집은 새벽이 바쁘다. 완성집에선 옷이 넘어오면 일단 세탁부터 한다. 미디엄사이즈를 만들어서 특수한 약품을 넣고 세탁을 하면 스몰사이즈가 된다. 그 후 일반세탁을 하더라고 사이즈가 줄진 않는다. 그리곤 다림질을 하는데 하나에 2초 걸리는데 달인들 같더라. 완성집은 오후 4시부터 아침 6시까지 일한다. 동이 트면 동대문으로 납품한다. 이게 하루에 모두 이루어지는데 동대문시장의 위성단지 마냥 둘러싸고 있는데 독이기도 하고 약이기도 하다. 돈벌이가 되면 약인데 하루에 끝내야 하니 종일 일에 매달려야 해서 힘들 것이다.
 
 -이번 사진집에 보면 총 33곳의 공장에서 인터뷰를 했다. 어떻게 섭외했나? 쉽지 않은 것 같다. 성공확률은 얼마나 되었는가?
 “발품 팔아 이집저집을 다니며 전체 윤곽을 파악하고 근황을 청취하면서 서너 달 보냈다. 어느 날 봉제인들이 만든 조합이 있다는 이야길 듣고 가서 내 작업의 성격과 취지를 설명했고 40년 이상 일하신 원로 사장님들, 성공했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업체, 종업원으로 오랫동안 일한 사람이 있는 곳, 특수분야 작업을 하는 곳, 외국인 노동자를 많이 쓰는 공장 등을 고루 안배해달라고 명단을 요청했다. 그분들이 회의를 했을 것이다. 명단을 받아보니 주로 성공한 사장님들 위주로 받았다. 어쨌든 이 명단이 작업의 시작에 큰 도움이 되었고 슬슬 일이 풀려 갔다. 조합원 정기 모임에 나도 회비를 내고 참여해 밥도 먹고 술도 먹었다. 임원회의, 구인구직 설명회, 개업식, 돗자리 음악회, 송년의 밤 같은 행사에 참여하여 같이 어울리면서 인연을 쌓아나갔다. 행사 사진도 찍어주고 했다. 한 집을 찍으면 다른 집을 소개해주고 하더라. 다른 집에도 가면 이야깃거리가 있을 것이다….”
 
 -한 공장에 몇 번이나 같을까?
 “한 곳에 평균 4번은 갔다. 인터뷰를 한 번에 끝내기가 어려운 것 아니냐. 풀고 나이와 년도 확인하고 다시 보충하고…. 사진부터 찍는 편인데 이 또한 여러 번 갔다. 내가 다큐멘터리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래도 표정이 잘 나오길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2008년에 영월 아홉 개 읍면에서 마흔다섯 가족을 인터뷰한 구술작업을 엮은 책이 ‘들풀 같은 사람들’이다. 그 책을 보여주면서 작업한 게 도움이 되었고 이번에도 그 책처럼 예전의 기념사진과 자료를 넣었다. 차이가 있다면 창신동은 40년 넘게 장사를 한 분들이고 주소지가 서울 종로 아닌가? 농촌보다는 어려웠다.”
 
 -전시 개막행사 때 사진에 등장하는 분이 직접 오신 것을 봤다. 어떤 분인가?
 “그렇지. 책 31쪽에 나오는 이춘자(74)씨다. 사진을 보면 두 분이 나란히 앉아 백만 원 받고 실밥을 따는 일을 하는데 강성자(75)씨와 30년 전 가죽옷 만드는 공장에서 처음 만난 이후 지금까지 친분을 이어오고 있다. 이춘자씨의 조부는 동학농민운동도 하고 독립운동도 하셨던 분이고 이춘자씨는 그 시절 고등학교까지 졸업(1959년)했던 대단한 분이셨다. 자세한 이야기는 책에…. 요즘도 일하시냐고 물었는데 작년부터 안 한다고 하시더라. 젊은이들이 ‘여기가 양로원이냐?’라고 하는 바람에 맘이 상해서 관뒀다시더라. 전시장 개막행사에서 책을 드리고 한 말씀을 부탁했는데 ‘사진 찍힐 때는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지 몰랐는데 좋은 곳에서 거창한 전시를 하게 되어 너무 기쁘다’며 감동하여 우시더라.”
 
 여기까지 인터뷰를 하던 중에 창신동 봉제인 조합원들이 전시장에 들어왔다. 엄상빈 작가는 박귀성 조합장과 4명의 조합원을 모시고 사진전시장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사진 앞에서 조합장과 조합원들은 각자 사진에 대한 감상도 이야기하고 요즘 경기와 창신동의 미래 전망 등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았다.
 전시장에는 봉제공장 사람들의 사진도 있지만 가위, 다림질 판 같은 봉제공장의 소품들 사진도 있고IMG_0012.JPG » 봉제공장 조합원들이 전시장에서 사진을 둘러보고 있다. 거의 암호문 수준의 작업주문서 사진도 있다.
 조합원 한 명이 암호문을 풀어보였다. “이건 나염 체크에 원단 앞쪽 주머니에 쌍침(두 줄로 박음질하는 재봉. 와끼는 재봉실이 풀릴 수 있지만 쌍침은 재봉실이 풀리지 않는 장점이 있다) 벨트 안쪽 체크로 하고 고무줄 사이즈는 1. 5인치를 써야하고.... ”
 “이 분은 창신동 대표 가수인 사모님으로 사진에서 보니 새롭네요. 음이 떨리지가 않아요”
 “이게 대천해수욕장인데 보세요. 주머니에 도끼빗 꽂은 거. 그 때가 5공 때인데 장발 단속하고 도망다니고 (웃음) 그랬다. 이게 두 번째 데이트였는데 벌써 어깨에 손을 올리고... 대단한 실력자였다. (웃음)”
 “이건 마네킹이고 진다이(패션업계는 일본어를 많이 쓴다. 진다이는 인체를 그대로 형을 떠서 제작한 것. 보통은 토르소 부분만 제작하나 여기에 소매를 만들어 붙여서 사용하기도 한다 주로 입체 재단에 사용한다)가 아니군”
 책 167쪽에 나오는 한성화(49)씨는 전시장에서 자신이 운영하는 ‘에이스’ 공장 식구들의 단체사진 앞에 서더니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공장과 달리 직원들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성공한 케이스라고 주변에서 거들었다. “설레고 참 좋다. 우리 식구들이 이쁘다. 우리 공장은 창신동의 삼성이다. (웃음) 세월이 흘렀을 때 나중에 보면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 식구들을 전시장에 다 데리고 와야겠다”
 
 전시장을 한 바퀴 돌고 엄작가와 조합원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박귀성 조합장은 “창신동에서 30년 생활했는데…. 아 사진을 보니 정말 새롭네요. 엄작가가 고생하셨다. 허구한 날 창신동에 와서”라고 말하며 사진집 서른두 권의 값을 봉투에 담아 엄작가에게 건넸다. 엄작가가 다음날 사진집에 실린 공장을 방문해 책을 가져다줄 예정이었다고 한다. 이건 받을 수 없다고 엄작가가 말하자 잠IMG_0017.JPG » 조합장과 조합원들이 엄상빈 작가와 기념사진을 찍었다.시 대화가 오고 갔다. 사진집을 그냥 받는 것이 아니고 정당한 값을 치르겠다는 조합장이 이겼는데 대단한 마음가짐이라 속으로 놀랐다. 
 조합장과 조합원들에게 창신동의 전망에 대해 물었다.
 “현재 창신동이 뜨고 있긴 하다. 도시 중심이면서 개발이 안 된 특이점이 있다. 전순옥씨가 국회에 들어가서 봉제를 많이 알렸고…. 창신동이 서울에서 젤로 공장이 많고 현재 주목은 받는데 희망이…. 젊은이들이 없다. 10~20년 가면 봉제 없어진다. 지금 창신동에서 일하는 분들의 평균연령이 45세인데 그 다음은 알 수가 없다. 요즘은 일감이 형성되지 않는다. 중국으로 개성으로 가버리니…. 예전에 인터넷쇼핑몰 붐이 있을 땐 일감이 있었는데 대형 쇼핑몰이 생기자 외국에서 다 들여와 버려서 수요가 없다. 동대문 상권을 살리면 일감이 생길 것이다. 상가가 너무 많다. 수출을 해야 돼 수출. 동대문 거의 다 외국사람들인데 이들이 모두 빠꼼한 보따리 장사라 정보를 다 보고 다닌다……. ” 여러 의견이 쏟아졌다.
 
 조합원들을 배웅하고 인터뷰를 이어나갔다.
 
 -새롭게 봉제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 큰 문제라는 이야기가 가장 많은데….
 “동대문에, 예전 이대병원 자리에 디자인센터가 생겼다. 이곳에서 초보도 교육하고 경력단절자도 재교육시킨다. 초보는 120만 원, 숙련이 되면 150만 원, 200만 원, 300만 원까지도 받는다. 남자 재봉사라면 350만 원도 받을 걸…. 그런데도 젊은 사람들이 3D 업종이라면서 기피하니…….”
 
 -창신동 봉제공장군은 언제 형성되었나?
 “전태일열사의 분신사건이 났고 그걸 계기로 노동조합이 시끄러워지자 나라에서 ‘걔들 원하는 거 몇 가지는 들어줘라’라고 했다. 조합에서 야간작업에 관한 불만도 제기했겠지. 그래서  청계천에서는 예를 들자면 밤 8시가 되면 경비가 공장 전체의 두꺼비집을 내려버리니 야간작업을 못하게 되었고 차츰 가까운 창신동 주택가로 스며들어간 것이다. 역설적이다. 옛날의 청계천 노동자들에겐 시켰지만 지금은 자본의 논리에 따라 누구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야근을 하는 것이다.”
 
 -앞으로의 작업은?
 “우선은 미루어두었던 흑백 인화를 좀 해두려고 한다. 80년대부터 사진을 했는데 100피트짜리를 감아서 썼다. 필름을 펼치면 1년에 400미터 트랙 한바퀴는 될 정도로 많이 찍었다. 사진 작업은 글쎄 생각중이다. 누구는 김기찬 선생처럼 창신동을 계속 지켜보라고 하시고 누구는 이제 구로동을 하는 것이 어떠냐고 한다.
 
 -가장 기억이 나는 분은 누구인가?
 “책 156쪽에 나오는 조현자(68)씨다. 이분 사연이 절절했다. 강원도 원주에서 나서 열아홉에 서울 와서 가발공장에서 일했다. 당시 가발은 주력 수출산업 중의 하나로 월급도 꽤 바도 그랬는데 스물 세 살 때 ‘윤정희쇼’를 보러 갔다가 남편 될 사람을 만났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남편이 해병대 탈영상태여서 숨어다니고 있었다. 그러니 결혼식은 엄두도 못 냈겠지. 나중에 탈영에 해당하는 충분한 벌을 받고 사회인이 되었으나 멋쟁이 해병대 출신이란 게 탈이었다. 주색을 너무 좋아했고 따르는 여자들이 많았다. 딴살림을 차리진 않았지만 주사가 심했다. 술에 취하여 난리를 치면 어린 딸 둘을 데리고 피신하는데…. 동네 떡볶이 장수가 두고 간 리어카의 연탄잔불가에 세 모녀가 웅크리고 앉아 밤을 새다가 올라가곤 했다는 것이다. 듣다가 가슴이 아팠다. 남편은 나중에 풍이 들어 쓰러졌고 오 년 뒷바라지하고 중환자실에 있다가 요양원에 일 년 있었다. 그리곤 집에 조금 있다가 결국 먼저 갔다. 인터뷰할 때 3주기 무렵이었다. 언제 가장 행복했는지 물었더니 신혼 때도 아니고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는데 지금 현재가 가장 행복하다고 하더라. 딸 둘이 엄마의 바람처럼 훌륭하게 자라 주변의 칭송이 자자한 지금이 행복하다고 하더라. 지금 공장에선 시다로 일하고 있다.”


 -이야기가 거슬러 올라가는데 사진을 시작한 것은 언제 어떤 계기였나?
 “사범대를 나왔고 1980년 도계고에서 선생(수학)을 시작했다.  속초 속초상고, 고성고, 거진공고 등을 거쳐 동강농공고에서 퇴직 1999년 12월이다. 속초 살 때 나를 거쳐간 제자들이  5,000명이나 되었고 민예총 지회장도 그랬으니 주변에서 ‘시장에 언제 출마합니까?’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웃음) ROTC 출신인데 당시 장교들 월급에서 다달이 뗐다가 제대할 때 목돈으로 줬는데 24만 원으로 남대문시장에서 카메라를 샀다. 대학에 산악반이 있어 등산에 빠졌고 사진의 매력을 일찍 알고 있었다. 당시 산악사진의 대가 김근원선생이 찍은 사진이 잡지에 실리면 그걸 보는 감동이 대단했다. 서울서 사진전이 열리면 먼길 마다 않고 갔다. 처음부터 흑백사진을 시작한 덕에 컬러에 빠지지 않고 사회적 다큐멘터리로 연결될 수 있었다 컬러로 했으면 운해나 단풍이나 찍었을 수도 있지 않았겠나.” 
 
 -비교적 늦게 대학원에 다녔다. 그럴 이유가 있었나?
 “지금은 돌아가신 김영수선생과 알고 지냈는데 ‘대학원 다니고 그래라’라고 하셨다. 당시 종로5가에 있던 두산연강홀에서 초대전도 열고 이미 4번의 전시와 3권의 책을 냈었는데 대학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IMF를 맞아서 꼬였다. 그때 대학원이 아니라 학교 교사를 그만뒀다. 독학으로 열심히 사진을 하다 보니 내가 가는 길이 맞나 싶기도 했다. 강원도에서 교사 일을 하면서 동시에 서울의 대학원에 다ddd.jpg » 책표지니는 것이 힘들어졌다. 시간도 문제였지만 그전까지 학교에서 대학원을 권장하다가 IMF가 터지면서 연가를 이용해 대학원에 다니라니 두 일을 양립할 수가 없었다. 집사람과 상의했다. ‘내가 너무 행복하지 않다.’ 세 시간 상의 끝에 한 가지를 약속하고 허락을 받았다. 강의를 하든 뭐든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교사 연금은 손을 대지 않겠다고 했고 지금도 지키고 있다. 대학 3곳, 야간 평생교육원 등을 뛰다 보니 주당 23시간을 한 적도 있다. 교사시절 수업시간보다 많았는데 학교 선생 경험 덕에 훈련이 되어 있어서 어렵진 않았다.                 
 
 -요즘도 산에 가는가? 사진을 안 했다면 뭘 했을까?
 “산에서  많은 것을 배웠는데 ‘하면 끝까지 간다’는 정신이다. 학교 다닐 때는 1년에 100일을 산에서 보내려고 노력할 정도로 산에 빠졌다. 지금은 1년에 2, 3번 OB를 위한 초청캠프 정도만 한다. 체력 관리는 지금도 열심히 한다. 다른 잡기는 거의 안 한다. 책을 좋아하는데 특히 옛날부터 시를 좋아했으니 사진 안 했으면 시인했을 것이다. 민예총지회장 시절에 주변의 문인들이 ‘회장님 사진은 시 같아요’라고 하더라”
 
 마지막 답변을 하면서 엄작가의 얼굴에 시와 사진을 사랑하는 마음이 반영된 홍조가 빨갛게  올라왔다. 사진집과 사진전은 각각 가치가 다르다. 사진전 ‘창신동이야기’는 40년 봉제공장의 기록을 움직이는 공기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사진집 ‘창신동이야기’는 문화인류학적인 보고서다. 책의 서문을 쓴 박현수 영남대 명예교수(인류학)는 서문의 제목을 ‘전태일네 동네 후배들을 향한 민족지적 시선’이라고 했다. 일찍이 사회학자, 인류학자들은 오지 원주민들의 민족지(ethnography) 기록을 위해 펜이 아닌 사진을 주목했다. 상대적으로 사진이 늦게 도입된 한국에서 민족지 기록을 위해 사진이 활용되는 현상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주목할 대목이다. 글만 가지고 기록을 하는데 한계가 있다면 사진만 가지고 하는 기록도 제한적이다. 엄상빈의 ‘창신동이야기’의 가치가 높을 수밖에 없다. 
 

 곽윤섭 선임기자kwak1027@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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