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최고 사진선생이 이끄는 사진 항해

곽윤섭 2015.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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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립 퍼키스 사진집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

  책의 제목이 유력한, 그리고 거의 유일한 힌트

  이해보다 마음의 느낌으로 읽고 저마다의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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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립 퍼키스의 새 사진집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 (In a Box Upon the Sea)’가 나왔다. 도서출판 ‘안목’에서 나왔는데 출판사에서 “소량이고 제작비가 많이 들어서 할인율 높은 서점에 공급 안 하고 안목 사이트에서만 팔기로 했다”고 밝혔다. 따라서 책을 원하는 사람들은 www.anmoc.com 에서 구입할 수 있다. 문의 전화 031-718-2567

 

  필립 퍼키스는 사진가이며 사진교육자다. 그는 사진에 대해 조금이라도 공부를 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봐야 할 책 목록에서 첫 번째로 추천하는, 불후의 명저 <사진강의노트>(http://photovil.hani.co.kr/60146) 저자이며 최근 사진집으로는 <인간의 슬픔> http://photovil.hani.co.kr/55848 이 있다.

 

  사진강의를 하면서 사진을 많이 보여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인간가족’이나 ‘윤미네 집’, ‘골목안 풍경 30년’, ‘결정적 순간(HCB)‘, ’미국인들(로버트 프랭크)’ 등을 보여준다. 이런 유명 사진집 외에도 아마추어들이 찍은 사진들도 보여주고 내가 찍은 사진도 간혹 포함시킨다. 대체로 제목 정도는 이야기해주고 그 외 아무 말도 없이 사진만 1~2초 간격으로 넘긴다. 

 

  한 장 한 장에 설명을 달아서 보여주는 것은 나중의 일이다. 처음엔 그냥 사진만 보여준다. 화면에서 사진을 모두 내리고 불을 켠 다음 사진을 본 사람들에게 묻는다. 이 중에 가장 기억나는 사진은 무엇이었는가? 이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은 무엇이었는가? 이 두 가지 질문을 섞어서 혹은 둘 다 물어보기도 한다. 대답을 잘하지 못한다.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너무 짧게 넘어간 탓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답을 한다. 이 과정에서 나는 벌써 사람들의 사진 이해 수준을 다 알 수 있게 된다. 한 번 더 보자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번엔 좀 길게 3초 정도 간격으로 사진을 넘긴다. 뭘 물어볼 것이라는 것이 예정되어 있으므로 이번엔 다들 뭔가 잡아채기 위해 집중한다. 그리고 마찬가지 과정을 밟아보면 곧잘 답을 낸다. 그러나 두 번째 감상 뒤에는 ‘영혼이 없는 답변’이 나오기도 한다. 본인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본인의 지식 수준에서 긁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필립 퍼키스의 사진집을 본다는 것은 마음으로 읽어낼 줄 알아야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해하려고 들지 말고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 이름하여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여야 한다.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를 사서 포장을 뜯고 안에 들어있는 글은 천천히 보도록 마음먹고 사진을 한 장씩 넘겨본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면 조용히 덮어놓는다. 문을 열고 나가서 바람을 쐬고 온 다음, 스스로 물어보라.

  이 중에서 가장 기억이 잘 나는 사진은 무엇이었는가?

 

이 글을 쓰던 중에 나는 문을 열고 나갔다가 왔다. 아래와 위에 비어있는 한 줄은 1시간에 해당한다.

 

  그리고 물어봤다. 엉뚱하게도 <인간의 슬픔> 표지 사진이 떠올랐다. 이번 사진집을 본 기억을 되살리려고 애를 썼더니 불빛 4개(3개였나)가 멀리 보이는 사진, 작은 호숫가,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장면 등이 모호하게 섞여서 기억났다. 책꽂이에서 다시 펼쳐들면 이번엔 기억할 작정을 하고 보게 될 터. 의지가 개입하는 순간 나는 사진을 읽지 못하고 해석하려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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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립 퍼키스의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는 57장의 사진이 실려 있는데 연도와 장소 표시도 없다. 당연히 사진설명이나 사진 제목도 없다. 다만 사이 사이에 퍼키스가 직접 쓴 글이 10여 꼭지 들어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심지어 한국인에게 영어라도) 글에 의지하고 싶은 본능이 나타난다. 사진만 하나 둘 넘기다가 견딜 수 없는 조급함과 조갈증에 시달리게 된다. 이윽고 글이 몇 줄 나오는 쪽을 만나면 반갑기 짝이 없다. 글로 된 책을 길게 읽기 싫어하는 증상이 완전히 해소되기나 한 것처럼 집착하면서 글을 읽는다. 

 

  그런데 이런 배신감이라니……. 아무런 설명 없는 사진과 다를 바가 없다. 10여 꼭지 들어있는 글은 그래서 사진과 다를 바가 없다. 다시 말하자면 이 책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엔 제목 외에 아무런 설명이 없이 오로지 사진만 보고 판단해야 한다. 사진집다운 사진집을 백 만년 만에 처음 보는 것 같다.

 

  글과 사진의 결합이 대세로 자리 잡은 이 시점에 필립 퍼키스의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를 들고 있노라니 반가운 게 아니라 몹시도 힘이 든다.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해하려고 하니까 힘이 든 것이다. 그럼 어떻게 봐야 하는가? 느낌으로 간직하여야 하는데 읽고 분석하려고 했으니 곤란한 것이다. 명색이 사진집과 사진전시 소개를 주업무로 하는 기자인 나로서도 수시로 “글쟁이의 함정”에 빠지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글을 읽고 이해하듯 사진을 읽고 이해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책을 들었다. 이젠 독자가 아닌 기자의 자세로 필립 퍼키스의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를 소개하기 위함이다. 영화전문기자들이 영화를 소개할 때 영화의 내용을 미리 이야기해버리면 스포일러가 되지만 사진집 소개는 그런 우려가 없다. 특히 이런 종류의 사진은 여러 번 보더라도 그때마다 달라질 수 있으므로 나의 의견은 전형적인 세컨드 오피니언(Second Opinion)일 뿐이다.

 

  책의 제목이 유력한, 그리고 거의 유일한 힌트다. 필립 퍼키스가 직접 인용해와 책의 앞장에 써놓은 두 개의 인용구 중에 첫 인용구가 다음의 문장이다. 찰스 올슨의 맥시무스 시편에서 따왔다고 밝히고 있다.
 I set out now
 in a box upon the sea 

  그리고 책을 만든 사람이 이 문장에서 아랫줄 ‘in a box upon the sea‘를 제목으로 삼았다. 한글로는 ‘바다로 떠나는 상자 안에서’라고 했는데 이렇게 번역하려면 윗줄 I set out now도 포함해야 뜻이 통한다. “나는 이제 상자를 타고 바다로 출발하려 하네”쯤 되겠다. 

 

  좀 찾아봤다. a box 란 고대 신화에 나오는 영웅의 상자일 수도 있다. 오디세우스나 헤라클레스가 탔던 뗏목일 수도 있고 오시리스, 페르세우스를 태운 채 버려졌던 궤짝일 수도 있다. 허만 멜빌의 모비딕에 나오는 이스마엘이 생존을 위해 매달렸던 관일 수도 있다. 항해는 모험을 뜻하는 것이고 바다는 험한 환경, 헤쳐나가야 할 역경 같은 것의 비유다. 항해는 사람의 인생을 전반적으로 비유하는 것일 수도 있고 최후의 도전이나 불굴의 도전을 뜻할 수도 있다. 

 

  이 정도 해두고 사진들을 넘기기 시작했다. 눈밭의 나무, 식당, 시장, 연회장, 유람선, 낙타, 리모델링을 위해 비계가 세워진 건물, 미술관, 비 오는 바깥 풍경, 비 오는 날의 시골 도로, 파도와 전깃줄, 기찻길이 차례로 한 장씩 등장한다. 그리고 첫 번째 글이 등장한다. 비유하자면 이 책 자체가 하나의 항해로 생각된다. 어려운 길을 시작했다. 사진으로 풀어나가는 것 자체가 모험이고 이 사진들을 따라가는 것도 모험이다. 자칫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힐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거대한 향유고래가 저 앞에 있을 수도 있다. 

  이 항해를 끝까지 마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퍼키스는 사진집을 만들었으므로 그의 항해는 단락이 되었으나 사진집을 완성하는 것은 독자인데 우리 독자들의 항해는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나는 독자들을 위한 든든한 안내자까지는 못되겠지만 등대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눈밭에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의 그림자가 불길하게 드리워졌다.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는데 무료급식소처럼 보이는데 종교시설일 수도 있다. 시장의 풍경이다. 테이블과 의자에 시트를 씌워둔 연회장. 갈매기가 몇 마리 보이는 유람선, 한 남자. 낙타가 웃고 있다.

  나는 이제 상자를 타고 바다로 출발하려는 것 같지만 이걸 다른 차원에서 표현하면 상자에 태워진 채 바다로 떠밀려 나가는 것 같기도 하다. 낙타가 웃고 있는 것은 어떤 사람이 콧잔등을 만져주기 때문이다. 건물에 비계가 어지러이 설치되어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건물 안팎을 걸어다닌다. 미술관의 조각상을 천으로 덮어뒀다. 전시 기간이 아니거나 보수중이거나 휴관중이거나…. 그런데 연인이 뒤편에서 작품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논다. 비 오는 날 바깥을 본다. 비 오는 날 한적하고 높은 시골 길에 자동차가 달리고 있다. 파도가 넘실거린다. 황량한 기찻길이 이어졌다.

 

  여행이 시작되었다. 의지를 가지고 출발했든지, 타의에 의해 떠밀려 나갔든지 이제 길을 떠났다. 그리스 로마 시대 때 여행은 주로 항해로 묘사되니 제목도 그렇고 여기도 그렇다. 모험이 시작될 것이다. 불길하다. 극적이다. 고립되어있다. 공허하다. 분리되어있다. 유리되어있다. 자 바다다……. 라고 말하면서 1부가 끝이 났다. 2부의 시작은 글로 된 사진으로 문을 열었다. 시장 상인의 성찬이다. 글을 읽고 사진이 떠오르는 것과 사진을 보고 장면이 떠오르는 이 묘한 느낌이 퍼키스의 내공이다.

 

  필립 퍼키스의 신작 사진집 ‘바다로 떠나는 상자 안에서’는 역작이다. 내가 아는 당대 최고의 사진선생이 자신의 사진강의에 걸맞은 작품을 내놓았는데 한 장 한 장 보면서 손이 떨리고 가슴이 뛰고 사진의 길이 훤하게 열리는 듯하다.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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