쫄깃하고 날것 그대로의 젊은 초상

사진마을 2018. 11. 06
조회수 1782 추천수 1

내 인생의 사진책/이한구의 <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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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배우면서 베허 부부의 사진은 나에게 매우 특이하게 다가왔다. 감동을 주었다기보다는 그 반대로 아무런 감동도 주지 않는, 같은 스타일의 목조주택, 사이로, 물탱크, 산업현장 등의 나열은 어쩌면 남은 인생을 사진에 매진해보겠다는 나의 의지를 꺾는 것이었다. 그 당시 나는 예술에는 감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 고흐, 자코메티, 뭉크 같은 작가를 좋아하던 시절에 베허 부부의 사진은 어려운 장벽이었다. 이것을 넘어야 하는가, 비켜가야 하는가? 꼭 그럴 필요도 없었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럴 즈음 1990년대 초에 혼자 떠난 미국 여행에서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미술관에 들렀다. 유명작가들 중 원하는 작가의 작품을 접수하고 몇 시간 기다리면 볼 수 있다는 안내문을 보고 나도 한번 신청해보고 싶었다. 사진 입문생이었던 내가 아는 작가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얼른 떠오르는 것이 로버트 프랭크였다. 떨리는 손으로 신청서를 내고 2시간을 기다렸더니 미술관 관계자가 나를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로버트 프랭크의 작품 10여 점이 하얀 벽에 걸려 있고 책상 위에는 다수의 포트폴리오가 올려져 있었다. 그 옆에는 단정한 흰 장갑이 놓여 있었다. 순전히 나만을 위한 전시 공간을 꾸며준 것이었다.
 그러나 사진에 대해서 눈을 뜨기도 전의 나로서는 그 벅찬 감동을 느낄 눈도 여유도 없었다. 별 감동을 받지 못하고 그 아까운 기회를 단지 유명한 사진가 작품을 보았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아무튼 그 후로 감동도 없는 사진이라 멀리하고 싶었던 베허 부부의 사진, 인간의 모든 직업(특성)을 분류하고자 했던 특이한 독일의 작가 아우구스트 잔더의 사진들은 내 사진을 이끌어 가는 바탕이 되었고, 보는 눈이 없어서 건성으로 보았던 로버트 프랭크의 깊은 절망과 무위, 빛나게 아름다운 허무가 보이면서 사진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되었다.
 ‘군용’을 통해서 이한구라는 작가를 안 것은 2012년이었다. 아니 나는 그 이전에 이한구를 알고 있었고 그의 사진을 좋아했다. ‘소소(小小)’는 사람이 사진을 통해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풍류며 음유시다. 어떻게 사진을 통해서 저렇게 섬세한 기운을 잡아냈을까? 잎사귀와 잎사귀의 부딪침, 꽃잎과 꽃잎의 애무가 절절했고 그들을 쓰다듬고 가는 바람은 내 가슴을 흔들어 놓았다. 나는 그런 그의 풍류와 음유시를 좋아했다. 그런데 그가 ‘군용’이라는 작업을 조심스럽게 내놓았을 때 이한구에 대해서 혼돈을 일으키게 되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는 스무 살 무렵부터 청계천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어오고 있었다. 1980년대 청계천의 짐꾼을 찍으려고 따라다녔는데 삼사 일이 지나서야 그에게서 경계의 빛이 사라지며 “이제 사진을 찍어보라”고 해서 비로소 셔터를 누를 수 있었다는 그다.
 다큐멘터리 작가로서 어떤 자세가 바른지는 정답은 없다. 그러나 사진가는 때로 이 사진이 내 작업에 유리하겠다는 이기심과 사진의 본질을 추구한다는 명목 사이에서 고민을 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튼 ‘군용’을 보기 전의 이한구는 참으로 주관적인 감정을 잘 활용하는 작가라고 생각했다. 나는 여자라서 군대(군대생활)를 잘 모른다. 그저 대한민국의 피끓는 청춘이 어떤 제도의 ‘장막’ 속으로 사라졌다가 일정 기간이 되면 청춘의 핏기가 가신 초췌한 애어른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 뿐이다. 군대는 그들만의 리그로 감춰지는 것이 합법화 되었고 용인 되었다. 그렇다고 군대생활이 모두 비밀에 감춰졌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지는 국가 재량의 공간이었다. 그런데 이한구의 ‘군용’을 통해서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의 군대가 생경하고 쫄깃쫄깃하고 날것의 모습으로 눈앞에 전개되었다. kjy001.jpg
 포플러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연병장에서 훈련을 받는 군인들의 하얀 장갑 낀 손(p14-15), 뒤집힌 거북이처럼 배를 뒤집고 네 발로 몸을 치켜드는 애처로운 군집(p27), 어둠을 배경으로 갈대밭 사이에 지친 늑대들처럼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젊은 초상(p45), 누구든 함께 빠지고 말 한 병사의 깊은 잠(p70), 이한구의 ‘군용’ 사진은 주관적이지도 예술적이지도 계산적인 프레임도 아니다. 그의 젊음이, 그의 욕망이, 그의 재능이 그의 감수성만큼이나 솔직하다. 각자의 필체로 주인이 붙여준 이름을 달고 한몸이 되어 힘든 훈련을 마친 군화들의 휴식(p109 ), 공중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는 젊은 몸뚱이에 한 줌 햇살이 스치면서 복숭아 잔털처럼 원시적 생명이 표피 위로 옹송그리며 솟아오른다(p100). 융통성과 인정은 이적행위다(p111) - ‘엿이나 먹으라지’. 그가 그리 젊지 않았다면, 그가 그 내무반의 사병이 아니었다면, 그가 그리도 사진을 찍고 싶어 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볼 수 없었을 장면 장면이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눈앞에 다가선다. 이한구는 타고난 사진가인가 싶다. 스무 살 이한구의 작업이 그리 단단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의 다른 작업은 먼 바다를 향한 힘찬 항해 중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지연(사진가·계남정미소 서학동사진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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