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실종 뒤 TV가 들어오다

사진마을 2019. 0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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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있는 수필 #31

 

막내 실종 뒤 TV가 들어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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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이 1988년에 1003개의 텔레비전으로 꾸며서 설치한 <다다익선>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상징과도 같았으나 이제 더는 비디오아트로 작동하지 않는다. 

 “달은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이다.(원제: Moon is the Oldest Tv)”는 백남준이 1965년에 제작한 설치작업이자 비디오아트 작품이다. 텔레비전은커녕 전기도 없었던 고대 인류들에게도 볼거리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림이나 조각, 건축물 같은 것은 특정한 곳에 가야만 볼 수 있었으나 달은 그렇지 않아 지구촌 어디서나 다 시청이 가능했고 날마다 조금씩 변한다는 점에서 텔레비전이라 부를만하다.
  어릴 때 집에 텔레비전이 없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인지 입학 후인지 지금으로선 기억이 나질 않는다. 동네에 텔레비전이 있던 집이 정말 손꼽을 정도라서 딱히 우리 집만 ‘노텔’이었던 것은 아니다. 숨바꼭질, 구슬치기, 딱지치기, 십자가생 등 흙먼지 나는 공터에서 하는 놀이가 대단히 많았던 시절이었으므로 별다른 아쉬움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또래 친구들이 생소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입에 올리기 시작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게 마린보이, 철인 28호, 요괴인간 벰 베라 베로, 사파이어왕자 중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또래들 대화에) 빠질 수 없었고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  ‘노텔’인 아이가 텔레비전을 볼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만화방이었다. 당시 만화방은 50환을 내면 만화책 다섯 권을 볼 수 있고 만화방에 있는 텔레비전을 볼 수 있는 쿠폰(비닐장판을 오려서 만든 거였다.)을 받을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친구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것. 돈이 들지 않기 때문에 후자를 더 선호했다. 인기프로그램은 모두 황금시간대(저녁 5시에서 6시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에 방송했기 때문에 아슬아슬한 적이 많았다. 어느날 한편만 보고 집으로 갔어야 했으나 그냥 친구 집에 죽치고 앉아서 두 편까지 다 보고 말았다. 60년대 후반이었으니 다들 여유가 없었고 저녁밥 먹는 시간에 다른 집에 앉아있는 것이 금기시되었었다. 우리 집에서 난리가 났다. 막내가 밥 때가 되었는데 집에 안 온 것이다. 형들과 누나들이 총출동되어 나를 찾아나섰고 누군가가 나를 찾아내서 집으로 압송(?)해갔다. 아버님께서 (가볍게) 사랑의 매를 드셨다.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어린 나이니 나에겐 가볍지 않았지만 워낙 큰 잘못을 한 이후라 크게 울지도 못했다. 아버님도 마음이 가볍진 않았던 모양이다. 그로부터 채 1주일이 지나지 않아 집에 텔레비전이 들어왔다. 형님과 누님들이 대놓고 내색은 않았지만 막내에게 고마워하던 기색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50년이 흘렀다. 식구들이 TV 앞에 앉아 함께 저녁을 먹던 시절은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글 사진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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