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일 부산 고은사진미술관 관장 이상일
정보사 소속으로 채증 위해 찍어…‘작전’에 쓰여
제대 뒤 몰래 망월동행…죄책과 의무감에 ‘발길’
30년째 광주 망월동을 기록하고 있는 사진가가 있다. 그는 현재 부산 고은사진미술관 관장인 이상일이다. 14살 어린 나이에 조직에 들어갔다가 대구동성로파의 행동대장으로 컸다.
1975년부터 군복무를 하던중 1980년 5월 광주에 파견되었다. 정보사령부 소속이었던 그는 총이 아닌 카메라를 들고 ‘불순분자 색출’을 위해 사진채증을 했다. 지난 5일 만난 이상일 관장은 “내가 찍은 채증 사진들이 작전에 활용되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군사작전에서 상대의 취약점이나 움직임같은 것을 파악하는데 사진이 활용되는 것이니…. 그러나 구체적으로 내가 찍은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건 알지 못한다”라고 당시를 기억했다.
쓰러지고 맞고 죽어가는 것 목격했지만 그땐 광주 몰라
그는 1985년에 제대하고 밤중에 처음 광주를 찾았다. 당시만 해도 망월동은 금기의 땅이었다. 교통수단도 없었고 망월동을 입에 올리는 것도 부담스러운 시절이었다. 이 관장은 “죄책감이 있었고 또 80년 광주가 그후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명령에 따라 정보수집을 했지만 광주에서 일어난 일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 사람들이 쓰러지고 맞고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으나 광주를 몰랐다. 망월동의 밤에도 내 손엔 카메라가 있었으나 아무것도 찍을 수 없었다”라며 “그 다음 광주 방문때부터 망월동의 영정을 찍기 시작했다. 어떤 책임의식 같은 것을 느껴서 다만 찍을 뿐이었지 그 사진으로 뭘 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라고 술회했다.
제대하고 2년만에 중고등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치고 대학교에 진학할 목표를 세웠다. 10년이나 어린 학생들과 대학에서 경쟁력이 있는 것을 꼽아보니 딱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체육이고 하나는 사진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제대로 사회에 나와 사람을 만난 적이 없는 조직생활만 했으니 대학을 마치고 “사진관이나” 차려 어머니를 부양하고 싶었다. 2년제 사진과에 입학했고 그것이 이상일 사진인생의 시작이었지만 그가 사진가로 정체성을 갖게 된 것은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광주다.
» 이상일의 망월동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대학에 갔는데 그게 사진과였을 뿐
-언제부터 본인이 사진가라고 인식하게 되었나?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학교를 갔는데 그게 사진과였을뿐이고 밥을 먹기 위해 작업실을 열었고 죄책감과 의무감 때문에 광주에서 사진을 찍었고 산청에 어머니가 살고 계셨는데 대구에서 광주로 가는 길에 들러 어머니를 찍었고 1990년대에 학교 과제로 온산공단을 찍었을 뿐이지 내가 사진가라고 생각한 것은 한참 후다. 2000년에 광주비엔날레에서 <이상일의 망월동>을 전시했다. 광주라는 사회적 이슈, 계엄군이었던 사람이 바라본 광주라는 개인적인 이슈, 그리고 비엔날레 최우수기획전상을 받은 미학적 근거가 겹쳐서 이름이 알려졌다. 그때 내가 사진가구나 싶었다”
이상일은 2004년 부산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해 하이데거와 관련한 논문을 준비하다가 2007년에 수료했다. 대구예술대, 백제예술대, 경일대 등 강단에서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여러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어떤 선생이었나?
“강사생활을 오래하다가 전임교수도 몇 년 했다. 사진크리틱을 제외하고 나면 삶의 태도와 철학을 가르쳤다. 중간고사는 축구시합으로 대체했다. 학생들과 처음 만나면 무조건 1:1 면담을 해서 혹시 그들에게 상처가 있는지를 살폈다. 상처는 드러내야하는 것이다. 상처가 있다면 그걸 덮으려고 하지말고 드러내도록 자극하여야 치유, 치료가 된다. 사회적으로 보자면 어떤 징후가 이어질 때 그걸 덮어버리면 쌓여서 큰 변고로 연결된다. 80년 광주도 그랬지만 이번 세월호사건도 마찬가지다. 학생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나면 바른 삶에 대해 강조했다. 삶의 태도가 어긋나면 아무리 사진작업이 좋아도 한순간에 무너진다. 사진가의 작품은 그의 삶이고 그의 얼굴이다.”
광주도 세월호 마찬가지, 덮지 말고 드러내 자극해야 치유
이상일은 <으므니>, <메멘토 모리>, <오온>등의 작업을 해왔다. 2009년엔 동강사진상을 받았고 2011년엔 제36회 이나 노부오상을 받았으며 2010년에 고은사진미술관 관장으로 취임해 현재 전시하고 있는 <시선(Sehen Zen 視禪)>을 포함해 25회의 전시를 직접 기획했다.
-그동안 고은사진미술관에서 전시했던 것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013년에 했던 <5월의 훌라송>이다. 사진의 기능은 현실사회와 역사적, 문화인류학적 가치까지 포함하고 있다. 어떻게 들여다보는가의 문제다. 한국현대사에서 수많은 징후가 있었고 그것을 압박하고 덮어버린 탓에 ‘80년 5월 광주’가 터졌다. 2013년은 광주민주화운동에서 33년이 되는 해다. 33년은 종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주기. 모든 것이 다 틀어지고 새로 태어난다. 광주의 문제를 광주가 아닌 다른 지역, 특히 지역감정에 이용당한 영남에 있는 미술관에서 풀고 싶었다. 미술관은 미학적인 역할도 중요하지만 사회적인 기능도 해야한다. 2015년 5월에 새로운 '광주'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나 자신으로서도 광주는 수시로 찾고 있다. 이제 광주는 나에게 안식처와 같다.
-그외 앞으로는 어떤 전시를 기획하고 있나?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엔 사진분과가 없다. 미국이나 독일이나 프랑스처럼 국립미술관에서 사진의 예술적, 사회적 기능을 맡아야하는데 고은이라는 사립미술관에서 해야 하니 어려움이 많다. 사진교육, 사진작가의 미래 등 한국 사진계의 여러 문제들이 여기서 출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 쥬드 폼에서 전시를 한다는 것은 작가를 국가가 인정해주는 셈이다. 국립미술관에서 예술의 영역을 맡아주면 지역의 문화예술회관은 대중의 영역을 맡는 식이다. 그런데 그게 없으니 ‘고은’ 같은 사립에서 예술과 대중을 모두 안고 가야한다. 이번에 하고 있는 것이 독일 주관주의 사진이니 다음엔 대중을 고려한 랄프 깁슨전을 기획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더 이상 작가의 유명세에 기대는 전시는 하지 않겠다. 젊은 작가들에게 기회를 많이 주는 것이 목표다.
사진/이상일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