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랏님 좋아하시네~

곽윤섭 2015. 03. 30
조회수 26063 추천수 0

루마니아 사진가 다나 포파 사진전

민주 혁명후 젊은이들 어떻게 사나

 

 

 ofc009.jpg

루마니아 사진가 다나 포파의 사진전 <아워 파더 차우세스쿠(Our Father Ceausescu)>가 케이에프 갤러리에서 4월 3일부터 4월 18일까지 열리는 <포켓 레벌루션 Pocket Revolutions: 루마니아 현대미술전>에 포함되어 열린다. 루마니아 현대미술전은 다나 포파를 포함해 설치미술, 회화, 책, 조각, 영상 등 다양한 장르의 작가 9명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1989년 루마니아 혁명이후 루마니아인들의 삶과 변화, 집단적이거나 개인적인 트라우마 등을 보여주는 시도다. 이번 전시는 한국국제교류재단과 수체아바아트페스트문화협회가 공동 주최하고 전시후원은 주한루마니아대사관과 루마니아문화원이 함께 했다.

 

미술전의 제목은 냉전의 종식으로 이어진 1989년 동유럽혁명과 루마니아인들이 혁명이후에 겪게 되는 새로운 체제의 혁명적 변화를 포함하는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다. 미술전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작가 중의 한 명인 다나 포파는 루마니아에서 태어났고 현재 영국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는 사진가다. 대학에서 다큐멘터리 사진과 포토저널리즘 석사과정을 졸업했고 주요 관심분야는 특히 인권과 관련된 사회적 이슈를 다루고 있다. 전시되는 사진은 루마니아의 젊은이들의 일상생활이 가장 많고 1989년 혁명 당시를 연상시키는 황폐한 공간이 포함되어 있다. 초상사진은 얼핏 프랑스사진가 리즈 사르파티가 찍은 10대 여성들의 공허한 표정과 비슷해 보이지만 내용은 판이하게 다르다. 가만히 서서 카메라를 바라보는 지루한 유형학 사진이 아니라 담배를 피거나 자고 있거나 화장을 하거나 수영을 끝내고 옷을 갈아입는 등 뭔가를 하고 있다. 케이에프 갤러리의 도움을 받아 다나 포파와 이메일로 인터뷰를 했다.

 

-사진에 등장하는 젊은이들은 어떻게 섭외했는가?

“몇 명은 프로젝트 전에 알고 있던 이들이었고, 그 외의 분들은 부카레스트에 있는 내가 졸업한 대학교의 웹사이트에 광고를 올려 모으기도 했다. 또한 그 후엔 내가 촬영했던 사람들이 지인을 소개해줘서 작업을 하기도 했는데 이 경우 사람들은 이미 내용을 알고 찾아왔으므로 훨씬 성공적인 결과물을 낼 수 있었다.”

 

-젊은이들에게 사진 작업의 취지를 알렸는가? 그리고 포즈를 요구했는가?

“작업 전에 목적과 취지를 설명했다. 하루에 찍은 초상사진도 있지만 2년 넘게 찍은 사람도 있다. 어떤 경우에도 포즈를 취해달라고 요청하지 않았다. (사진 중에는) 카메라를 쳐다보는 직설적인 초상사진도 있지만 그 경우도 포즈를 요청한 것이 아니다. 나는 가능한 오래동안 관찰하면서 내 앞에서 상황들이 벌어지도록 내버려두면서 어떤 장면을 포착한다. 그렇지만 나는 연출 사진에 대해 (부정적인) 문제의식을 갖고 있진 않다. 연출이란 단어의 개념은 긴 대화를 전제로 한다. (카메라가 자신을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으면 사진가가 시키지 않아도 모델 스스로가 카메라를 의식한 동작이 나올 수 있다는 점에) 사실상 (원하는 포즈가 나올 때까지의) 긴 기다림 자체가 연출이 되기도 한다. 어쨌은 내 사진엔 단 한 장도 포즈를 요구한 것이 없고 오히려 기대하지 않았던 우연한 장면이 찍힌 사진도 있을 정도다.

 

-차우세스쿠 처형 당시 당신은 12살 정도였다. 혁명 당시를 기억하는가?

“물론 그 때를 기억한다. 유명 스키 리조트에서 겨울휴가를 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나는 (혁명 소식을 들은) 사람들의 속삭임소리, 두려움, 흥분을 기억한다. 또한 혁명 발발 후 며칠간 사람들이 공황상태에 빠진 것도 기억한다. 인근 호텔에 있던 작은 흑백 TV 앞에선 사람들은 아무도 이야길 주고 받지 않았다. 차우세스쿠에 관한 것으로 보이는 뉴스를 지켜봤지만 아무도 뉴스의 내용을 입길에 올리지 않았다. 나는 탱크의 행렬이 우리 리조트 동네의 도로를 지나가던 것을 기억한다. 사람들은 혁명의 향방이 어디로 향할지 한치 앞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공포에 휩싸여 저마다 집이나 숙소에 틀어박혀 꼼짝도 않았다. 최초로 혁명뉴스를 TV에서 본지 몇 일이 지나서인가 승리했다는 흥분이 사람들 사이에 오고가기 시작했다. 자유가 온 것이었다. 사람들은 자유에 대해 말하고 노래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전까지 한 번도 보질 못했던 온 국민들의 희열을 목격했다. 차우세스쿠의 처형방식에 대해선 사람들은 종종 ‘그렇게 개처럼 죽일 필요는 없었다’라고 말하곤 했다.

 

ofc001.jpg

ofc002.jpg

ofc003.jpg

ofc004.jpg

ofc005.jpg

ofc006.jpg  

ofc007.jpg  

 

  

-혁명 전의 루마니아는 어땠는가?

“내가 어렸을 적, 우유 한 병을 받기 위해 새벽 4시부터 줄을 섰었다. 부모들이 야근을 하는 가정의 어린 아이들이 통상 그 줄에 서있곤 했다. ‘국부(father of the nation)’ 같이 차우세스쿠가 사용했거나 불리기 원했던 타이틀을 기억하지만 누구도 그렇게 믿지 않았고 그저 또 하나의 농담의 소재가 될 뿐이었다. 물론 차우세스쿠를 언급하거나 내가 들었던 농담을 입 밖으로 꺼내면 내 부모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을 것이란 사실도, 학교에서 배웠던 모든 정부와 그의 선전물은 빈말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히터가 너무 약해 우리 집이 너무 추웠고, 겨울 저녁에 전기가 끊겨 초를 켜고 숙제를 해야 했고 공급받는 음식의 양이 항상 부족했다. 하지만, 식탁 위에서 임신 중절 수술을 받았다가 죽은 여자들이나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사람들, 75개의 정치/강제 노동 수용소, 외국의 매체나 여행 금지 등에 대한 엄격한 사전 검열제도 등을 생각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사람들은 집과 일자리를 국가한테서 받았는데, 앞 뒤 빼고 정말 단순히 이것만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다고 볼 수도 있겠다.

 

-루마니아는 그 후 민주화가 되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차우세스쿠 시절이 더 나았다는 국민들도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다시 그 체제를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다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사람들이 전체주의의 시절을 그리워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저 그 때에는 모두가 불안했었을 것이다. 혁명 이후의 루마니아는 자본주의의 단점도 받아들여야했고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민주주의가 왔지만 독재정권 시절에 권좌에 앉았던 사람들이 민주주의 시대에도 그 권좌를 유지했기 때문에 실제로 사람들은 이전의 전체주의 체제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지 못했다. 사람들은 극심히 가난했고, 물가는 매년 급격히 상승했다. 미래에 대한 안전판과 희망이 없었기에 젊은이들은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길 원했다. 이렇게만 생각한다면 표면적으로는 과거를 그리워한다는 말이 나올 수 있다.

 

-사진을 배울 때, 그리고 지금까지 본인에게 영향을 준 사진가가 있다면 누구인가?

“처음에 그들을 알게 된 바로 그 순간부터 내 마음을 사로잡은 작품을 만든 예술가들이 굉장히 많다. 요셉 쿠델카, 낸 골딘, 윌리엄 이글스톤, 샐리 맨, 매린 헬렌 마크, 룩 델라하예, 로버트 프랭크, 부루스 데이빗슨, 폴 로위, 카를로스 레이예스 만조 등이 그들이다. 나는 내 안목과 감각이 그들의 영향을 받길 기대한다. 최고는 요셉 쿠델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의 하나가 사람들과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는 것이다. 사람과 그들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다. 나는 사람들이야말로 끊임없고 놀랍고 흥미로운 영감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는데, 내 유년시절의 기억들은 작업 도중 창의력을 발휘하는 데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된다. 그 시절의 기억들이 영상 또는 이미지로 흘러들어와 지금의 현실과 만나 사진을 통해 만들어내는 내 작품들에 영향을 미치곤 한다. 낸 골딘의 작품에 대해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그녀가 사진 속 피사체들에게 항상 친밀감을 느끼기 때문인데, 나도 그녀처럼 작업을 하면서 내 피사체들에게 똑같이 친밀하게 다가가고 싶다.

 

-다음 작업은 뭐가 될 것인가?

가정 폭력을 테마로 현재 진행 중인 작업이 있긴 하지만 아직 완성될 때 까지는 한참 멀었다. 계속 연구하면 할수록 더 복잡해지고 그 형태가 바뀌고 있다.

 

 ofc008.jpg

 ofc010.jpg

ofc011.jpg

ofc012.jpg

ofc013.jpg

ofc014.jpg

ofc015.jpg  

 

  

혁명 전후 루마니아의 상황에 대해 이번 미술전의 전체 큐레이터 시모나 나스탁은 조금 더 자세히 설명했다.

 

“1977년부터 1981년까지, 루마니아 정부의 외화부채가 급격히 늘어 차우체스쿠는 긴축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로 인해 국민은 더욱 빈곤해졌고 경제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갔다. 매년 정부는 각 경제 주체에 대한 연간 경제 계획을 각각 수립하였고, 모든 공장, 집단 농장 등은 그 결과 보고를 매년 정부에 제출해야만 했다. 그러나 정부의 계획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정부에 보고한다는 것은 결국 ‘루마니아의 경제는 번영하고 있다‘ 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정부에 반하는 행동이었기에 그리 보고할 수는 없었다. 결국 모든 결과보고는 허위였기에 정부는 합당한 정책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데이터조차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이로 인해 루마니아의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1990년대에는 경제상황이 더욱 순탄하지 못하여 많은 루마니아인들이 북아메리카나 서유럽 국가로 이민을 가기 시작했다. 현재 약 200만 여명의 루마니아인들이 국외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2000년 이후 생활 수준은 많이 나아지는 듯 했으나 2008년 경제위기로 다시 경제상황이 악화되어 아직까지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차우체스쿠 정권의 시기가 더 살기 좋았다 라고 생각하는 세대는 아마 1980년 전후로 모든 것이 그저 좋아 보이는 유년기를 보낸 세대일 것이다. 그들은 공산당이 제공한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가난해도 집이 있었으며, 이미 미래가 정해져 있었다. 1989년, 단 하룻밤 사이에 ‘경쟁’의 법칙을 잘 모르는 그들은 갑자기 시장 경제 체제 아래에 놓이게 되었고, 공정하지 않은 경쟁은 그들의 삶을 더욱 힘들게 했다. 또한, 공산당원으로 속해 일반인들이 얻지 못했던 것들을 쉽게 득할 수 있었던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들 모두 그 때의 기억이 그리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은 비단 우리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유럽은 현재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고 있으며, 우리는 그 중 일부일 뿐이다. 만일 루마니아 정부가 장하준의 책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읽었다면 경제는 지금보다 훨씬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우리가 1989년에 얻은 것이야 말로 우리가 잃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List of Articles
전시회

나랏님 좋아하시네~

  • 곽윤섭
  • | 2015.03.30

루마니아 사진가 다나 포파 사진전 민주 혁명후 젊은이들 어떻게 사나 루마니아 사진가 다나 포파의 사진전 <아워 파더 차우세스쿠(Our Fath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