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를 돌보는 '늙은 젊은이'

사진마을 2016. 0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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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가 어때서 <6> 노인종합복지관 선배시민대학
 
kys02.jpg » 유범상 한국방송통신대 교수(맨 왼쪽)가 14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중원노인종합복지관에서 경기도권 복지관장과 부장들을 상대로 선배시민론을 강의하고 있다.
 

 

   노인 하면 떠오르는 말
 병들고, 고집이 세고, 무력하고…
 
 노인이란 명칭에 대한 대안으로
 미국서 ‘시니어 시티즌의 날’ 선언
 
 2012년 처음 선보인 뒤
 지난해 전국 64곳으로 확산
 
 지역문제 해결 위한 동아리 만들어
 토론 거듭하고 작은 일부터 실천
 
 부적응 청소년 후견인 역할도 하고
 시의회 회의장 모니터해 시의원 감시
 
 ‘아테네의 등에’ 자처한 소크라테스처럼
 주체적인 삶 살며 인생 성찰


 

“퇴직 후에 하는 것은 먹는 게 전부였는데, 내가 이 나이에 다시 무언가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2015년 명락노인종합복지관 유승열 선배 시민)
  “내가 선배 시민이니까, 선배답게 사회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러기 위해서 나는 내가 가진 재능을 후배 시민들에게 나눠주는 거야. 이런 내가 세상을 크게 바꿀 순 없겠지만 나를 따라 생기는 새로운 선배 시민들이 늘면 세상이 좀 더 좋게 바뀌겠지.”(2015년 이천시노인종합복지관 이경란 선배 시민)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하고, ‘나이가 많아서 안 된다’는 말을 많이 듣던 나도 ‘나이를 먹어도 할 일이 많구나!’를 느낄 수 있었다.”(2015년 부산광역시노인종합복지관 김길자 선배 시민)
 선배시민대학 과정을 마친 선배 시민들의 반응이다.
 ‘선배 시민’이란 이름은 기존의 노인이란 명칭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했다. 1988년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1935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사회보장법안에 서명한 것을 기념해 8월21일을 ‘시니어 시티즌의 날’로 선언했다. 노인이란 호칭은 단순히 나이가 든 사람을 뜻하지만 사회적인 인식으로는 부정적인 면이 더 강한 것이 사실이다. 반면 선배 시민(시니어 시티즌)이란 말에는 공동체의 일원인 시민으로 후배 시민들과 함께한다는 점에서 연령, 의무, 권리가 모두 포함돼 있다. 사회공동체의 형성에 기여해온 선배 시민들의 권리와 삶의 지혜를 후배들에게 전하는 의무를 아우르는 표현이다.
 
 
 선배시민대학은 한국노인종합복지관협회가 주관하고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지원하여 전국의 노인종합복지관에 만들어진 선배 시민 양성 프로그램이다. 전국적인 단위로 확대된 것은 지난해부터다. 2015년 한 해 동안 전국 8개 권역의 64개 선배시민대학에서 2천여명의 선배 시민이 교육에 참여했다.
 한국의 선배시민대학 사업에 초기부터 간여해온 고상진 경기도 성남시 중원노인종합복지관 관장을 14일 만났다. 고 관장은 2012년 중원노인종합복지관 관장으로 부임하면서 기존의 노인복지 문화에 회의를 느끼고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는 차원에서 그해 9월에 선배시민대학을 처음 열었다. 노인에 대한 젊은이들의 인식 조사 결과를 보니 대부분 부정적이었다. ‘늙고, 병들고, 고집이 세고, 소통이 안되고, 무력하고…’
 고 관장은 노인의 정체성부터 확립하자고 생각했다. 노인이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돌봄의 주체가 돼, 인생의 후배인 후배 시민도kys001.jpg » 고상진 관장 돌보고, 지역의 공동체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새로운 앎에 대해서도 눈을 뜨게 하고 싶었다. 고 관장은 ‘아테네의 등에’를 자처한 소크라테스의 말을 인용했다. “등에를 죽이면 아테네의 미래는 없다”며 사약 앞에서도 기개를 과시한 소크라테스처럼 나이가 든 선배 시민들이 주체적인 삶을 살며 인생을 성찰하고 동시에 공동체를 끊임없이 감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 관장은 “노인과 젊은이를 구분하는 기준은 나이가 아니라 삶에 대한 태도다. 노인은 늘 현실에 안주하는 반면 젊은이는 호기심을 가지고 변화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선배 시민은 늙은 젊은이가 되는 것이다. 노인이 복지관 프로그램을 이용하며 수동적으로 받는 서비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선배 시민들이 우리 공동체의 길을 내는 고민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선배시민대학의 취지”라고 말했다.

 
 선배시민대학은 어르신들이 할 수 있는 활동들의 사례만 보여주고 교육을 제공할 뿐 활동을 조직해 끌고 가진 않는다. 2015년에 중원노인종합복지관에서 선배시민대학 과정을 마친 김광수씨의 수기를 보면 이들이 어떻게 활동하는지 알 수 있다.
 김광수씨를 비롯한 선배 시민들은 지역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동아리 ‘디딤돌’을 독자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지역을 위해 노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토론을 거듭했다. 당시 성남시에선 쓰레기 문제가 불거진 상태였다. 토론해보고 조사해보니 단순한 분리수거의 문제가 아니었다.  디딤돌 회원들은 실천할 수 있는 일부터 하기로 하고 성남시 소각장 견학을 했다.

 

kys01.jpg » 유범상 교수


 자신들이 버리는 쓰레기의 양이 엄청나다는 걸 깨달은 회원들은 돈을 모으고 복지관의 도움을 받아 복지관에 분리수거함부터 설치했다. 다음으론 손팻말을 만들어 들고 거리에 나가 분리수거 캠페인을 벌었다. 김광수씨와 회원들은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우리 노인의 생각이 바뀌면 복지관이 바뀌고 복지관이 바뀌면 중원구가, 중원구가 바뀌면 성남시가, 성남시가 바뀌면 전국이 다 바뀌지 않겠는가?”
 선배 시민들의 활동은 그 외에도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루터기 봉사단은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청소년 후배 시민들과 만나 고민도 듣고 밥도 먹고 후견인 노릇도 한다. 의회모니터링단은 시의회 회의장에 방청객으로 참여하여 시의원들이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감시한다.
 한국노인종합복지관협회는 2016년 선배시민대학 사업계획을 마련했다. 경기, 대구, 부산, 전북, 충남 등 전국 8개 권역에 선배시민대학 55곳을 새로 열 예정이다. 65살 이상만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 출생 세대)들이 노인층으로 진입하기 시작한 것을 고려해 50살 이상의 남녀 모두에게로 입학 문을 넓혔다.


 

 디딤돌은 복지관 소속의 동아리가 아니다. 선배시민대학에서 만난 어르신들이 자생적으로 만든 모임이다. 복지관에선 이들 모임이 교육을 요청하면 사단법인 마중물의 교육 프로그램 도움을 받아 강사를 파견하는 역할만 한다. 이는 스웨덴에서 탄생한 학습동아리(Study Circle)의 형태와 닮았다. 스웨덴의 학습동아리는 19세기 후반 빈곤과 불평등, 신대륙 이주에 따른 인구 대폭 감소 등 사회불안에 시달렸던 당시 스웨덴의 사회경제 상황에서 등장했다. 학습동아리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스카르 올손이 1902년 민중 성인교육의 수단으로 발전시키면서 지금은 스웨덴에서 가장 중요한 성인 시민교육 형태로 자리잡았다. 2000년대 초 기준으로 협회 11곳이 매년 연인원 300만명이 참여하는 학습동아리 35만개를 조직 관리하고 있다.
 정부는 협회를 통해 정부 기금으로 학습동아리 리더의 봉급과 학습자료 비용을 지원하며 통제는 하지 않는다. 동아리의 구성원은 평균 5명에서 10명으로, 대부분 작은 규모다. 지역 사회의 주요 이슈에 대해 학습동아리가 자발적으로 토론을 열기도 하는 등 적극 참여해 학습동아리 출신 활동가나 정치인이 나오는 일도 잦다. 2008년 기준으로 1년 동안 한 개 이상의 학습동아리에 참여한 사람이 190만명이다. 스웨덴 전체 인구가 900만명인 것에 견줘보면 엄청난 수다. 연평균 독서율 세계 1위를 자랑하는 복지국가 스웨덴의 사민주의의 토대를 학습동아리에서 찾는 학자들이 많다.


 

글 사진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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