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케빈 카터를 위한 변명

사진클리닉 2008. 0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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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보다 셔터’ 비난에 자살? ‘발췌의 함정’

 

퓰리처상 받은 ‘소녀 노리는 독수리’
뉴스사진 윤리 따질 때 최우선 인용 사례
일방적 매도와 오류 법원판결문까지 등장



 2005년 초에 이 글을 처음 썼습니다. 불우하게 삶을 마친 한 사진기자의 생과 사가 일방적으로 매도당하는 것이 못마땅해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는데 1차적으로는 나 자신이 사진기자였기 때문이었지만 세상 돌아가는 형세를 보니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에 대한 구분이 갈수록 흐려지고 있기에 울컥하는 마음이 생겼던 것이 더 큰 동기가 되었습니다.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에 대한 구분이 갈수록 흐려져 울컥

 그 무렵에 포털사이트를 검색했더니 열에 여덟 내지 아홉은 출처가 어딘지 모르는 일방적인 주장이 확대재생산되고 있었습니다. 무려 10년이 더 지난 사안인데도, 글보다 쉽사리 기억되고 주목되는 사진이란 속성 때문에 이야기의 전달력이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흔하게 퍼져나가던 이야기의 기본 골격은 다음과 같습니다.

 "수단 남부에 들어간 카터가 아요드의 식량센터로 가는 도중에 우연히 마주친 것은, 굶주림으로 힘이 다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 뒤로 소녀가 쓰러지면 쓰러진 소녀를 먹이감으로 삼으려는 살찐 독수리가 소녀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셔터를 누른 후 그는 바로 독수리를 내 쫓고 소녀를 구해주었다. 이 사진은 발표와 동시에 전세계의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퓰리처상을 수상한 뒤 일부에서 촬영보다 먼저 소녀를 도왔어야 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결국 케빈 카터(Kevin Carter)는 수상 3개월 뒤인 1994년 7월 28일에 친구와 가족 앞으로 쓴 편지를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3살의 젊은 나이에…"


“비판이 일었다. 결국…목숨을 끊었다”가 결정적인 논리적 비약

 후에 제가 이런저런 자료를 모아 본 끝에 내린 결론에 따르면 위의 이야기 자체엔 오류가 없었습니다. 다만 많은 생략에 의한 엄청난 논리적 비약이 들어있고 그에 따라 글을 읽고 재해석한 분들에게 큰 오류의 여지를 제공했습니다. 인터넷뿐만 아니라 모든 글쓰기에서 늘 도사리고 있는 독사의 아가리같은 함정이 여기 숨어있습니다. 필요한 인과관계와 그 설명을 뺀 채 적당히 발췌해서 사실을 늘어놓으면 결국 사실을 호도하는 지름길이 됩니다.

 본문에 앞서 문제점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사진을 찍은 것은 1993년 2월이었고 최초로 지면에 게재된 것은 3월 23일치 뉴욕타임즈였으며 퓰리처상을 받은 것은 1년이 더 지난 1994년 4월이었다. 본문을 보면 알겠지만 그는 아프리카의 기아에 대해 그 전부터 취재해왔고 더 심한 사례도 목격했었던 기자였습니다. 사진을 찍기 전에도 고민해온 문제이며 사진을 찍고 난 직후에도 인간적 슬픔을 토로한 바 있습니다. 수상한 뒤 비난에 직면하자 더욱 힘들어했을 수 있지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란 것이며 자살의 더 큰 계기로 짐작할 수 있는 사건이 수상결정이 된 이후 발생합니다. 그럼에도 "비판이 일었다" 라는 문장 직후에 "결국 케빈 카터는 ….목숨을 끊었다" 라고 연결시킨 것이 결정적 오류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저 글을 읽으면 비판 때문에 자살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김없이 카터가 불려나와 매 맞아

어쨌든 2005년에 제가 글을 쓸 무렵엔 위의 내용이 여러가지 논란과 사례에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뉴스사진의 윤리를 따질 때 가장 많이 이용되었습니다.
 ‘사람의 생명과 사진보도중 어느것이 더 우선인가?’ 라는 주제가 등장하면 어김없이 케빈 카터가 불려나와 매를 맞고 있었습니다. 논란을 지켜보면 꼭 등장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사람의 목숨보다 중요한 예술은 없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게는(특히나 다큐멘터리 사진이나 필름을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딜레마겠죠. 아무개 선생님이 제게 그런 질문을 하셨을 때, 한참을 고민하다가, “찍고 구하러 가면 안되요?” 그랬다가 혼난 적이 있습니다.
‘다큐멘터리는 그 목적이 작품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식의 말씀을 하셨는데요, “지금도 저는 그 문제에 있어서는 고민입니다. 아직 인간이 덜 된 거겠지요"라는 식으로 결론이 나고 있었습니다. 

방송기자 에세이집에는 “결국 소녀는 죽고 말았다”며 왜곡까지

 저도 사진강의를 하는 사람이고 뉴스사진의 윤리에 대해 말할 땐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의 목숨에 우선하는 뉴스가치는 없다"
그렇지만 케빈 카터의 사례는 경우가 다르다는 것이 함정입니다.
 '곽윤섭의 사진 곳간' 을 여는 첫 글로서 케케묵은 ‘케빈 카터를 위한 변명’을 다시 끄집어 낸 것은  그 후로 지금껏 스스로에게도 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사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아직도 그 오류가 청산이 되지 못한 채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떠돌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까이는 2007년 10월 한 야당의 부대변인 성명서에서도 케빈 카터의 이름이 거명되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한" 사례로 활용되고 있었습니다.
 멀리 보면 한 방송기자의 에세이집에도 오류로 범벅이 된 채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가 사진을 찍고 소녀를 구하기 위해 독수리를 쫓아버렸을 땐 이미 늦었다. 결국 소녀는 죽고 말았다."  소녀는 죽지않고 구호소로 갔습니다.
그리고 2005년 처음 글을 쓰게 된 직접 계기가 되었던 것은 한 일간지의 법원 판결문 재인용에 등장한 케빈 카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존중의 태도 견지하지 못했다’ 포장

 "인격권의 주체로서 존엄과 가치를 지닌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존중의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스스로 또는 제3자에 대하여 폭넓은 보호를 요구할 지속적 기반을 확보 할 수 있다고 할 것인 점(단적인 예로 케빈 카터라는 작가는 아프리카 수단에서 독수리가 굶주려 기운을 잃고 엎드려 있는 소녀의 죽음을 기다리며 노려보고 있는 보도사진을 촬영하여 1994년 퓰리쳐상을 수상하였으나 1994년 7월 이 사진에 대한 비난과 이로 인한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였다고 전해진다)."  판결문답게 어렵게 포장이 되었지만 케빈 카터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존중의 태도를 견지하지 못하였다고 읽힙니다.

 이를 근거로 그 일간지의 기자는 "사진보다 사람목숨이 우선이었어야 한다는 비난이 고통스러웠던지 예술가는 상처받고 죽어갔다.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의 태도를 가져야 표현의 자유도 확보된다. 그것을 몰라 불행했던 예술가를 잊지 마라"고 한 술 더 뜨고 있습니다.
 다수의 일반 네티즌들이 오류를 확대재생산해서 전파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고 우려할만한 일입니다. 또한 정치인, 기자, 판사 등 사회 각층의 전문가들조차 저지르는 무책임한 재인용도 오류의 확대, 전파에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심히 걱정스럽습니다.
말 한마디, 글 한 줄에도 조심스러워야 하고 동시에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이 자꾸 희미하게 변색되는 세태가 안타깝습니다.

처음 글 썼을 때보다는 사실에 가까운 내용들 많이 늘어 다행
 
 그래도 2007년 11월 현재 포털에서 검색해본 결과 2005년에 제가 처음 이글을 쓰려던 당시보단 사실에 근접하는 내용들이 많이 늘었습니다. 어떤 분은 "구글에서 검색하니 쉽게 찾았다"고 했지만 꽤 조사를 많이 해서 진실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계셨습니다. 이제 제가 다시 이 글을 올림으로 해서 조금이라도 사실을 찾아가려는 노력들에 힘을 더 보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하부터 본문입니다. 예전의 글이 장황했다는 반성을 하면서 일부 첨가하고 대폭 요약했습니다.



[케빈 카터를 위한 변명]

 케빈 카터는 1961년에 태어나 1994년에 사망한 사진기자다.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으로 아파르트헤이트(분리)정책으로 소요가 극심하던 시절 다른 동료 세명과 함께 뱅뱅클럽 으로 불리던 사진가 집단의 일원으로 일했다.

총탄 살해 방화 현장 누비는 실력 빵빵한 ‘클럽’

뱅뱅클럽은 총탄이 난무하고 연일 살해와 방화가 이어지는 전쟁터같은 현장에서 두려움없이 그리고 가끔은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게 취재현장을 파고든다는 평판 때문에 남아공화국에서 일하던 다른 외신 기자들이 붙여준 애칭이다. 뒤에 다시 등장하는 마리노비치도 이 뱅뱅클럽의 일원이며 1991년에 퓰리처상(스폿사진부문)을 수상한 바가 있다. 한 마디로 실력 빵빵한 사진가들의 모임인 셈이다.

 뉴스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사진기자라고 부른다.  사진기자들 가운데서 극히 일부만이 분쟁지역에서 취재를 한다. 분쟁지역에서 취재하는 사진기자들은 누구나 목숨을 걸고 일을 한다. 보수가 많아서도 아니고 좋은 사진을 건질 확률이 높기 때문은 더욱 아니다.
 인류가 빚어낸 최악의 자기 혐오인 전쟁(혹은 분쟁)을 취재하는 것은 그 비극과 참상을 지구상의 나머지 인류에게 알려 더 이상의 비극을 막으려는 숭고한 의지 때문이다.

분쟁 시달리는 남아공 태생으로 아프리카 참상 찍으며 아픔 함께


 

 케빈 카터는 지역의 작은 언론에서 시작해 후에 로이터, 시그마 포토 등에서 프리랜스 사진기자로 일했다. 보도사진가의 대부분은 늘 가난하게 살고 있고 케빈 카터도 생활고에 시달렸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현장에서 늘 목도하게 되는 참상에 대해 가슴 아파했다. 아프리카, 특히 그가 태어난 남아공화국에선 그 당시 분쟁으로 날이 지샜고 총과 칼이 난무하는 현장에서 피비린내가 가득한 지옥같은 상황을 수도 없이 마주쳐야 했다. 아프리카에서 굶어죽는 아이를 보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구 반대편이나 마찬가지인 한국에서도 아프리카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의 하나가 비쩍 말라 죽어가는 아이들 아닌가.

 퓰리쳐상의 피쳐 사진 부문에서 상을 받게 된 이 사진을 찍은 것은 1993년이다. 케빈 카터는 일하고 있던 매체에 휴가를 내고 항공료를 빌려 당시 기아가 극심했던 수단으로 향했다.
 아요드란 곳에 비행기가 도착하자마자 기아로 인한 희생자를 찍기 시작했다. 굶어서 죽음에 이르게 된 수많은 사람들에게 구조의 손길이 미치길 갈망하며 넓은 숲으로 이동했다.


완성도 높은 순간 기다려 찍고 독수리 쫓아…울먹이며 "하느님~"

 그는 한 소녀가 급식센터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그가 사진을 찍으려고 쭈그리고 앉을 때 독수리 한 마리가 내려앉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독수리가 날개짓을 하게 되면 더 완성도가 높은 그림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한동안 기다렸다. 이윽고 독수리가 아무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독수리는 살아있는 생물체를 공격하지 않는다) 셔터를 누르고 독수리를 쫓아냈다. 그 어린 소녀는 다시 급식센터로 향하는 어려운 발걸음을 이었다.
 케빈 카터는 나무아래에 주저앉아 줄담배를 피우며 "하느님~"하고 중얼거리면서 울기 시작했다. 그의 수단 취재 여행에 동행했던 동료 실바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그 후 계속 침통해 했고 딸을 보고 싶다면서 계속 중얼거렸다고 한다.


뉴욕타임즈에 실리고 순식간에 아프리카 참상 상징 아이콘으로

 이 사진은 수단의 사진을 찾던 뉴욕타임즈로 보내졌고 1993년 3월 26일자에 실렸다. 그리고 전세계에 사진이 전파되는데 걸린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 사진이 아프리카의 참상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된 것도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 후 그는 유명해 졌지만 일하던 매체를 그만두고 경제적으론 불안하기 짝이 없는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했다. 일을 하고 싶은 욕심때문이었다.

 이듬해 4월 12일에 퓰리처상을 받는다는 사실을 통보받았다. 4월 18일 그를 포함한 뱅뱅클럽의 동료들은 요하네스버그에서 10마일 떨어진 토코자 마을로 향했다. 폭력사태의 발발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정오가 되기 직전 좋은 사진을 찍기엔 햇빛이 너무 강렬해 카터는 시내로 돌아왔는데 그 순간 라디오에서 동료 켄 오스터브록이 살해당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또 다른 동료 마리노비치는 중상이란 소식도 함께. 케빈 카터는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그 다음날 폭력사태가 더 격화되었음에도 다시 토코자에 뛰어 들었다. 훗날 그는 "켄이 아니라 내가 총알을 맞았어야 했다"라고 술회했다.
퓰리쳐상을 받으면서 그는 많은 비난의 목소리도 접해야 했다.


동료 취재현장 사망에 충격…평소에도 보도사진가 딜레마 고민

 케빈 카터 자신도 자주 고통스럽게 보도사진가의 딜레마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는 시각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나는 피로 붉게 물든 주검을 프레임에 꽉 채우기 위해 줌인을 하기도 한다. 죽은 자의 얼굴은 약간 회색빛이 돈다. 나는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이다. 마음 내면의 세계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일을 할 시간이며 나머지 일은 (사진을 찍은) 다음에 처리해야 한다고 되뇌이곤 했다. 내가 이 일을 할 자신이 없으면 사진기자란 직업을 관두어야 한다."
 현역 최고의 뉴스사진가중 한명인 제임스 나치웨이는 카터의 이야기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자신의 기분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런 일을 하는 사진기자는 아무도 없다. 그 일은 계속하기가 아주 어려운 직업이다."


“절망적…돈이 없다…살육과 시체와 고통에 쫓기고 있다” 유서

 그해 7월 27일 케빈 카터는 자동차 배기가스에 호스를 연결해 둔채 차안에서 자살했다. 수많은 참상을 지켜본 카터는 남아공에선 흔하기 짝이 없는 마리화나를 자주 피웠고 친구 켄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말년에는 마약에 기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세상을 뜨면서 악몽과 불길함 따위로 범벅이 된 유서를 남겼다. "절망적이다. 전화가 끊어졌다...집세도 없고...양육비...빚갚을 돈...돈!!이 없다...나는 살육과 시체들과 분노와 고통에 쫓기고 있다. 굶주리거나 상처를 입은 아이들, 권총을 마구쏘는 미친 사람, 경찰, 살인자, 처형자등의 환상을 본다."
그리고 이 말도 남겼다. "내가 운이 좋다면 켄의 곁으로 가고 싶다."





여기까지가 본문입니다.


독수리가 살아있는 사람 공격 않는다는 건 상식

 이제 케빈 카터에 대한 변명을 제대로 해보겠습니다. 위에 나열한 상황에서 논점은 크게 두가지로 집약됩니다. 하나는 케빈 카터가 한 행동이 비난받아야 하는지의 여부입니다. 또 하나는 케빈 카터가 자살한 것이 그 사진에 대한 비난 때문이었는지의 여부입니다.

 몇가지 팩트가 있습니다. 퓰리처상을 받은 사진을 모은 사진집에 나온 기록에 따르면 "당시 현장에서 일하던(취재하던) 사진기자들은 사람들을 만지지 말도록 지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전염병을 옮길 위험이 있다" 는 이유였습니다. 이 명분만으로 케빈 카터가 마음이 편했을리는 없습니다. 그는 그 전부터 그리고 그 후에도 기아와 전쟁의 참상 때문에 괴로워하던 휴머니티가 강한 뉴스사진가였습니다. 게다가 독수리는 살아있는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상식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뉴스사진가였고 그의 일에 충실했으며 그가 남긴 사진이 아프리카의 기아를 세계에 전파하는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전쟁 참상에 대한 회의 누구보다도 절실히 느끼는 사람들

 종군(혹은 분쟁지역전문) 사진기자들은 평화와 인간의 존엄성을 중요시하는 사람입니다. 전쟁의 참상을 취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죽음과 마주치는 일이며 인간의 죽음 앞에서 전쟁으로 촉발된 일련의 참상에 대한 회의를 누구보다도 절실히 느끼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왜 반전단체에 직접 뛰어들어 집회에 참여하거나 기아돕기 운동을 하는 자원봉사 활동가가 되지는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만 뉴스사진기자들의 임무는 따로 있고 그 임무 또한 숭고하고 지난하다는 사실은 쉽게 반박하진 못하실 것입니다.
 케빈 카터가 그 사진에 대한 비난 때문에 자살했다는 주장은 어떨까요? 그는 마음이 여렸고 어려운 직업 탓에 가정의 환경 또한 열악했습니다. 더 굳건한 마음으로 삶을 영위했어야 마땅하나 그러지 못했던 모양인데 주변의 정황으로 봐서 꼭 그 사진에 대한 비난 때문에 자살한 것으로 보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마음 여렸고 가정환경 열악…비난이 카터 괴롭히는 데 일조 했을 것

 
"모든 분쟁지역 사진가들은 그들의 동료들이 다른 현장에서 부닥치는 것보다 훨씬 심한 윤리적 걸림돌과 자주 직면한다. 전쟁사진은 다른 뉴스사진 분야보다 본질적으로 비참한 장면을 담게 되어 있다. 게다가 매시간, 매일 열악한 상황에서 판단을 내려야 하고 스트레스와 공포가 아드레날린과 짬뽕이 되어 어떤 사진을 마감해야 하는 지에 대해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미국의 뉴스사진가 피터 호위의 말입니다. 말년의 케빈 카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언급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그 사진에 대한 비난이 케빈 카터를 괴롭히는데 일조한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난은 사려 깊지 못한 자들의 가벼운 입에서 나온 것입니다.

 한번 호도된 팩트를 제대로 되돌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지난 2005년에 실감했었습니다. 이 번엔 한결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속에 글 올립니다.

 

[곽윤섭의 곳간은 이런 곳]

 

 사진기자를 시작한 뒤로 여러 곳에 글과 사진을 써왔습니다.
  그중 기사화된 것도 있지만 그냥 제 글방에 갈무리해둔 것도 있습니다. 곳간엔 말 그대로 제가 쓴 글과 사진을 재가공해서 쌓아둘 것입니다. 오래되었지만 다시 꺼내서 볼 만한 것도 꽤 있습니다. 하나씩 앞으로 끄집어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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