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 바르트 기획전에 바르트가 없다

사진마을 2016. 0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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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불수교 130주년 기념 <보이지 않는 가족>전


  “바르트 사진론에 기반한 전시”라며

 <신화론>과 <카메라 루시다>로 주제 구성했다지만

 

 <카메라 루시다>에는 가족에 대한 언급 별로 없어

 가족이란 개념을 끌고 온 것이 지나치게 자의적

  

 “바르트의 비판적 시각에 바탕을 뒀다”지만

 비판적 시각이 보이는 사진이 별로 없고

 

 바르트가 언급도 않거나 기피했던 작품도 있고

 “그의 사진읽기는 나에게는 불충분”이라고 한 작가도

 

 바르트의 사진론은 “거기 있었음”이 핵심

 예술사진이 아닌 사진이 더 예술적이라고 했는데 

 바르트가 외면했던 ‘예술사진’이 훨씬 많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한불수교 130주년을 기념하는 사진전 <보이지 않는 가족>전이 열리고 있다. 이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이 프랑스 국립조형예술센터와 아키텐지역 현대예술기금과 공동주최한 것으로 두 프랑스 기관의 소장품 200 여점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워커 에반스, 앙리 카르띠에 브레송, 윌리엄 클라인, 다이안 아버스, 제프 쿤스, 신디 셔먼 등 거장들의 작품이 포함되어있다.

rb001.jpg » 보이지 않는 가족-포스터

 

그러나 전시장에서 만난 사진들은 전시기획과 분리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유는 전시기획자의 의도 때문이다. 이 전시는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1916~1980)의 탄생 100주년도 같이 기념하는 의미가 매우 큰 전시다. 따라서 프랑스 국립조형예술센터 사진부서의 책임을 맡은 파스칼 보스, 롤랑 바르트 전문가 마갈리 내처겔 등 3명의 프랑스 사진계 인사가 공동으로 기획을 맡았고 전시 내용도 바르트의 저서 중 <신화론>과 <카메라 루시다>에 기반하여 ‘신화를 해체하기’, ‘중립안으로’, ‘보이지 않는 이들(카메라 루시다 사진첩)’, ‘자아의 허구’, ‘에필로그’의 다섯 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립미술관의 전시 개요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사상가 롤랑 바르트가 파리에서 뉴욕현대미술관의 세계순회 전시 <인간가족>전을 관람한 후 인류라는 상상적 공동체를 비판했고 현대 사회 전반에 내재한 신화적 요소들을 해체한 바 있다. 또한 그는 저서 <카메라 루시다>에서 위인이 아닌 약자에게, 집단보다는 개인에게, 서사적 역사보다는 일화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가족과 성이 이루는 사회적 규범을 해체하고자 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번 전시 <보이지 않는 가족>에서 보이는 기획상의 문제점은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가족이란 개념을 끌고 온 것이 지나치게 자의적이란 점이다. 마치 바르트가 <카메라 루시다>란 책에서 아주 자의적으로 사진을 규정해나간 것을 연상케한다.

 

두 번째는 바르트의 이름을 빌어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에 걸린 사진들은 바르트가 책에서 제외시켜나갔던 것들이 대부분이란 점이다. 전시 주최쪽은 “<카메라 루시다>에 담긴 사진론에 기반한 전시”라고 설명하지만 많이 빗나갔다. 예를 들자면 <카메라 루시다>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이 한 장도 없고 언급도 없다. 윌리엄 클라인의 사진은 들어있으나 윌리엄 클라인은 바르트의 해석에 반대했다.

마지막으로 5부 ‘에필로그’에서 스타이켄 기획의 1955년 “<인간가족>전의 대안”이라고 전시되고 있는 현재의 사진들은 당시의 <인간가족>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특히 “바르트의 비판적 시각에 바탕을 두고 구성”되었다는데 비판적 시각이 보이는 사진이 별로 없다. 바르트가 살아서 지금 이 전시를 본다면 똑 같이 비판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보여진다. 바르트를 기리기 위해서 만들었다면 ‘바르트을 위한 오마주’라도 되어야하는데 이 전시는 ‘인간가족의 스핀오프’정도로 보여지니 바르트를 다시 분노하게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성공적이다.

 

5부 에필로그가 열리는 일우스페이스는 대기업인 한진그룹이 설립한 곳이다. 바르트가 그토록 깨고 싶어 했던 것이 권력, 권위, 자본이 만든 코드였음을 생각하면 무척 흥미롭다. 대한항공과 공근혜갤러리(마이클 케나의 사진을 대변했다) 사이의 법정 소송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 소송에서 대한항공은 승소했다.

 

rb01.jpg » 군인, 아우구스트 잔더  

rb02.jpg » 우월한 동물들, 로베르 두아노

rb04.jpg » 무제4, 디앤 아버스

rb06.jpg » 세바스찬과 엔다, 메이플소프

rb07.jpg » 나는 아이, 베르나르 포콩

rb11.jpg » 부다페스트 어머니와 아이, 안드레스 세라노

rb13.jpg » 어린 소녀와 낙엽, 에두아르 부바

첫 번째 문제를 제대로 보자. 전시의 기획자 중 한 명인 마갈리 내처겔은 전시 심포지엄 에세이 ‘사진의 정치학’에서 “아버지 없이 자란 바르트가 이제는 어머니도 잃고 <카메라 루시다>에서 새로운 가족을 구성하게 되리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바르트 저서 <카메라 루시다>에는 가족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다.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바르트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어머니란 점, 그리고 제임스 반 데 지가 찍은 흑인 중산층 가족사진 정도가 전부다. 31장의 제목이 ‘가족, 어머니’이며 42장은 ‘닮음’, 43장이 ‘혈통’이라 가족을 언급한 것 같으나 그런 이유가 아니라 “어머니를 알아 볼 수 없는 어머니 사진”을 설명하기 위한 대목일 뿐이다. 이 책의 본문에는 24장의 사진이 들어있다. 찰스 클리프퍼드의 알함브라, 니엡스의 식탁을 빼곤 모두 사람이 들어있는 사진이다. 모든 사람은 누군가의 가족일테니 <카메라 루시다>가 가족에 대한 사진을 다룬 책이라고 한다면 심한 왜곡이다. 그런 비유라면 사람이 들어있는 사진은 모두 가족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카메라 루시다>가 어떤 책인지에 대해선 마갈리 내처겔도 정확히 언급하고 있다. 에세이 ‘사진의 정치학’ 첫 문장이다. “롤랑 바르트가 <카메라 루시다>를 쓰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이 책을 통해 1977년에 돌아가신 그의 어머니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바르트는 <신화론>의 한 꼭지에서 파리에 온 스타이켄의 기획전 <위대한 인간가족(전시의 원래 명칭은 <인간가족>이나 파리 전시에서 이름을 살짝 바꿨다)>전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 자연을 역사의 밑바닥에 두려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전시라는 것이다. 가족이란 개념을 호도하여 하나의 보편적 신화로 만들어버렸다는 주장이다. 그런 주장에 일부 동의하지만 <인간가족>전이 전 세계에서 9백만 명의 관객들에게 사랑을 받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완전히 동의하긴 힘들다. 롤랑 바르트는 <카메라 루시다> 31장에서 “나는 나의 가족을 ‘대문자’ 가족으로 환원시키고 싶지 않듯이, 나의 어머니를 대문자 어머니로 환원시키고 싶지 않다”라고 썼다.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것은 개인적인, 주관적인 접근이다. 잠시라도 ‘소문자’ 어머니를 되찾기 위해 어머니사진을 하나씩 들추면서 어머니의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이 이 책이다. 그러다보니 사진이 무엇인지에 대해 탐구해야만 했고 탐구를 하려다 (기존의 어떤 체계도 도움이 되질 않았기 때문에) 사진에 대해 바르트만의 분류를 시작하게 되었으며 바르트식의 사진체계를 세우게 된 것이 이 책의 앞 부분이다. 스투디엄 사진과 푼크툼 사진이란 분류를 도입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rb00001.jpg » 이탈리아인 거리/윌리엄 클라인(왼쪽) 바이올리니스트의 선율/앙드레 케르테스 사진출처, 밝은방(동문선)

rb00002.jpg » 어느 학교의 지적장애아들/루이스 하인 사진출처 밝은방(동문선)

이 전시의 두 번째 문제점은 사진전에 걸린 사진의 내용이다. 교양이나 정신집중을 통해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 스투디엄 사진인데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스투디어 사진에 대해 바르트는 관심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곧 수 많은 사진을 제외시켜나간다. 희귀한 사진, 순간포착, 빠른 셔터속도의 사진, 이중인화 같은 기법에 의존한 사진, 의외의 발견 같은 사진은 바르트를 설복시키지 못했다. 책 6장에서 바르트가 대놓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사진을 혐오하는 순간들이 있다. 외젠 앗제의 고목사진, 피에르 부세의 누드사진, 제르멘 크릴의 이중인화사진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물론 전시장에 이들의 이름은 없으나 바르트가 기피했던 사진들이 전시장에 많이 있다.

 

전시장 3부 ‘보이지 않는 자들’엔 다이언 애버스나 안드레 세라노, 낸 골딘의 논란적인 사진도 있다. <카메라 루시다>책엔 루이스 하인의 <어느 학교의 정신지체아들> 사진이 있다. 그런데 바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나 역시 괴물같은 머리와 가엾은 옆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내가 보는 것은 세부 요소이며 소년의 옷에서 커다란 당통식 칼라이다...” 바르트가 이 정신지체아 사진을 넣은 것은 ‘보이지 않는 자들(소수자)’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세부요소, 즉 푼크툼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카메라 루시다>에는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의 사진이 한 장도 들어있지 않다.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지만 책을 주의깊게 읽으면 짐작할 수 있다. 바르트는 윌리엄 클라인의 ‘썩은 치아’처럼 사진가가 의도치 않은 그 무엇에 주목하고 싶었는데 브레송의 사진은 의도가 개입한 것처럼 완벽하고 깔끔하다보니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전시 보도자료엔 신디 셔먼과 함께 브레송을 주요인물로 내걸고 있다.

 

윌리엄 클라인의 <이탈리아인 거리> 사진에 대해 바르트는 썩은 치아만 주목했다. 박상우가 재인용해서 쓴 글에 따르면 윌리엄 클라인은 “바르트는 그 자신을 찌르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사진가가 본 것에는 관심이 없다. 이 사진을 찍을 때 나는 바르트와는 다른 것을 보았다. 나의 어린 시절보다 더 지저분한 옷을 입은 아이들, 뉴욕시의 광기, 체크무늬 남방, 뒤에 걷고 있는 소녀, 9월의 더운 아침 등이 나로 하여금 사진을 찍도록 자극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보았지만 바르트는 이것들에 관심이 없다. 그는 자신에게만 귀를 기울이고 사진가에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권리다. 하지만 그의 사진읽기는 나에게는 불충분하다”라고 불평했다. 윌리엄 클라인은 아마 <카메라 루시다>를 다 읽지 않았거나 읽었다 하더라도 다 이해를 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책에 실린 윌리엄 클라인의 사진 바로 근처 페이지(리처드 하워드가 영어로 옮긴 책으로 보면 20장에 케르테츠가 찍은 <바이올리니스트의 선율>에서 직설적으로 아주 이해하기 쉽게 설파했다. 바르트의 관심을 끈 것은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니라 흙길이었다. “어떻게 케르테츠가 흙길과 그곳을 지나가는 바이올리니스트를 분리할 수 있었겠는가? 사진가의 투시력은 ‘보는’ 것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무엇보다도 특히 사진가는 (오르페우스를 모방하면서) 사진가가 이끌고 있는 것, 나에게 제시되는 것을 보기위해 뒤돌아서서는 안되는 것이다”라고 20장을 마무리했다. 케르테츠의 사진이나 윌리엄 클라인의 사진에서 모두 마찬가지로 사진가들이 보고 의도하고 찍었던 내용과는 전혀 뜬금없는, 다시 말해 찍다보니 우연히 따라온 지엽적이고 개인적인 것에 바르트는 관심을 보였다는 뜻이니 사진가들은 엉뚱한 주장하지 말고 가만히 앞으로 가라는 이야기로 읽힌다. 비의지적인 특징, 즉 푼크툼이란 개념을 끌어내기 위한 서술이자 바르트가 세상 대부분의 사진을 배제시키고 있는 과정이다. 바르트는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눈에 보이는 세부묘사의 푼크툼에 도달한다.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에서 사진론을 굳이 읽어낸다면 사진의 여러 속성 중 “거기 있었음”이 핵심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소위 예술사진이 아닌 사진이 더 예술적이라고 책에서 말하고 있다. 이번 전시장엔 바르트가 외면했던 ‘예술사진’이 훨씬 많다.

 

전시 기획의 문제점과 더불어 한 가지 더 짚어야 한다. 검색해보니 많은 매체들이 시립미술관에서 배포한 보도자료를 직 간접 인용하여 이번 전시를 소개하고 있다. 소개하는 것은 좋으나 잘못된 내용이 확대재생산되는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심지어 어떤 매체는 “이 사진전에는 ‘카메라 루시다’ 이론의 영향을 받은 현대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과 윌리엄 클라인, 다이앤 아버스, 신디 셔먼, 소피 칼 등 1960~1970년대 이후 현대 사진가와 미술가의 작품이 등장”이라고 했다. 이 기사는 기자 이름이 없었고 큐레이터 이름은 오자를 냈다. 로봇이 작성했을까? '보도자료 인용'이라고 하면 면피는 될 것이다. 카메라 루시다는 1980년에 나왔고 위 작가의 사진은 대부분 훨씬 전 작품들이다. 그리고 카메라 루시다의 사진론은 그런 것이 아니니 카메라 루시다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바르트는 저기 등장한 대부분의 작가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롤랑 바르트는 세상을 떴으니 그의 이름을 건 전시는 전시기획자의 책임이다. 좋은 전시가 되려면 기획자는 관객에게 롤랑 바르트를 제대로 전달시켜야하고 그에 걸맞는 사진들을 걸었어야 했다. 전시 기획자의 과도한 재해석으로 인해 바르트 탄생 100주년 기념 사진전에는 바르트의 사진철학은 보이질 않는다. 기획자들이 스스로 밝힌 것처럼 바르트는 “‘글쓰기의 영도’와 ‘저자의 죽음’을 통해 저자 대신 독자 중심적 철학을 제안”했다. 이 전시를 생산한 것은 기획자다. 바르트는 없고 기획자만 남았다. 관객은 길을 잃는다.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사진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밝은 방(동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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