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여배우의 ‘처음이자 마지막’ 나들이

곽윤섭 2010. 05. 25
조회수 16259 추천수 0
세실 비튼 사진전 ‘세기의 아름다움’
헵번, 리, 먼로, 테일러, 가르보, 디트리히
마법이 불러낸 예술, ‘이효리사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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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초상사진의 거장 세실 비튼의 사진전 ‘세기의 아름다움’이 예술의 전당 V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엔 국내에선 최초로 공개되는 세실 비튼의 빈티지 작품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 런던의 소더비가 소장하고 있는 이 작품들은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반출된 것으로 소더비 쪽에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사진은 1930년대부터 1960년대 사이에 찍힌 여배우들 여섯 명을 담고 있다.
 
 
세월이 멈춰버린 진정한 여섯 여신
 
오드리 헵번, 비비안 리, 마릴린 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 그레타 가르보, 마를렌 디트리히가 그 주인공들이다. 하나같이 그 시절 전 세계의 영화팬들을 쥐고 흔들었던 여배우들로 어느 한 배우가 다른 배우보다 낫다는 말을 함부로 할 수가 없는 세기적 스타임에 분명하다. 요즘 누리꾼들은 아름다운 여자 연예인들에게 헌사하는 최고의 표현으로 ‘여신’이란 말을 쓴다. 그러나 전시장에서 만나고 보니 이 여섯이야말로 진정한 여신들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전시장의 여섯 여신들은 정말 아름다운 배우들이므로 누구든 직접 만나 사인도 받고 사진을  찍고 싶어할 만한 대상들이다. 그러나 여섯 중 막내 격인 엘리자베스 테일러(1932년생)를 제외하곤 모두 고인이 된 왕년의 스타이니 직접 만날 수가 없다. 지금 생존해 있다고 해도 왕년의 미모를 찾을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전시장에서 관객을 기다리고 있는 여섯 여신들은 평생 늙지 않는다. 세월은 흘러도 아름다움은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반짝거린다. 사진의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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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와 무대의상 디자이너로 동시 인정

 
이런 미인들을 수시로 만나면서 사진으로 기록했던 세실 비튼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세실 비튼(1904~1980)은 어린 시절 학업엔 큰 재질이 없었으나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다. 대학에서도 강의를 듣기보다는 연극과 사진에 집중했다. 그는 사진작가와 무대의상 디자이너로서 동시에 인정받았고 패션지의 대명사 <보그>와 <베니티 페어>에서 그만의 스타일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는 예술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직접 제작에도 참여했지만 동시에 본인이 예술적인 인생을 살았던 멋쟁이였다. 탐미주의는 그의 신조였고 1928년 “나의 사전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아름다움’이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인생의 아젠다를 스스로 설정했다. 당시만 해도 사진은 예술이 될 수 없다는 평가가 유럽의 전반적인 풍토였다.
 
이때 세실 비튼은 그의 모델들에게 마치 그림을 그리는 역사적인 현장에 서있는 것처럼 확신을 심어주었다. 어떤 사진가들은 자신들을 연금술사에 비유하곤 한다. 마법을 부려 뭐든지 금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재주가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세실 비튼은 자신이 찍은 여배우들의 사진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고전주의와 바로크의 고고하면서도 풍만하고 사치스럽기까지 한 그의 시선이 바로 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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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보의 쌀쌀한 시선을 찍은 그의 가슴은 어땠을까

 
세실 비튼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사진가로 헝가리 출신의 거장 앙드레 케르테츠가 있다. 한 평론가는 “앙드레 케르테츠는 그가 마주친 모든 대상에 대해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으로 바라보았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세실 비튼도 그가 만난 여배우들에게 빠져들었다. 
 세실 비튼은 특히 20세기의 수수께끼 같은 인물 중 하나인 그레타 가르보와 오랜 관계를 유지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어떤 대담에서 세실 비튼은 이런 질문을 받았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사진을 통해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는 내가 사진을 찍고 싶었던 사람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녀의 사진을 찍고 싶다고 요청하기 이전부터 그녀와 알고 지냈습니다. 그녀는 단지 “여권용 사진 몇 장을 찍어주시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전시장의 사진 속에서 세실 비튼을 바라보는 여배우들은 귀엽거나 우아하거나 도도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 중에서 그레타 가르보가 (사진을 찍는) 세실 비튼을 바라보는 시선은 쌀쌀맞기까지 하다. 그레타 가르보의 시선은 영화 속 그녀의 이미지 그대로였다. 또한 우리는  이 표정을 통해서 평생 그레타 가르보를 사모했으나 사랑을 얻지 못한 카메라 너머의 남자를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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헵번에게 직접 디자인한 의상 입혀 오스카상 받아
 
평론가 롤랑 바르트는 실존주의와 액션페이팅의 시대였던 1957년 무렵에 세실 비튼의 두 여신들을 비교하면서 이런 표현을 썼다. “가르보의 얼굴은 이데아(Idea)이며 헵번의 얼굴은 사건(Event)이다. 이데아는 플라토닉하고 추상적이며, 거의 육체에서 분리된 상태로 정의될 수 있다. 반면, 이벤트는 동적이고 불안정하며 현세적 흐름의 한 부분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레타 가르보의 영화를 보다가 빠져버린 세실 비튼은 여권사진을 찍어준다면서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말년까지 친분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끝내 그녀를 영화 바깥으로 끌어내지 못했다. 세실 비튼의 여신, 그레타 가르보는 영원히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우상이었던 것이다. 
 또 한 명의 여신, 오드리 헵번은 경우가 달랐다. 헵번은 실존하는 인물처럼 보였고 세실 비튼은 직접 디자인한 의상을 영화 의 주인공 헵번에게 입힐 수 있었다. 세실 비튼은 이 영화로 오스카상(최고디자이너부문)을 수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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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품있고 관능적이고 인간적이고…, 예쁘다 너무 예뻐”
 
전시장의 관객들은 모두들 진지하게 그러나 즐거운 얼굴로 사진을 보고 있었다. 본인을 간호사라고 밝힌 정미화씨는 핸드폰을 꺼내들더니 친구와 속삭이며 “너~무 예쁘다, 너무 예뻐”를 연발하면서 사진 앞에 눌어붙어 있었다. 사진을 본 소감을 물었다.

 “내면의 뭔가를 끌어냈다는 것이 느껴져요. 각 배우들마다 색깔이 다른데 그 특징들을 모두 다르게 잡아낸 것이 보여요. 단순한 아름다움과 달라요. 기품도 있으면서 또 동시에 관능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이 멋집니다”

사진을 강의하다가 어느 수강생이 ‘이효리사진’이라는 용어를 아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서 주저했더니 그는 “누가 찍어도 예쁘게 나오는 사진”이라고 했다. 어떤 의미인지 바로 전달이 되었으므로 강의실 전체는 잠깐 웃었다. 워낙 인물이 좋으니 별다른 사진의 기법도 필요 없고 사진을 특별히 배우지 않아도 누구든지 잘 찍을 수 있다는 비유였다. 실제로 예쁜 모델이 있고 스튜디오 조명이 있다면 휴대폰카메라로 찍어도 예쁘게 나올 수 있으므로 필자도 그 말에 일부 찬성했다. 그러나 만약 누가 봐도 아름답다고 공인하는 미인을 찍었는데 평범하게 나오면 그 땐 (사진실력이 드러나) 더 비참하지 않겠느냐고 농담으로 넘겼다.
 
세실 비튼이 찍은 여신들은 다른 사진가의 사진 속에서 등장하는 배우들과 분명히 다르다. 영국 왕실의 초상사진가였고 1972년에 영국 왕실의 작위를 받은 최초의 사진작가라는 명예를 얻은 세실 비튼에겐 ‘이효리사진’이란 용어가 해당되지 않는다.
 
전시는 7월 24일까지 열린다.
 
곽윤섭기자 kwak1027@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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