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도 속도도 상대적, 좋고 나쁨도 이중적

곽윤섭 2010. 06. 10
조회수 7902 추천수 0
[미션 강의실 시즌2] <15강> 느림 혹은 빠름
디지털보다 느린 아날로그엔 기다림의 미학
경쟁시대 악이었던 느림, 웰빙으로 새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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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다 혹은 빠르다란 개념은 그 자체가 완전히 추상적인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뭐가 느린지 빠른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느림 혹은 빠름은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뭔가는 다른 뭔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빠르거나 더 느립니다.
 
일반적으로 자전거는 자동차보다, 자동차는 비행기보다, 비행기는 우주왕복선보다 더 느립니다. 아이는 어른보다 일반인들은 육상선수보다 더 느립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종종 성립합니다.
 

여유, 노곤함, 권태, 쉼, 게으름…
 
이번 테마는 느림과 빠름입니다. 느림과 빠름이란 개념을 떠올릴 수 있는 대상을 찾아 사진으로 옮기는 작업을 하기 위해 설명을 좀 드리겠습니다. 하나의 대상만 가지고 바로 눈에 쏙 들어오게 하기는 어렵습니다.
 
우선 느림이란 단어가 떠오르는 대상을 나열해보겠습니다. 거북이, 달팽이, 굼벵이, 나무늘보 등은 대표적으로 느린 동물과 곤충들입니다. 느림은 여유, 노곤함, 권태, 쉼, 게으름을 연상시킵니다. 경쟁사회에서 느리다는 것은 도태의 대상으로 여겨졌으나 이젠 그렇지도 않은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슬로푸드, 슬로시티 같은 개념들이 새로 생겨났고 느림의 철학은 현대의 화두가 되었습니다.
 
아날로그는 디지털보다 느린 것 같습니다. 필름카메라는 디지털카메라보다 결과물을 내는 속도가 느립니다. 필름을 현상하고 인화나 스캔을 해야 이미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디지털카메라의 비중이 압도적인 분위기가 되었습니다만 필름에 대한 향수가 모락모락 살아나고 있다는 주장도 있고 필름카메라 마니아들이 다시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이분들에게 물어보면 기다림, 여유의 미학이란 말을 합니다. 셔터를 누른 뒤 바로 볼 수 없고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그 두근거리는 마음이 좋다는 이야길 합니다. 느림은 기다림의 다른 표현입니다.
 
 
나뭇잎 하나 떠 있는 호수
 
느림을 표현하는 사진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새벽 물안개가 자욱한 두물머리에서 강물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안개 탓도 있지만 흐르는 것을 느낄 수가 없을 정도로 물이 잔잔했습니다. 강 위에 돛단배라도 한 척 있었다면 뭔가 움직임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마침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리 한 마리 없이 고요한 강물은 느림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소재였습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이 명소는 사진 찍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입니다. 하지만 굳이 두물머리가 아니더라도 강은 많이 있습니다. 호수는 강보다 더 느리게 보이는 곳입니다. 바람이 부는 날이 아니라면 아예 물의 흐름은 없습니다. 나뭇잎이라도 하나 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호수보단 더 느림을 잘 보여줄 것입니다. 자연적으로 생긴, 혹은 인공적으로 꾸며놓은 크고 작은 습지에서도 느림을 찾아 프레임에 옮길 수 있습니다.
 
이제 ‘느림을 사진 찍는 것’이 어떤 것인지 조금 감이 잡힐 것입니다. 소리 없이 봄비가 내리는 날, 창문 안에서 바라보는 바깥풍경은 조용하고 느립니다. 창문이란 단어가 소리를 차단하기 때문에 비록 사진 속의 공간이긴 하지만 소음을 느끼지 못합니다. 눈이 내린 날도 느림을 찍기 좋은 환경이 제공됩니다.
 
자칫 빙판으로 변해버릴 수도 있는 도로에선 차들은 거북이걸음을 합니다. 사람들도 행여 넘어질세라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깁니다. 온갖 것들을 모두 하얗게 덮어버려 흰색 외엔 두드러진 것이 없기 때문에 더욱 세상이 느리게 보일 것입니다. 느림은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건물, 도로, 자동차 등이 모두 하얗게 치장해 움츠리고 있으니 호화빌딩이나 단출한 주택이나 모두 특색이 없어져 보이고 일시적이나마 경쟁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눈은 세상을 느릿느릿하게 보이게 합니다.
 
 
해지는 순천만의 물길
 
기술적으로 보자면 느림을 표현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느린 셔터속도와 높은 앵글(혹은 원경)이 그것입니다. 먼저 보리밭, 밀밭 같은 곳을 찍을 때 바람이 불어온다면 셔터속도를 느리게 해서 찍어보십시오. 살짝 흔들리는 보리나 밀이 부드럽게 표현되면서 정지 상태로 찍힌 사진과 비교할 때 한결 여유가 있고 느리게 보입니다. 물론 찍히는 대상에 따라 태풍이 부는 상황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가로수들이 사정없이 흔들리는 사진은 느림과는 거리가 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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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방법인 높은 앵글(혹은 원경)은 사람의 감각을 둔하게 만들기 때문에 상황을 느린 것으로 보이게 합니다.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물체라 하더라도 멀리서 바라보면 속도가 느리게 보이는 것은 상식입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 도시를 바라보면 바쁘게 움직이는 자동차들이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론 정상적인 속도가 나더라도 그렇습니다.
 
사람이 걷는 모습을 통상적인 눈높이에서 보면 팔다리가 움직이는 것이 보입니다. 그런데 높은 앵글에선 머리를 중심으로 서서히 떠다니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움직임을 상징하는 팔다리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대상을 찍을 때도 높은 앵글과 원경은 똑같은 방식으로 적용됩니다.
 
세계적 습지로 손꼽히는 순천만을 찍기 위해 산 중턱의 전망대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그날따라 일몰이 화려하진 않았지만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순천만의 물길은 환상적이었습니다. 보트가 한 척 물꼬리를 만들며 지나갔고 물새들이 날아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는데 그것은 제가 있는 곳이 아주 높고 멀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무성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면서 느림 혹은 적막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고요함을 깨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셔터를 눌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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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교시간 1분 전 교문
 
이제 빠름을 찾아봅시다. 느림과 반대되는 개념이니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치타, 제비, 매 등이 대표적으로 잽싼 동물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빠른 덕분에 먹이를 사냥하는 데 유리합니다. 그 외 100미터를 달리는 육상선수들, 경주용 자동차, KTX, 활주로를 박차고 오르는 비행기는 모두 빠른 움직임을 보여주는 사례들입니다.
 
브레이크 댄서의 춤, 놀이동산의 롤러코스터, 아이스크림에 덤벼드는 옆집 꼬마, 등교시간 1분을 남기고 학생주임이 지키는 교문으로 날아드는 학생, 특히 수능시험 보는 날 다른 학교에 갔다가 경찰오토바이의 도움으로 간신히 닫히는 문을 뚫고 들어가는 수험생은 주변사람들을 조마조마하게 하면서 빨리 뜁니다.
 
추상적인 개념도 있습니다. 도를 닦는 사람들은 저무는 서산의 해를 보며 세월의 빠름을 한탄했습니다. 군대 간 남자친구와 이를 기다리는 여자친구에게 2년의 세월은 참 느리기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나고 나면 모두들 “참 빠르다”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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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윤섭기자 kwak1027@hani.co.kr

◈ 금주의  미션 ㅣ 느림 혹은 빠름을 찍어라
 
한눈에 드러나는 사진은 재미가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느림과 빠름을 찍는 데 있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을 통해 느림과 빠름을 느낄 수 있도록 해볼 것을 권합니다. 오랫동안 곰곰이 사진을 바라보다 마침내 사진가의 뜻을 이해하고 관객의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사진을 찍읍시다. 공을 많이 들여야 하지만 테마 있는 사진 찍기에선 꼭 필요한 미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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