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너머 풍경? No 34.

곽윤섭 2011. 0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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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너머 풍경? No 34.

6년 전 한겨레21에 근무할 때 <취재뒷담화>란 코너에 올렸던 글입니다. 오늘은 이 글로, 이 걸로 때웁니다.

 

 

1200원 주면 안 잡아먹~지

 

지난 연말에 모처럼 서울역 앞 광장으로 카메라를 들고 나갔다. 사실은 취재차 갔던 것이지만 제대로 사진을 찍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행사가 예정돼 있었지만 2시간이 넘도록 시작하지 않아서 그냥 철수한 것이다.

추운 날이었지만 광장엔 노숙인들이 많았다. 그들을 찍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님을 여러 차례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에 섣부르게 카메라를 들이대진 않았다. 촬영의 어려움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은 세상의 누구보다도 인권이 보호돼야 할 우리 사회의 약자이다. 비록 지금은 삶의 의욕을 잃고 길거리에서 떠돌지만 나와 똑 같이 우리 사회의 일개 구성원이란 점을 늘 명심하면서 그들을 대한다. 그러므로 내가 무서워서 그들을 안 찍는 것은 아니다. 절대로.

 

사실 무섭긴 하다. 대체로 낮술에 찌든 이들이 멀쩡한 이들보다 더 노숙인처럼 보이기 때문에 카메라는 본능적으로 ‘그림이 되는’ 쪽으로 향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림이 되는 이들은 말보다 행동이 더 빠르기 때문에 카메라를 낚아채려는 경우까지 발생한다. 실제로 뺏긴 적은 없다. 그들이 결사적인 것만큼 나에게도 카메라는 절실한 도구라서 쉬 뺏겨서는 체면이 안 선다. 그러나 실랑이가 벌어지면 노숙인들은 금세 수가 불어난다. 약자들의 무기는 뭉치는 것이라서 상대를 에워싸고 압박하는 것이다.

한두 번 카메라를 뺏길 뻔했던 나는 그 뒤론 반성을 많이 했다. 그들이 카메라에 찍히기 싫은 것은 재클린 오나시스가 파파라치를 피하던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인격과 초상권이 있기 때문이며 본인이 싫다고 할 땐 안 찍어야 하는 것이 대원칙임을 깨달았다. 국민의 알 권리를 들먹일 곳은 따로 있다.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법원에선 범법자들 촬영마저 불허하는 마당에 얌전하게 서울역 광장에서 차갑지만 시원한 겨울 공기를 마시는 노숙인들의 사진을 찍을 권리는 기자 할아버지에게도 없다.

그래서 그 뒤론 허락 없인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는다. 그렇지만 굳이 숨길 필요까지는 없어서 한쪽 어깨에 비껴 메고 이날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저쪽에서 어떤 노숙인이 컴팩트카메라로 사진을 찍던 젊은 기자(어느 신문인지 알 수 없으나 사회부기자인 듯 했다)와 한바탕 말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작은 카메라라서 그리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은 덕인지 뻔뻔한 기자는 노숙인이 반말로 위협을 하는 정도에 그치자 개의치 않고 찍고 있었다. 난 그런 기자들을 아주 싫어한다. 누가 기자랍시고 서울역에 나온 기자의 가족을 허락 없이 찍으면 좋겠는가? 그런데도 그는 “기잡니다”라며 완강히 버티고 있었다. 누가 한 대 맞든 간섭할 일은 아닌 듯했다.

잠시 뒤 그 노숙인은 큰 카메라를 든 나에게 다가왔다.

 

“1200원만 줘.”

“죄송합니다.”

“야, 1200원만 주면 사진 찍어도 안 때릴게. 마음대로 찍게 해줄게.”

“사진 찍을 생각 없거든요?”

“너 사진 찍다 걸리면 죽어.”

“아저씨 찍을 일 없으니 그냥 가세요.”

나이가 나와 얼마 차이 나지 않을 듯싶은데 아저씨라고 한 것이 민망했다. 그이는 소득 없이 돌아섰다. 1200원은 서울역 광장 매점의 소주 한 병 값인가. 광장 미화원의 쓰레받기엔 이들이 마신 소주병이 그득했다.

 

  (2006. 1. 17 한겨레 21 5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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