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과 백, 어울리지 않는 어울림의 풍경

곽윤섭 2015. 03. 10
조회수 13556 추천수 0

이갑철 사진전 ‘침묵과 낭만’

멈춘듯 흔들린듯, 혹은 같이 혹은 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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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차 신드롬’이란 것이 있다. 데뷔 첫해에 놀라운 성적을 낸 스포츠계의 신인선수가 2년차가 되었을 때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를 보여주는 현상을 말한다.
이런 현상은 선수 개인의 불성실 같은 것이 원인이라기보다는 주변의 기대 수준이 너무 높은 것에 대한 부담이 더 주요한 원인으로 생각된다. 스포츠가 아닌 다른 모든 분야에서 찾아볼 있다. ‘미국인들(The Americans)’이라는 세기적인 사진집을 냈던 로버트 프랭크는 그 후 발을 돌려 영화계에서 일을 모색했다.  ‘미국인들(The Americans)’의 명성이 오히려 프랭크의 다음 행보에 방해가 되었던 것이다.
 
 이갑철의 사진전 ‘부산 참견록 2015 <침묵과 낭만>’이 고은사진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5월 27일까지. 부산 참견록은 해마다 한국의 중견 사진가들 중 한 명을 선정하여 부산의 역사성와 지역성을 독창적인 시각으로 기록하도록 지원하고 결과물을 전시하는 10년짜리 장기 프로젝트로, 2013년엔 강홍구, 2014년엔 최광호 작가가 선정된 바 있다.

  이번 전시는 ‘충돌과 반동’ 이후 오랫동안 침묵했던 이갑철이 묵은 먼지를 툴툴 털고 기지개를 켠 것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1984년에 <거리의 양키들>을 발표해 사진계의 관심을 끌었고 2002년엔 <충돌과 반동>으로 한국 사진계에 한 획을 그었던 이갑철은 그 후 이렇다할 작업을 선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나의 판단일 뿐인지도 모르겠고 <충돌과 반동>의 충격이 워낙 커서 다른 작업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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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묵과 낭만>은 기존 이갑철 사진의 전형적인 외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거친 구성과 전경 흐리기가 여전하고 인물 잘라먹기도 같다. 수평 따위는 아예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듯 좌우로 출렁거린다.

  이것은 로버트 프랭크가 ‘미국인들’ 사진집을 미국에서 먼저 내려고 시도하다 미국 사진계로부터 철저히 무시당할 때의 표현들과 유사하다. “그의 사진은 의미 없이 흔들렸고, 입자가 거칠고 노출은 우중충하며 술에 취한 듯 수평이 어긋났는데다가 대체로 엉성하다”라고 한 비평은 “무조건 싫다”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영화 ‘버드맨’에서 과거 영화판 슈퍼히어로의 무게에서 벗어나 레이먼드 카버 원작의 연극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에서 감독과 배우로 성공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주인공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이 뉴욕타임스 연극평론가 디킨슨에게 듣는 이야기와 같다. 이 평론가는 아직 공연이 열리지도 않는 전날 밤 연극을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연극을 망하게 하겠다”고 선언한다. 무조건 싫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 버드맨의 영화 속 주인공이 연기를 마치고 나자 현실인지 상상인지 알 수 없지만 대반전이 등장한다. 표독스러웠던 평론가 디킨슨은 연극에 대해 극찬한다. 로버트 프랭크에게 쏟아졌던 비난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정반대로 바뀌었다. “로버트 프랭크의 ‘미국인들’은 사진의 본질을 바꿔놓았다”, “사진역사상 ‘미국인들’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사진은 거의 없다.”
 
 외형적인 특성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침묵과 낭만>이 <충돌과 반동>과 비슷해 보이고 이갑철 사진의 전형이 로버트 프랭크와 비슷해 보이지만 비스듬하게 찍는 것이 어디 로버트 프랭크의 전매특허랴. 중요한 것은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가의 문제다.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을 신랄하게 드러낸 내용이 중요했던 것처럼 2002년 발표한 <충돌과 반동>은 한국적인 혼과 기를 바탕으로 21세기를 맞이하는 한국인들을 위해 준비한 충격요법이었다고 한다면, 2014년에 찍어 2015년에 발표하는 <침묵과 낭만>은 내용에서 획기적으로 바뀌었다. 보도자료에 따라온 사진이 10여 장밖에 되지 않아 전시장 전체의 냄새를 알 순 없다는 한계가 있다. 기회가 닿아서 전체 사진을 볼 수 있다면 추후에 다시 언급할 것이다.
 
 2015년은 충돌과 반동의 시대가 아니다. 2015년은 민주화운동의 시대도 아니고 이념의 시대도 아니다. 더없이 우울하고 꽉 막힌 시대이긴 하나 지금의 해법은 과거의 그것과 달라야 한다. 이갑철의 사진은 현주소를 잘 보여준다. 사진전의 제목은 말장난이 되어선 안 된다. ‘침묵’과  ‘낭만’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그래서 고민이 길었을 것이다. 남항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진주만에서 일본군의 느닷없는 기습을 받아 침몰하는 미 해군 항공모함이 떠오르고 영도다리와 오륙도를 보면 침울해지는데, 수정동의 멋쟁이 신사와 중구의 커플, 태종대의 아가씨를 보면 스타카토를 보는 것 같다. 사진들의 절반이 침묵이고 나머지 절반이 낭만이라는 뜻은 아니다. 잘 보면 한 장의 사진 안에 침묵과 낭만이 공존하기도 하고 내가 본 13장만으로는 확신할 수 없지만 13장 전체 안에 침묵과 낭만이 병렬배치되어 있다. 사진과 사진 사이에 행간의 맥락이 있을 것인데 그것은 전시장에서 확인해야 한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충돌과 반동의 냄새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는 점이다. 외형적으로야 넘어지고 비틀거리거나 희미하더라도 내용은 달라야한다. 많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본인이 본인에게 주눅이 들어선 안된다. 또 한 가지는 이번 80여 점으로 끝이 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침묵과 낭만이 부산에 국한될 리가 없고 그럴 의사도 없을 것이다. 호흡이 긴 작가, 호흡이 긴 사진이라고 한다면 더 크고 길고 깊게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곽윤섭 선임기자kwak1027@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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