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이 물빛을 읽는다. 안개는 아슴아슴
숨이 목에 차는 순간 찰칵!
필살기 노출 검법이 드디어 완성됐다
이젠 필터 장풍과 후보정 초식만 가다듬으면
드디어 그날이 온다. 전설의 무공이다!
하루 한 컷 건지지 못하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

달빛이 반짝인다. 폭포에선 안개가 피어오른다. 숨을 멈추고 슬며시 셔터를 눌러 렌즈를 개방한다. 나와 카메라와 폭포 사이를 흐르는 공기가 서서히 달아오른다. 두 식경이 지났다. 하늘의 정기와 빛이 한 점에 모인 게 느껴진다. 이제 충분히 노출이 되었으리라. 마침내 필살기 ‘노출 검법’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이제 ‘필터 장풍’과 ‘후보정 초식’만 가다듬으면 전설의 사진무공을 터득하게 된다. 그날이 오면 중원으로 나아가 기필코 ‘1면’을 평정하고 말리라.
사진무림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사진 한 장으로 세상을 호령하는 신진 검객들이 우후죽순처럼 출현하면서 곳곳에서 진검승부가 펼쳐지고 있다. 디지털 카메라로 무장한 고수들이 실시간대로 승부를 겨루는 인터넷 커뮤니티나 사이트에선 매일 환호와 탄식이 교차한다.
1천만 명이 즐기는 ‘국민취미’

고수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성장한다. 매일 수많은 고수들이 다양한 인터넷 커뮤니티나 사이트에 무수한 사진들을 올린다. 초기화면에서 그날의 가장 멋진 사진을 걸어주는 ‘1면’에 등극하기 위해서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 지존의 자리를 유지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속속 새얼굴이 등장하고, 몇달만 게으름을 피우면 금세 잊혀진다.
고수들은 대개 여러 동아리를 섭렵하며 내공을 드러낸다. 규모나 성격이 다양한 이들 동아리는 사진을 ‘국민 취미’로 만든 실질적인 힘이다. 1천만명을 넘어섰다는 사진인구의 상당수가 이들 동아리에서 활동한다. 전문가급 카메라를 가리키는 ‘일안렌즈 반사식 디지털 카메라’(DSLR) 를 즐기는 이들만 3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낭만클럽’은 1만명의 회원을 거느린 사교장이다. 평균연령이 50~60대인 이 클럽에선 이름처럼 낭만적인 출사가 이어진다. 적어도 풍경사진에서만큼은 대한민국 최고라고 자부한다. 현영찬(54) 회장은 “우리 클럽은 나이 든 이들이 많다보니 작품에서도 정이 넘친다”며 “사람이 작품보다 먼저라는 생각을 늘 염두에 둔다”고 말했다. 낭만클럽은 2007년 첫 단체전을 열어, 수익금을 독거노인 돕기에 쓰기도 했다.

올해 네이버 대표 카페로 선정된 ‘필름카메라 동호회’에는 7만명의 회원이 운집해 있다. 디지털이 풍미하는 이 시대를 비웃으며 필름카메라의 매력을 고집한다. 운영자 임경재(49)씨는 “바로 찍고 바로 보는 디카에 비해 필름카메라에는 현상, 인화 과정을 거치면서 얻는 기다림의 즐거움이 있다”고 말한다.
‘포그’는 순수사진을 고집하는 이들의 운동장이다. 회원은 350여명에 불과하지만 순수사진의 정수를 쫓는 열정이 넘친다. 회원들은 늘 ‘카메라는 복사기가 아니다’라는 경구를 되새긴다. 김충일(32) 회장은 “순수사진을 한다는 자부심이 높다”며 “3개월 동안 사진을 올리지 않으면 자격이 제한되는 등 관리가 엄격하다”고 말했다.
낭만 필카 순수 리얼리즘…

‘포익틀랜더 클럽’은 레인지 파인더 카메라에 빠진 이들의 정착지로 통한다. 여러 동호회를 거치며 실력을 쌓은 고수들이 둥지를 틀다보니 좋은 사진이 많이 올라온다는 평판을 듣는다. 몇백명이 한꺼번에 나가 카메라를 들고다니며 사진을 찍는 ‘정모’를 하지 않을 정도로 호젓함을 즐긴다. 이영민(36) 회장은 “정모를 하면 아무래도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며 “회원들이 스스로 자신만의 문화를 만들어나간다”고 말했다. 11만만명의 회원을 자랑하는 ‘레이소다’도 고수들의 집합소로 명성이 자자하다.
동아리마다 동아리만의 옹고집

카메라 기종이나 브랜드를 모임의 이름으로 삼는 동아리도 활동이 왕성하다. 1만2천여명의 회원을 거느린 ‘라이카클럽’은 회원의 절반이 라이카를 보유하고 있다. 나머지 회원들도 라이카에 대한 정보를 구하거나, 라이카로 찍은 사진을 보고 싶어 가입한 이들이다. 매니저 이승연(41)씨는 클럽의 모토를 “카메라보다 사진을, 사진보다 사람이 먼저인 곳”라고 소개했다. 회원이 16만명에 이르는 ‘니콘클럽’은 전국에 지부를 둔 초대형 동아리다. 어려운 처지의 회원들을 십시일반으로 도울 정도로 끈끈한 유대를 자랑한다. 김태환 회장은 “특정 회사의 브랜드를 클럽 이름으로 쓰지만 운영은 독립적”이라며 “신제품이 나오면 회원들에게 베타 테스트를 의뢰하는 정도의 관계를 맺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곽윤섭 기자 kwak1027@hani.co.kr
■ 고수 불변의 법칙,한 고개 넘으면 또 고개
사진 동호회의 고수라고 처음부터 고수는 아니었다. 고수들도 누구나 초보자 시절 카메라를 들고 쩔쩔매던 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이런 카메라를 사라, 그럴 땐 이렇게 찍어라는 따위의 훈수를 따랐다가 낭패를 본 경험도 하나씩은 갖고 있게 마련이다. 동호회는 그런 경험들을 주고받으며 고수로 성장해가는 통로일 뿐이다.
사진을 시작해 적어도 2~3년 간 꾸준히 활동한 사람이라면 대부분 비슷한 통과의례를 거친다. 우선 카메라와 장비를 사야 하니 정보에 목이 마른다. 결국 관련 사이트를 검색하다 회원 등록을 하게 하게 된다. 의욕이 넘쳐 컴퓨터 앞에 앉은 자리에서 1천만원어치의 카메라와 렌즈를 사는 일화를 뿌리기도 한다.

다음은 온라인 커뮤니티나 동호회에 발을 들인다. 회원 승인이 떨어져 커뮤니티 게시판에 들어가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카메라와 각종 부대장비에 대한 안내는 물론 사용기며 강좌가 줄을 잇는다. 생전 처음 보는 멋진 사진들도 속속 올라온다. 그런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같은 출사 기회도 수두룩하다.
이제 시간만 허락하면 매주 신천지를 자신의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 같은 장소에 갔던 동료들의 사진과 자신의 것을 비교하면서 교훈을 얻기도 한다. 가끔은 실력이 달리는 것같아 속이 쓰리고, 괜히 장비를 탓하기도 한다. 그러는 사이 가입한 커뮤니티 숫자가 차츰 늘어나고, 서너 개 사이트에선 정회원이 된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고민이 깊어진다. 아무리 카메라 기종을 바꿔도, 아무리 고수들이 많다는 모임에 들어도 실력이 늘지 않는다. 나보다 대상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의문이 치민다. ‘대포’(망원렌즈)를 들고 회당 10만원씩을 내고서 모델이나 레이싱걸을 섭외해 멋진 배경을 찾아나선다. 아름다운 피사체에 멋진 배경, 거기에 후보정까지 하니 멋진 사진이 튀어나온다. 드디어 1면에 사진이 올라가고 조회수가 1만건을 훌쩍 넘어선다. 이러다 전문작가가 되는 게 아닐까 흐뭇한 상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강호엔 고수가 너무 많다. 1면은 항상 나의 것이 아니다. 밤을 새워가며 사진을 올리지만 1면에 오르는 날은 가물에 콩나듯 띄엄띄엄이다. 즐거움은 괴로움으로 바뀌고, 출사는 숙제가 된다. 고수들의 무한경쟁에 빠져드는 것이다.
곽윤섭 기자 kwak1027@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