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전 연 시인 박노해
중동 분쟁지역 돌며 찍은 4만 컷 중 37장 전시
가까이 더 가까이, 아이들 울음소리까지 쟁쟁

1991년 3월12일 ‘노동의 새벽’을 노래하던 얼굴없는 시인 박노해가 구속수감절차를 밟기 위해 수갑을 찬 채 서울 중부경찰서에 들어섰다. 사진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연이어 터졌다. 당시 당국에선 사노맹의 핵심으로 알려진 그를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박노해는 좀처럼 종적을 남기지 않고 5년이나 수배자 생활을 이어가고 있던 참이었다. 기자들과의 짧은 조우를 끝내고 다시 안기부 수사관들에게 끌려가면서 시인은 “노동해방 쟁취하자!”라고 외쳤다.
‘악연’ 중부경찰서가 전시장 알리는데 되레 ‘도움’
그로부터 19년이 지난 2010년 1월 중부경찰서 바로 앞에 있는 충무로의 한 갤러리에서 시인이자 평화운동가인 박노해가 사진전을 열었다. 그의 지인들은 하필이면 중부경찰서 앞이냐고 혀를 찼다. 그래도 이번엔 중부경찰서 덕을 본 게 아니냐는 우스개도 나왔다.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작은 갤러리라 길안내가 어려웠는데 “중부서 바로 맞은편이라고 하니 금방 알더라”는 것이다.
폐막을 이틀 앞둔 26일 전시장에서 박노해를 만났다. 기자의 대학생 시절엔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아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 가지…”로 시작하는 ‘노동의 새벽’을 모르는 대학생이 없을 정도였다. 기자가 신문사에 입사한 뒤에도 좀처럼 붙잡히지도 얼굴을 드러내지도 않아 화제가 됐던, 얼굴없는 시인이자 신출귀몰한 노동운동가였다. 1991년 체포된 뒤 고문 끝에 ‘반국가단체 수괴’ 죄목으로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형이 선고됐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특별사면 조처로 석방되었고 이후 민주화운동유공자로 복권이 되었다. 얼마 후 “박노해가 사진을 찍는다더라”는 이야길 전해 들었는데 그게 벌써 10년 전 일이다. 시인은 10년 간 아프리카, 아시아, 중남미, 중동 등지에서 10만 컷 정도를 찍었다. 그 중 중동지역의 분량이 4만 컷 정도 되는데 그 중 37장을 골라 이번 전시에 선보인 것이다. 최초의 개인전이다.
기자는 평소 사진강의 때나 사진에 대한 조언을 줄 때 한국에도 찍을 것이 많은데 자꾸 외국을 나가서 찍는 풍토가 못마땅하다는 이야길 자주 한다. 그래서 난감해 하리라고 생각하며 첫 질문을 던졌다.
현지인들 카메라 이끌며 진실 알려달라 호소


-국내 작업은 하지 않는가?
=최근의 용산참사 등 국내에도 사진으로 기록할 만한 굵직한 사안이 많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말이 통한다. 내가 굳이 사진으로 옮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국내엔 국내의 현장을 기록하는 수많은 사진가들이 있다. 그분들이 아주 잘하고 있기 때문에 내 몫이 아니라고 본다. 내가 다닌 분쟁지역은 남이 할 수 없고 잘 하지 않는 대상이다.
-시를 먼저 시작했고 사진은 이제 10년 정도 됐다. 글과 사진의 차이는?
=같다. 어떤 대상을 찍으려고 마주했을 때 시나 이야기가 흘러나오지 않으면 안 찍는다. 시가 우러나오는 대상만 사진으로 찍는다. 그게 나의 사진이다. 내가 쓰는 시는 어둠 속에서 낡은 만년필에 피를 담아 쓴 것이다. 사진은 언어가 통하지 않는 땅에서 빛으로 쓴 시다. 지금도 시를 쓰고 있고 내가 다닌 이국의 현장에서도 시를 쓴다. 사실 시나 사진보다도 더 앞서는 것은 활동이다. 중동의 아이들과 축구를 하면 놀고 학교를 세우는 데 힘을 보태는 등 평화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 사이에 간간이 사진을 찍을 뿐이다.
-당신에게 있어 사진은 무엇인가?
=카메라는 (현지인들의) 눈에 띄는 도구다. 분쟁지역의 주민들, 아이들은 나를 보면 조심스럽게 어딘가로 이끈다. 폭격을 맞아 무너진 집들, 비참한 현장으로 나를 안내하곤 “진실을 전해달라고 호소한다” 그들은 사진이 글보다 더 강력한 수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약자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 동시에 권위를 가진 지배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물건이 바로 카메라요 사진이다.
-어떻게 사진작업을 하는가?
=만년필처럼 카메라도 하나의 도구다. 도구 그 자체는 가장 단순해야 한다는 것이 처음 사진을 시작할 때부터 소신이었다. 그래서 한 대의 카메라 바디에 하나의 렌즈(35mm)만 들고 다닌다. 장비가 단출하다는 것, 렌즈가 하나의 화각밖에 없다는 것은 불편함을 뜻한다. 줌이 안 되니 걸어서 다가갈 수밖에 없더라. 가까이 가서 찍으려고 하니 자연스레 대상과의 관계가 형성이 되었다. 내가 찍은 사람들은 모두 나와 친해졌다. 아니 친해지고 난 다음에 찍었다는 게 맞다. 사진은 관계다. 그와 내가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사진이 가능해진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단순성, 관계성, 심미성. 이 세 가지가 중요하다.
-사진을 배운 이야기를 좀 해달라
=난 기계를 못 다룬다.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외국에 나갈 때마다 카메라 몸통 위에 노출표를 써붙여서 다닌다. “밝을 때 바깥에선 조리개 얼마, 실내에선 얼마….” 이런 식이다. 그런데 이 종이는 며칠 지나면 떨어지게 마련이라 그 후엔 허둥지둥한다. 손바닥을 들어 노출을 잡는다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성남훈 작가가 조언을 해줬다. “진작에 좀 가르쳐주지”라고 원망했다. (웃음) 시나 사진은 배운다는 되는 것이 아니다. 배울 수도 없다. 스스로 깨달아야한다. 기술이나 기교에 의존해선 안 된다. 특히 기술이 내용을 가려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사진이다.
이야기와 삶과 사람이 있는 정직한 사진

사진가 박노해가 자신은 지금도 노출 맞추기에 급급하다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오버’이며 겸손의 표현이다. 그는 역광이든 순광이든 인물이든 풍경이든 빛을 잘 다루고 있다.
-사진의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해달라
=그동안 사진전을 구경한 인원이 5천 명이 넘었다니 충무로의 작은 갤러리치곤 아주 성황이었다는 평가를 주변에서 한다. 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은 사진에 취미가 있거나 사진을 전공한 사진인구들의 비율은 10% 미만이란 점이다. 나머지는 사진의 내용에 이끌려 입소문을 따라왔다. 37장밖에 안되는데도 관람시간이 평균 1시간씩은 된다. 눈물을 많이 흘리고 가는 전시다. 쿠르드족 문제와 중동 전체에 대한 시각을 달리하게 되었다는 관객들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아픈 지역의 하나인 중동의 분쟁현장을 담은 사진들이다. 이라크, 팔레스타인,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터키-쿠르디스탄을 담았다. 사진의 원래 역할, 의미는 삶의 이야기를 담는 것이다.

박노해는 인터뷰 동안 여러 차례 사진의 의미를 이야기했다. 그는 사진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사진이 담고 있는 삶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즉, 구도나 빛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런 것은 사진의 외형적인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진이 전해주려는 내용이란 주장이다. 이런 그의 작업에 사진계의 원로들이 대거 공감과 격려의 뜻을 전했다고 한다. 박노해의 사진은 “정직하게 찍으니까 보는 사람을 정직하게 만드는 사진이 될 수 있었다”란 찬사가 나왔다. 그의 첫 사진전 ‘라 광야’는 중동-이슬람 지역에 대한 인식변화를 목적으로 한다. 미국과 이스라엘, 그리고 서구의 눈으로 중동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에게 호소하는 사진들이다.
10월엔 더 많은 사진 볼 수 있어
사진전 도록에 실린 박노해의 글이다.
“중동-이슬람이 분쟁과 테러에 휘말려 있는 까닭은 중동인들에게 ‘저주받은 축복’이라 불리는 검은 석유 때문이다. 서구문명의 가장 큰 에너지원인 석유자원을 노린 미국의 침공과 그에 결탁한 친미독재권력으로 고통받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사진전이 열린 충무로 갤러리 M은 넓지 않다. 그 탓으로 사진을 많이 걸지 못했다. 4만 컷에서 37장을 남길 때 시인은 고통스러워했다. 37장 중에 가장 애착이 가는 사진이 뭐냐고 물었더니 “모두 다”라고 답하며 전시장에 포함되지 못한 사진들에 더 애착이 간다고 했다. “빠진 사진에 실린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시인의 표현에 따르면 37장의 사진 한 장, 한 장엔 모두 각각의 시나 소설이 한 편씩 들어 있다.

전시는 1월28일에 끝났다. 조금 더 큰 규모의 사진전이 열리는 10월에 그의 사진을 훨씬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엔 http://www.ra-wilderness.com/ 홈페이지에서 그의 사진을 찾아볼 수 있고 도록을 구입할 수 있다. 방문자들이 게시판에 남긴 글들이 절절하다. 10월엔 박노해 시인이 10년 만에 펴내는 시집도 나올 예정이다.

곽윤섭 기자 kwak1027@hani.co.kr
중동 분쟁지역 돌며 찍은 4만 컷 중 37장 전시
가까이 더 가까이, 아이들 울음소리까지 쟁쟁

1991년 3월12일 ‘노동의 새벽’을 노래하던 얼굴없는 시인 박노해가 구속수감절차를 밟기 위해 수갑을 찬 채 서울 중부경찰서에 들어섰다. 사진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연이어 터졌다. 당시 당국에선 사노맹의 핵심으로 알려진 그를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박노해는 좀처럼 종적을 남기지 않고 5년이나 수배자 생활을 이어가고 있던 참이었다. 기자들과의 짧은 조우를 끝내고 다시 안기부 수사관들에게 끌려가면서 시인은 “노동해방 쟁취하자!”라고 외쳤다.
‘악연’ 중부경찰서가 전시장 알리는데 되레 ‘도움’

폐막을 이틀 앞둔 26일 전시장에서 박노해를 만났다. 기자의 대학생 시절엔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아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 가지…”로 시작하는 ‘노동의 새벽’을 모르는 대학생이 없을 정도였다. 기자가 신문사에 입사한 뒤에도 좀처럼 붙잡히지도 얼굴을 드러내지도 않아 화제가 됐던, 얼굴없는 시인이자 신출귀몰한 노동운동가였다. 1991년 체포된 뒤 고문 끝에 ‘반국가단체 수괴’ 죄목으로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형이 선고됐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특별사면 조처로 석방되었고 이후 민주화운동유공자로 복권이 되었다. 얼마 후 “박노해가 사진을 찍는다더라”는 이야길 전해 들었는데 그게 벌써 10년 전 일이다. 시인은 10년 간 아프리카, 아시아, 중남미, 중동 등지에서 10만 컷 정도를 찍었다. 그 중 중동지역의 분량이 4만 컷 정도 되는데 그 중 37장을 골라 이번 전시에 선보인 것이다. 최초의 개인전이다.
기자는 평소 사진강의 때나 사진에 대한 조언을 줄 때 한국에도 찍을 것이 많은데 자꾸 외국을 나가서 찍는 풍토가 못마땅하다는 이야길 자주 한다. 그래서 난감해 하리라고 생각하며 첫 질문을 던졌다.
현지인들 카메라 이끌며 진실 알려달라 호소


-국내 작업은 하지 않는가?
=최근의 용산참사 등 국내에도 사진으로 기록할 만한 굵직한 사안이 많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말이 통한다. 내가 굳이 사진으로 옮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국내엔 국내의 현장을 기록하는 수많은 사진가들이 있다. 그분들이 아주 잘하고 있기 때문에 내 몫이 아니라고 본다. 내가 다닌 분쟁지역은 남이 할 수 없고 잘 하지 않는 대상이다.
-시를 먼저 시작했고 사진은 이제 10년 정도 됐다. 글과 사진의 차이는?
=같다. 어떤 대상을 찍으려고 마주했을 때 시나 이야기가 흘러나오지 않으면 안 찍는다. 시가 우러나오는 대상만 사진으로 찍는다. 그게 나의 사진이다. 내가 쓰는 시는 어둠 속에서 낡은 만년필에 피를 담아 쓴 것이다. 사진은 언어가 통하지 않는 땅에서 빛으로 쓴 시다. 지금도 시를 쓰고 있고 내가 다닌 이국의 현장에서도 시를 쓴다. 사실 시나 사진보다도 더 앞서는 것은 활동이다. 중동의 아이들과 축구를 하면 놀고 학교를 세우는 데 힘을 보태는 등 평화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 사이에 간간이 사진을 찍을 뿐이다.
-당신에게 있어 사진은 무엇인가?
=카메라는 (현지인들의) 눈에 띄는 도구다. 분쟁지역의 주민들, 아이들은 나를 보면 조심스럽게 어딘가로 이끈다. 폭격을 맞아 무너진 집들, 비참한 현장으로 나를 안내하곤 “진실을 전해달라고 호소한다” 그들은 사진이 글보다 더 강력한 수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약자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 동시에 권위를 가진 지배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물건이 바로 카메라요 사진이다.
-어떻게 사진작업을 하는가?
=만년필처럼 카메라도 하나의 도구다. 도구 그 자체는 가장 단순해야 한다는 것이 처음 사진을 시작할 때부터 소신이었다. 그래서 한 대의 카메라 바디에 하나의 렌즈(35mm)만 들고 다닌다. 장비가 단출하다는 것, 렌즈가 하나의 화각밖에 없다는 것은 불편함을 뜻한다. 줌이 안 되니 걸어서 다가갈 수밖에 없더라. 가까이 가서 찍으려고 하니 자연스레 대상과의 관계가 형성이 되었다. 내가 찍은 사람들은 모두 나와 친해졌다. 아니 친해지고 난 다음에 찍었다는 게 맞다. 사진은 관계다. 그와 내가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사진이 가능해진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단순성, 관계성, 심미성. 이 세 가지가 중요하다.
-사진을 배운 이야기를 좀 해달라
=난 기계를 못 다룬다.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외국에 나갈 때마다 카메라 몸통 위에 노출표를 써붙여서 다닌다. “밝을 때 바깥에선 조리개 얼마, 실내에선 얼마….” 이런 식이다. 그런데 이 종이는 며칠 지나면 떨어지게 마련이라 그 후엔 허둥지둥한다. 손바닥을 들어 노출을 잡는다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성남훈 작가가 조언을 해줬다. “진작에 좀 가르쳐주지”라고 원망했다. (웃음) 시나 사진은 배운다는 되는 것이 아니다. 배울 수도 없다. 스스로 깨달아야한다. 기술이나 기교에 의존해선 안 된다. 특히 기술이 내용을 가려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사진이다.
이야기와 삶과 사람이 있는 정직한 사진

사진가 박노해가 자신은 지금도 노출 맞추기에 급급하다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오버’이며 겸손의 표현이다. 그는 역광이든 순광이든 인물이든 풍경이든 빛을 잘 다루고 있다.
-사진의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해달라
=그동안 사진전을 구경한 인원이 5천 명이 넘었다니 충무로의 작은 갤러리치곤 아주 성황이었다는 평가를 주변에서 한다. 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은 사진에 취미가 있거나 사진을 전공한 사진인구들의 비율은 10% 미만이란 점이다. 나머지는 사진의 내용에 이끌려 입소문을 따라왔다. 37장밖에 안되는데도 관람시간이 평균 1시간씩은 된다. 눈물을 많이 흘리고 가는 전시다. 쿠르드족 문제와 중동 전체에 대한 시각을 달리하게 되었다는 관객들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아픈 지역의 하나인 중동의 분쟁현장을 담은 사진들이다. 이라크, 팔레스타인,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터키-쿠르디스탄을 담았다. 사진의 원래 역할, 의미는 삶의 이야기를 담는 것이다.

박노해는 인터뷰 동안 여러 차례 사진의 의미를 이야기했다. 그는 사진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사진이 담고 있는 삶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즉, 구도나 빛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런 것은 사진의 외형적인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진이 전해주려는 내용이란 주장이다. 이런 그의 작업에 사진계의 원로들이 대거 공감과 격려의 뜻을 전했다고 한다. 박노해의 사진은 “정직하게 찍으니까 보는 사람을 정직하게 만드는 사진이 될 수 있었다”란 찬사가 나왔다. 그의 첫 사진전 ‘라 광야’는 중동-이슬람 지역에 대한 인식변화를 목적으로 한다. 미국과 이스라엘, 그리고 서구의 눈으로 중동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에게 호소하는 사진들이다.
10월엔 더 많은 사진 볼 수 있어
사진전 도록에 실린 박노해의 글이다.
“중동-이슬람이 분쟁과 테러에 휘말려 있는 까닭은 중동인들에게 ‘저주받은 축복’이라 불리는 검은 석유 때문이다. 서구문명의 가장 큰 에너지원인 석유자원을 노린 미국의 침공과 그에 결탁한 친미독재권력으로 고통받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사진전이 열린 충무로 갤러리 M은 넓지 않다. 그 탓으로 사진을 많이 걸지 못했다. 4만 컷에서 37장을 남길 때 시인은 고통스러워했다. 37장 중에 가장 애착이 가는 사진이 뭐냐고 물었더니 “모두 다”라고 답하며 전시장에 포함되지 못한 사진들에 더 애착이 간다고 했다. “빠진 사진에 실린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시인의 표현에 따르면 37장의 사진 한 장, 한 장엔 모두 각각의 시나 소설이 한 편씩 들어 있다.

전시는 1월28일에 끝났다. 조금 더 큰 규모의 사진전이 열리는 10월에 그의 사진을 훨씬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엔 http://www.ra-wilderness.com/ 홈페이지에서 그의 사진을 찾아볼 수 있고 도록을 구입할 수 있다. 방문자들이 게시판에 남긴 글들이 절절하다. 10월엔 박노해 시인이 10년 만에 펴내는 시집도 나올 예정이다.

곽윤섭 기자 kwak1027@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