찍는 순간 달아나 버린다

사진마을 2017. 12. 21
조회수 2618 추천수 0

photosay19.JPG


사진이 있는 수필 #19


<존 버저의 글로 쓴 사진>(원제 Photocopies)는 한글판 제목에서 보듯 소설가, 사회비평가, 예술평론가로 이름을 떨친 존 버저(1926~2017)가 쓴 책이다. 글을 보고 사진이 떠오르는 경험이 전혀 없진 않았으나 존 버저의 이 책에서 나는 숱한 사진들을 봤다. 29개의 짧은 글들로 이루어진 이 산문집에는 막상 사진이라곤 초점이 흐릿해 인물이 누군지 알아보기 힘든 존 버저 본인과 마리사 카미노의 기념사진이 딱 한 장 들어있을 뿐이다.
 책의 8번째 글 제목은 <바위 아래 개 두 마리>다. “두 사람 모두 눈물을 감추지 않았다. 개들이 물끄러미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주인은 등을 돌리고 서 있고, 또 다른 사람은 마치 소금병을 찾아 주기라도 하려는 듯 엉거주춤 서 있었다. 꽤 긴 시간이 흘렀다. 가만히 선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가?
  중학교 시절 나의 주 매체는 라디오였다. 쿨하거나 핫하다는 마셜 매클루언의 얘기를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라디오가 텔레비전보다 훨씬 상상력을 촉발하는 매체라는 것은 상식이다. 당시 라디오를 통해 연재된 드라마 <파란 낙엽>을 즐겨 들었는데 주인공(주로 여자다)의 얼굴이 선명하게 그려졌고 배경화면도 생생히 전달되곤 했다.
  “궁극적으로 어떤 한 장의 사진은 그 사진에 찍혀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나와 닮아있다”라고 롤랑 바르트가 말했다. 사진은 찍히는 그 순간의 그 사람만 나타낼 뿐 그 사람의 다른 모습을 떠올리지 못하게 고정시킨다.
 충무로역 지하 통로엔 ‘충무로 영화의 길’이 있고 예전엔 대종상 시상식에서 상을 받는 영화인들의 사진이 있었으나 최근에 리모델링 작업을 했고 지금은 ‘한국을 대표하는 스타 100인의 캐리커처’가 그려져 있다. 내가 알고 있는 배우도 있겠으나 모르는 얼굴도 있다. 사진이 아니고 그림이다 보니 특정인의 여러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확장성이 얼마간 있다. 가만 보니 배우의 얼굴사진을 놓고 그리고 있었다. 어떤 경우엔 한 명을 찍은 서로 다른 두 사진을 놓고 그리기도 했다. 그리는 사람이 두 사진을 보고 한 인물을 새롭게 해석할 여지도 있겠으나 저 캐리커처는 저 사진 속 인물로 굳어버린다는 점에서 사진과 별다를 바가 없다. 다 둘러보고 걸어 나오는데 녹음된 배우 안성기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충무로는 한국영화의 본고장이며 한국영화를 많이 아끼고 사랑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라디오 스타>가 떠올랐는데 누군가는 <겨울 나그네>를, 또 다른 누군가는 <깊고 푸른 밤>이나 <투캅스>를 떠올릴 것이다.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이 글은 경제월간지 <이코노미 인사이트> 2017년12월호에 실렸습니다.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List of Articles
사진이 있는 수필

빛을 찾는 사진적 눈 [1]

  • 사진마을
  • | 2017.09.20

사진이 있는 수필 #13 사진을 잘 찍는 전문가들은 확실히 일반인들과 다른 ‘사진적 눈’을 갖고 있다. 사진적 시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눈에 ...

사진이 있는 수필

섬바디 in 울릉도 [1]

  • 사진마을
  • | 2017.09.03

사진이 있는 수필 #12 이곳은 울릉도 나리분지 원시림. 하얀 부채처럼, 레이스 달린 양산처럼, 옛날 동네 문방구에서 팔던 20원짜리 장난감 낙...

사진이 있는 수필

총 든 모나리자, 누구를 향하는가

  • 사진마을
  • | 2017.08.17

사진이 있는 수필 11 전유(appropriation)는 동의없이 뭔가를 도용하거나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문화적 전유라고 한다면 문화상품, 예술품 등에서...

사진이 있는 수필

고음불가를 돌파하라

  • 사진마을
  • | 2017.08.03

정확하게 다섯 줄의 오선지가 펼쳐졌다. 이곳은 대학로 한 카페 앞의 공터이며 오선지는 쇠로 된 난간이다. 바닥에 과자 부스러기가 있었던 모...

사진이 있는 수필

나 좀 버리지 맙시다

  • 사진마을
  • | 2017.07.20

 “나는 어디서 왔고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가… 나 좀 버리지 마세요” 지난 한 해 동안 버려진 동물이 8만 마리를 넘었다. 3월 2일 국회 본...

사진이 있는 수필

운동도 사진도 자세가 중요 [2]

  • 사진마을
  • | 2017.07.12

사진이 있는 수필 8 요즘 회사 근처 피트니스센터에서 가볍게 운동을 하고 있다. 기껏 플랭크 5분, 팔굽혀펴기 45회, 달리기 20분, 그 외 근력...

사진이 있는 수필

세월을 낚는 꼬마 파이터 [1]

  • 사진마을
  • | 2017.06.30

사진이 있는 수필 7 부산 국제시장엔 ‘꽃분이네’도 있고 ‘청년몰609’도 있다. 2016년 11월에 문을 열었는데 부산경제진흥원이 글로벌 명품시장 ...

사진이 있는 수필

밥 숟가락 놓지마소 [4]

  • 사진마을
  • | 2017.06.22

사진이 있는 수필 6 영도대교가 공식 명칭인 ‘영도다리’ 도개행사를 보려면 유라시아대륙의 종점마을이란 뜻으로 이름 붙여진 유라리광장으로 가야...

사진이 있는 수필

면도를 했어야 했다 [7]

  • 사진마을
  • | 2017.05.24

 사진이 있는 수필 4 면도를 했어야 했다. 지하철을 탔다. 요즘은 나도 ‘중년여성들’처럼 빈자리를 향해 몸을 날리는 편인데 그날은 빈자...

사진이 있는 수필

화창한 봄을 위한 당신만의 여정 [2]

  • 사진마을
  • | 2017.05.14

사진이 있는 수필 2 여행을 가면 우리는 뭘 하는가? 좀 더 넓게 생각하면 여행이란 무엇인가?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빌 브라이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