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말을 걸다. 영화는...

곽윤섭 2008. 04. 28
조회수 13728 추천수 2

 사진 한 장에 영화 한 편-전주 매그넘 영화 사진전

 

 

제임스딘.JPG

데니스 스탁의 1955년 작. 타임스퀘어를 걷는 제임스 딘          ⓒ매그넘

 

영화배우나 탈렌트를 만나 셔터를 누르면서 왕왕 그 미모에 잠깐씩 빠져들었던 기억이 나에게도 있다. 영화 <로마의 휴일> 속에서 ‘나중에 알고보니 공주' 였던 깜찍한 가출소녀(오드리 헵번)를 만난 기자(그레고리 펙)의 심정이나 영화 <가스등>으로 아카데미여우주연상을 받은 직후의 잉그리드 버그먼과 마주친 사진가의 설렘이 그래서 이해가 된다. 결론은 영화 속이나 영화 바깥 현실에서 모두 할리우드식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미국과 유럽을 사로잡았던 '당대의 연인' 잉그리드 버그먼은 사진가와 사랑에 빠졌고 그와 결혼하기 위해 이혼까지 고려했지만 그 남자는 차갑게 그녀 곁을 떠나버렸다.  그는 다음해 1947년 매그넘의 창설멤버가 된 로버트 카파였다. 전쟁의 포성이 멈춘 파리의 한 카페에서 극작가 어윈쇼와 시간을 보내던 카파는 잉그리드 버그먼을 보자마자 쪽지를 보냈고 둘은 곧 사랑에 빠졌다. 전쟁도 끝난데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카파는 "영화사진이나 함 해 볼까"라면서 버그먼의 다음 작품인 알프레드 히치콕의 <오명(notorious)> 촬영 현장에서 스틸사진가로 활동했다. 영화사진은 전쟁터에 비해 지루했고 "난 날마다 슬펐다"고 후일 카파는 술회했다. 버그먼과의 연애를 이어나가기 위해 이무렵 카파는 할리우드의 B급 영화(Temptation)에 출연하기도 했으나 결국 "제기럴 영화판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일생일대의 실수"라면서 뛰쳐나갔다. 전쟁터 같은 격동의 현장이 그리웠던 카파는 버그먼의 청혼을 거절했다. "조만간 한국에 가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내가 결혼하면 아이를 낳아야 하고 그렇게 되면 난 발이 묶일거야. 그건 싫어"

 

결국 그는 어느 한 자리에 머무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이렇게 당대 최고의 사진가와 최고 여배우의 로맨스는 막을 내렸다.

 

 이를 지켜본 히치콕 감독은 다음작 <이창>(원제 rear window, 1954년)에서 카파와 버그먼의 연애사건을 스토리에 엮어냈다고 한다.
 

히치콕과 트뤼포.JPG

필립 할스만의 1962년 작. 영국 영화감독 히치콕과 프랑스 영화감독 트뤼포. ⓒ매그넘

 

5월 1일 국제영화제가 시작되는 전주에서 지금 카파의 연인 잉그리드 버그먼을 만날 수 있다. 지난 15일부터 시작해 5월 12일까지 열리는‘전주 매그넘 영화 사진전’. 이 사진전엔 세계적인 사진가 그룹 매그넘이 기획한 ‘매그넘 시네마’ 작품 81점을 비롯해 ‘매그넘 코리아’ 프로젝트 중 매그넘 사진가들이 촬영한 한국 감독과 배우의 사진 3점도 함께 공개된다. 각각의 사진마다엔 카파와 버그만의 로맨스와 같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원제 The Misfits 1961, 존 휴스턴 감독)에 출연했던 마릴린 몬로도 만날 수 있다. 전 남편 아서 밀러가 시나리오를 써 준 이 영화에서 몬로는 그 전의 영화들과 전혀 다른 연기를 선보이며 의욕적인 연기자의 꿈을 펼치고 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유작이 되고 말았다.  영화 <라임라이트>에 출연중인 찰리 채플린을 찍은 사진가가 다름아닌 다큐멘터리 사진과 포토스토리의 대가 유진 스미스라는 사실도 새롭다. 전시장에서는 트렌치코트 깃을 세우고 담배를 문 채 비내리는 타임스퀘어를 걸어오는 제임스 딘(1955년 데니스 스탁 촬영)을 만날 수 있다. 사진 속 제임스 딘의 왼쪽 거리엔 오래된 영화의 제목이 하나 극장에 걸려 있는데 전시장을 찾는 사람 중 영화애호가들만 알아 볼 수 있다.

 

F21G0317.jpg

전시장 내부

 

 이번 전시는 모두 6개의 방으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 방 ‘배우의 초상'은 배우들의 인물사진로 꾸며졌는데 점프북 연작으로 유명한 필립 할스만의 사진들이 시선을 끈다. 할스만은 정치인, 영화배우 등 유명인들을 하나같이 펄쩍 뛰게 한 뒤 ‘공중부양’하는 사진을 찍어 책으로 엮었다. 전시장에선  우아함과 품격의 여배우 그레이스 켈리가 깜찍하게 점프하는 모습, 브리지트 바르도가 수영복을 입고 시원하게 점프하는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두 번째 방 ‘영화 속 배우'는 실내 세트장 혹은 야외 촬영장에서 촬영된 사진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 ‘백경’(1954)에 출연중인 그레고리 펙이 고래와 파도에 맞서 사투를 벌이는 명장면을 볼 수 있다. 세 번째 방 ‘빛의 거장’은 감독들의 인물사진을 모은 곳이다. 자신의 영화에서 카메오출연을 즐겼던 히치콕이 시가를 물고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이어지는 네 번째 방 ‘카메라와 조명이 있는 풍경’과 다섯번 째 방 ‘배우 그리고/또는 감독’에서도 어느 하나 놓칠 것이 없는 사진들이 줄을 잇는다. 촬영현장의 배우와 감독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매 사진 한 장마다에 영화 한 편씩이 담겨있는 것 같다. 

 

영화의 꽃인 배우나 감독만 기록한 것이 아니란 점에서 역시 매그넘 사진가들의 특별한 시선을 접할 수 있다. 여섯 번째 방 '영화, 야외를 거닐다'에서는 사진가의 앵글이 영화 밖으로 성큼 걸어나와버린다. 칸느영화제 파티장에서 한 무리의 명사들을 기다리고 있는 웨이터의 뒷 모습(1980년 기 르 케레크)이나 영화포스터가 나붙은 거리 풍경을 담은 사진 등에선 역사를 기록하는 매그넘의 정신을 읽을 수도 있었다.

 

아직 영화제 개막 전이라 다소 한산한 전시회장에서 꼼꼼하게 사진을 뜯어보던 관람객을 만났다. 이명세 감독의 ‘왕팬’이며 시내에서 안경사로 일하는 송혜진(24)씨는 "매그넘이 뭔지 잘 몰랐다. 하지만 (흑백사진들을 보면서) 흑백의 명암으로만 사물이 묘사가 되면서 깊이가 더해진다는 것이 신기했다" 면서 가장 감명이 깊었던 작품으로 영화 ‘미녀와 도둑’ 세트장을 담은 베르너 비숍의 사진을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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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씨는 전시장 한 켠에서 영화 ‘M’ 촬영장의 이명세 감독과 강동원이 담긴 사진(일라이 리드 촬영)을 발견하곤 날아갈 듯 좋아했다.  


전시장을 한 바퀴 돌면서 사진에 빠져들었고 동시에 추억의 명화도 떠올릴 수 있었다.  전시관은 영화제가 열리는 영화의 거리 전주시 고사동에 있다. 구 에프샤프 빌딩 외벽엔 마릴린 먼로, 알프레드 히치콕 등의 사진이 담긴 어른 키 두배가 넘는 대형포스터가 걸려있어 사진전과 더불어 전주국제영화제의 분위기도 돋우고 있다. 전시장안에선 기념사진을 찍지 못하게 해 유감이었다. 그래도 딱 한 작품, 입구에 걸린 오드리 헵번사진 앞에서 추억을 남길 수 있다.  전주까지 와서 영화제를 본 사람들이 이 전시회를 지나친다면 많이 후회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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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스탁의 1954년 작. 영화 '사브리나'에 출연 중인 오드리 헵번  

ⓒ 매그넘 입구에도 걸려있어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기념사진을 찍을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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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이 있는 구 에프 샤프 건물 외벽.  
 

 

전주/글·사진 곽윤섭 기자 kwak1027@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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