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랑비를 맞으며 침묵 시위를 벌이는 대학생들, 서울, 1965 ⓒKuwabara Shisei, 2009
[사진전리뷰]구와바라 시세이 ‘내가 본 격동의 한국’
8월9일까지 부산 고은미술관서 70여장 전시
“컬러로 찍었다면 이런 전시 불가능했을 것”
모든 문화가 대부분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에만 밀집되어 있다. 물론 인구가 수도권에 몰려 있는 것을 생각하면 그럴 법도 하다고 생각되지만 문제는 문화공간의 편중이 인구의 비율보다 더 심하다는 데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서울에선 대형 사진전시회가 잇따라 열렸다. 그러나 비록 서울-부산 KTX 열차가 2시간 3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해도 부산과 경남 사람들이 서울까지 사진전만 보러오기엔 여전히 쉽게 발걸음이 내키지 않을 것이다.
그러던 차에 드디어 2007년 부산에 사진전문미술관이 생겼다. 그 전에도 지역의 미술관에서 가끔 사진전을 열긴 했지만 사진만 전문으로 전시하는 곳은 지방에선 최초라고 한다. 개관이래 고은미술관에선 구본창, 최민식, 한정식 등 유명 작가들의 전시가 이어졌다.
고은사진미술관에서 8월9일까지 구와바라 시세이 사진전 ‘내가 본 격동의 한국’이 열리고 있다. 그는 1964년부터 한국의 현대사와 함께 해온 일본의 보도사진가다.
“한 사람의 일본인 청년사진가는 줄기찬 의지와 열정만으로 한국현대사의 현장에 뛰어들었고, 자신이 입회한 순간들을 움직이지 않는 시각적 증언으로 남겼다. 엄청난 에너지와 집중력이었다. 우리에게도 1960년대와 70년대를 살았던 많은 사진가들이 있지만 아무도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는 구와바라로 인해서 소중한 기록을 후세에 남겨줄 수 있게 되었다. (중략)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역사적인 사실이 풍화되었을 때일지라도, 보는 사람에게 과거를 생각하게 하고 감동을 주는 것이 기록으로서의 사진이 가진 힘이다. 구와바라 시세이의 사진은 바로 그런 힘을 갖고 있다.” - 국립순천대학교 석좌교수 김승곤-
전시 개막 3일째인 6월7일 미술관에서 그를 만났다. 몇 년 전에 그가 한겨레신문사에 들렀을 때 잠깐 만난 적이 있었으니 두 번째라고 생각하는데 막상 그는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부인이 통역을 해준 덕분에 아주 편하게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상대방이 눈치챘을 땐 이미 끝났어야”
- 흑백사진만 하는 이유는?
= 컬러도 하긴 했다. 그런데 색이 자꾸 변하곤 해서 싫었다. 흑백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명이 길지 않아서 보존력이 약하다. 아마 컬러만 찍었다면 지금 이렇게 전시를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어볼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디지털카메라도 가끔 사용하곤 한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 한국에 왔을 땐 디지털카메라도 썼다. 고감도라는 것은 큰 장점이다.
- 한국에서 작업할 때의 어려운 점?
= 피사체가 눈치 못 채게 찍어야 한다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어디나 마찬가지라고 하겠지만 그게 아니다. 상대방이 눈치챘을 땐 이미 끝났어야 한다. 들키면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싶어서 빨리 찍는 훈련을 했다. 프레이밍, 노출, 초점을 한번에 순식간에 맞춰서 찍어야 했다. 컴퓨터 센서의 덕(카메라의 자동화)으로 노출과 초점은 자동이 되었고 프레이밍만 하면 되는 시절이 왔다. 난 그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순간적인 사진엔 타고난 소질이 있는 것 같다.
- 혹시 후보정을 하는지?
= 99% 안 한다.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간혹 지면에 실릴 땐 조금 다르다. 지면의 형태에 따라 트리밍을 하는 경우가 있다.
- 전시되고 있는 사진 중, 특별히 기억하고 있는 사진은?
= 월남 파병사진이 애착이 간다. 당시엔 외국 사진가라는 점이 (한국의 보도사진가들보다) 상대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늘 그랬던 것은 아니고 핍박도 받았다. 취재용 필름을 대량으로 들고 있다는 것을 구실삼아 관세법 위반을 적용해 쫓겨나기도 했다. 그런 경험은 난생처음이었다. 어떤 상황에선 카메라만 들고 있어도 경찰이 멈추라고 제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 시절이 저널리스트로서 보람이 가장 컸었다.
내 인생의 대표작 ‘미나마타병 사진들’
- 매그넘이란 사진가 집단이 있다. 그곳에 가입하고 싶었던 적은 없었는가?
=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이 대목에서 그는 잘라 말했다.
“매그넘은 40년대에 생겼고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지나면서 산을 넘었다.”
- 당신의 사진인생에서 대표작은?
= 아무래도 미나마타를 떠나서 말하긴 힘들 것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나는 ‘미나마타의 구와바라’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는 수은중독에 의한 환경재앙이었던 미나마타병을 주제로 집중적인 사진작업을 했고 1962년 일본사진비평가협회 신인상을 받으면서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이름을 발하기 시작했다.
- 유진 스미스의 미나마타와 비교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 잘 알고 있다. 유진 스미스나 구와바라 시세이나 찍은 본인이 스스로 사진에 대해 말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진을 보는 독자나 관객이 판단할 문제다. 나는 유진 스미스의 사진에 대해 나쁘게 말할 생각이 없다. 물론 유진 스미스의 미나마타 작업엔 연출이 개입되었다는 것을 듣고는 있었다. 그러나 뭐 어떠랴? 그의 사진을 보고 나는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사진가는 관객을 감동시킬 사진을 찍어야 한다.
스트로보 사용하는 정도만 손대
- 연출을 하는 편인가?
= 조금은 한다고 봐야지. 스트로보를 사용하는 것 정도.
그는 깐깐하다.
미나마타병을 주제로 구와바라 시세이가 먼저 사진작업을 했고 전시를 열었으며 호평을 받았다. 한참 뒤에 유진 스미스가 같은 곳을 방문해 미나마타사진들을 찍었다. 고통스러운 얼굴을 정교한 조명을 이용해 노골적으로 드러낸 유진 스미스의 사진이 더 강렬했다는 것이 사진을 본 사람들의 일반적인 평이다.
1960년 대학을 막 졸업한 구와바라는 프리랜서 사진가로 활동하면서 미나마타 시립병원쪽의 허가를 얻어 미나마타를 기록하기 시작했고 1962년 첫 개인전 ‘미나마타병’을 열었다. 따라서 당시 그는 직업사진가로서 첫 활동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며 원칙에 따라 사진작업을 했을 것이다. 과도한 연출은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수은중독으로 고통받는 현지 주민들을 먼저 고려한 사진작업을 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유진 스미스가 미나마타를 방문했을 때는 1970년대 초반이며 그는 이미 오래전에 거장의 반열에 올라있었다. 말 그대로 산전수전 다 겪은 유진 스미스는 가장 효과적인 사진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며 빛과 앵글을 고려한 연출에 거침이 없었을 것이다. 유진스미스는 그 이전 작업들로 연출의 의혹을 받은 적이 있었던 사진가였으니 연출사실 자체를 두곤 길게 말할 일이 없다. 이 대목에서 여러 가지 견해가 교차한다. 다만 여기서 제기하는 문제의 핵심은 연출을 해도 되는가, 아닌가 보다는 피해주민들의 정서를 얼마나 고려하고 사진을 찍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연출과 관련된 질문이 나오자 구와바라는 “사진가는 그런 판단을 하지 않는다”고 피해 나갔다. 오히려 “유진 스미스의 사진에서 감동을 받을 수 있다”고 여유있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막상 “본인도 연출을 하는가”라고 물어보니 “스트로보 사용 정도….”라고 날을 세운 것이다. 구와바라 시세이는 포토저널리스트의 정도를 걸어왔다고 할 수 있다.
미나마타, ⓒKuwabara Shisei, 2009
미나마타 ⓒ유진 스미스
- 유명한 사진도 제법 있다. 판매 실적은?
= 별로 안 팔린다.(웃음)
- 생활은 어떻게?
= 고통스러웠다. 다시 태어나면 절대로 사진가는 안될 것이다. 아들이 둘 있는데 그들은 “집엔 아빠가 없었다”라고 회상하고 있다. 그랬다. 그렇게 살았다.
축구로 따지면 전후반 90분 모두 지난 셈
이 대목에서 그는 한국말로 “아이구 죽겠다”라고 신음처럼 내뱉으며 곁에서 통역을 하고 있는 부인의 안색을 살폈다. 얼굴엔 살짝 웃음기가 있었지만 진심 어린 한 마디였다. 그동안 자신의 견해를 밝히지 않고 통역만 해주던 부인이 처음으로 한마디 거들었다.
“이 사람은 그동안 단 한 번도 월급을 받은 적이 없었다.”
구와바라도 얼른 한 마디 덧붙였다.
= 다시 태어나면 봉급생활자가 되고 싶다. 시청이나 구청 같은 곳에서 정년 때까지 편하게 살고 싶다.
- 최근엔 어떤 작업을 하는지?
= 축구경기는 45분씩 2번에 나눠서 한다. 이제 90분이 모두 지났고 루스타임(인저리 타임)인 것 같다. 그동안 한 2골은 넣은 것 같다. 그러나 승부는 모르겠다. 하나 뺏겨도 또 여전히 역전도 가능한 것 같다.
그는 한국말로 “할아버지라서”라며 최근엔 큼직한 테마를 가진 작업은 안 한다고 했다.
찍히는 사람이 ‘싫다’고 하면 안찍어
- 미나마타는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
= 최근에도 간혹 미나마타에 가본 적이 있으나 사람을 찍는 것이 어렵다. 초상권문제 때문이다.
- 1962년 당시 당신의 사진전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었는데?
= (피해보상)재판에 영향을 준 것은 맞다. 재판까진 그랬고 주민들이 고마워했을지도 모르겠다. 의료비혜택도 받았을 것이고 집도 지은 사람이 있더라. 지금도 어느 정도씩 연금을 받기도 하고…. 그러나 지금은 자신들의 삶이 공개되지 않았으면 하더라.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가 강하다.
- 찍히는 사람이 싫다고 하면 사진을 찍지 않는가?
= 찍기 전에 싫다고 하면 안 찍는다. 찍고 난 다음에 싫다고 하면 발표를 하지 않는다. 그게 원칙이고 지킨다.
관객들 사진 촬영에도 기꺼이 응대
- 한국의 사진가들을 알고 있는지?
그는 이 대목에서 한국의 다큐멘터리사진가들 이름을 여럿 거명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 한국도 예술사진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들었다. 다큐멘터리사진이 인정을 못 받는다고 하더라.
인터뷰 중간에 그는 잠깐만 시간을 내달라고 했다. 미술관 바깥으로 나가더니 담배를 하나 꺼내물었다. 전시장을 찾은 관객들이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흔쾌히 포즈를 취해주며 장난스런 얼굴을 보여줬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와 함께 잠시 전시장을 둘러보았고 좋아하는 사진 앞에 서길 권해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구와바라 시세이, 고은미술관, 2009 곽윤섭
2008년에 서울 한미미술관에서 구와바라 시세이의 전시가 열린 적이 있었다. 그 땐 주로 남과 북의 농촌생활에 대한 비교였으므로 이번 고은사진미술관의 전시는 많이 다른 내용이다. 한일회담 반대 데모, 월남 파병 등 대표작과 함께 그를 세상에 첨 알린 미나마타의 사진도 10여 장 볼 수 있다. 다큐멘터리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사진 70여 장이 2개 층을 차지하고 있다.
사진전 구경의 목적만으로 KTX를 타고 2시간 30분이나 달려가는 것이 만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생각하면 부산에서 서울 가는 것보다는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해운대나 광안리에 들러 부산갈매기와 바다를 구경하고 부산의 식도락도 즐기면서 사진전을 보는 코스라면 매력적이지 않을까? 고은사진미술관은 부산 지하철 2호선 해운대역 3번 출구에서 걸어갈 만한 거리에 있다. 미술관의 모든 전시는 무료.
■ 알아둡시다
전시장의 사진 70장이 너무 적다고 생각되는 분들을 위해 사진집을 소개한다. 눈빛출판사가 20주년 기념으로 만든 책으로 구와바라 시세이의 사진 220여 장이 실려있다. 구와바라가 지난 40여 년 동안 한국에서 찍은 사진들 중 핵심적인 것이 총망라되어있으며 사진가의 취재회고록과 함께 사진비평가 김승곤, 이영준의 작가론이 들어있다.
내가 바라본 격동의 한국, 눈빛출판사
■ 구와바라 시세이(1936~)는?
일본 시마네현 츠와노출생으로, 도쿄농업대학과 도쿄사진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수은 중독에 의한 공해병인 ‘미나마타병’을 주제로 한 첫 번째 작업이 일본사진비평가협회가 주는 신인상을 수상(1962)하면서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사진계에 입문하였다. 1964년부터 두 번째 작업으로 한국을 취재 기록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40여 년간 한국을 수십 차례 드나들면서 10만여 컷의 방대한 작업량을 축적하였다. 그가 한국에서 촬영한 사진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분야를 망라하고 있으며, ‘사건 전면에서 벗어나지만 현실의 핵심을 찌르는 영상미학과 표현 스타일’을 시종일관 견지해 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곽윤섭 기자 kwak1027@hani.co.kr

경찰기동대에 쫓기다 하수구에 빠진 학생들, 서울, 1965, ⓒKuwabara Shisei, 2009

열차편으로 포항에서 부산군항으로이동하는 청룡여단 병사들, 1965,
ⓒKuwabara Shisei, 2009

팀스피릿, 이천, 1983, ⓒKuwabara Shisei,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