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콧 윌든이 엮은 <사진과 철학> 서평
절반만 읽고 서평을 쓴다. 광화문에서 책을 산 지 1주일이 넘었는데 450쪽이 넘는 탓도 있지만 완전히 이해하고 넘어가려는 욕심 탓도 있다. 이러다가 서평을 쓸 수가 없을 것 같아 지금 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절반도 채 못 읽었다.
<북코리아>에서 나온 ‘사진과 철학’은 사진과 관련된 열 세 편의 글을 엮어서 만든 책이다. 그중의 한 편을 쓰기도 한 스콧 윌든은 뉴욕 대학교 철학과 방문 교수이며 이 어려운 제목의 책을 엮어냈다. 책을 사기 3일 전에 출판사에 전화해서 보도자료를 이메일로 받아보니 2015년 9월에 한국어 번역본이 나왔으니 한참 되었다. 인천의 <사진공간 배다리>에서 이영욱씨가 이 책으로 강의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책이름을 알게 되었다. 서울이라면 한 번 가볼까 싶은데 평일 저녁 동인천역까지 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켄달 월튼의 ‘투명한 그림’, 신시아 프릴랜드의 ‘사진과 이콘’으로 시작해 5번째 글은 ‘다큐멘터리 권위와 사진 예술’이며 6월 8일 현재 내가 붙들려있는 6번째 글은 로저 스크루턴의 ‘사진과 재현’이다. 이런 책을 재미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좋은 공부가 되고 있다. 딱히 어렵지는 않은데 도움이 되는 부분이 꽤 많다. 스케치는 화가의 믿음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크게 새로운 생각은 아니지만 눈과 시신경의 분리는 신선하다. 투명한 사진과 불투명한 사진의 비교도 읽어볼 만하다.
218쪽을 인용한다.
“만약 a가 b의 원인이라면 b의 존재는 a의 존재를 나타내기에 충분하다. 사진은 회화의 특징인 ‘의도적 비현존’의 특성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상적인 사진은 실재하지 않는 것을 재현할 수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의 사진이라면 사진 찍힌 특정한 사람이 있는 것이다.
물론 옷을 슬쩍 걸친 누드를 찍고 <비너스>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허구적인 활동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한 이것은 비너스의 사진적 재현이 아니라 비너스 재현의 사진이라고 생각되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허구적 재현의 과정은 사진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서 발생한다. 즉 비너스를 재현하는 것은 그 대상이며, 사진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의 시각적 특성을 퍼뜨리는 것 뿐이다......”
통렬한 분석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스콧 윌든은 1970, 80년대에 사진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여러 학자들의 이름을 거명하고 있는데 첫 인물이 롤랑 바르트다. 그러고 보면 ‘투명한 그림’이란 개념도 카메라 루시다에서 롤랑 바르트가 풀어낸 틀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신시아 프릴랜드가 쓴 ‘사진과 이콘’에서 아케이로포이에틱(acheiropoetic) 이미지란 표현이 있다. 예술가의 손으로 만들지 않은 것, 하느님이 제공해준 것이란 뜻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으로 이탈리아 ‘튜린의 수의’가 있다. 십자가에 못 박혔던 예수 그리스도를 무덤에 안장할 때 몸을 감쌌던 수의라는 것인데 천에 예수의 얼굴과 몸의 형체가 고스란히 새겨져있다고 알려졌다. 과학적이다 아니다의 논쟁이 있으나 어찌되었든 간에 튜린의 수의에 새겨진 예수의 이미지는 사람이 그린 것이 아니라는 점이 핵심이다. 아케이로포이에틱 이미지는 사람의 손이 개입하지 않은 것으로 신시아 프릴랜드는 사진과 이콘의 유사성에 주목하고 있다. 회화와 달리 사진은 예술가의 손이 개입하지 않은 상태라는 주장이다. 사진기로 찍었으니 그렇다는 이야기인데 이로써 세상에 존재하는 수백억 장의 사진은 모두 예술이 아닌 그 무엇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이를 피하기 위해 사진에 손을 대는 순간, 그 사진가는 화가가 되어버리니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다.
지금 읽고 있는 ‘사진과 재현’에서 스크루턴은 “사진이 재현적 예술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거 참으로 흥미있는 부분이기도 해서 또박또박 뜯어보느라 시간이 걸리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사진과 철학’이란 책의 ‘반쪽짜리 서평’치곤 나쁜 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몇 달이 걸릴지 모르지만 다 읽고 나면 온전한 서평을 써볼까.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