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겨도 져도 운명의 굴레

곽윤섭 2014. 09. 26
조회수 22269 추천수 0

성한표 사진전 <황소>

치열하고 처절하고 슬프고 덧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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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한표(언론인 전 한겨레 논설주간)씨의 사진전 <황소>이 9월 29일부터 서울 종로구 통의동  <갤러리 메타포>에서 열린다. 10월 15일까지. 갤러리 메타포(gallerymetaphor@gmail.com)는 서울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4번출구에서 국립고궁박물관쪽으로 걸어가다보면 통의파출소 옆에서 바로 찾을 수 있다. 근처에 류가헌과 대림미술관도 있다.
이번 전시는 소싸움을 소재로 삼았는데 “밀리지 않으려고, 처절하게 분투하고 있는, 인간인 우리의 운명”에 감정이입이 된 소의 사진들이 치열하지만 때론 처절하고 슬프고 덧없다. 사진가의 관점과 관객의 관점에 따라 싸우고 있는 소의 벌건 눈에서 윤태호의 만화 <미생>에 나오는 오과장의 눈이 떠오르기도 하고 박성훈의 달마과장이 떠오르기도 하는 것이다. 소는 스스로의 뜻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니 사람과 다를까? 그렇지 않다. 거대한 세상의 톱니바퀴속에서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휘말려 돌아가는 채플린의 <모던타임즈>가 기억나시는가? 우리도 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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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사진 작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작가노트>를 전문 인용한다.  
  
 

(작업노트)  성 한 표
 
                         우리들의 표정도 황소처럼 슬프다
 
    60년 전에 시골을 떠난 나는 소에 대해 기억하는 것이 거의 없다. 소는 다만 인간에게 질 좋은 단백질을 제공해 주는 ‘쇠고기’일 뿐이었다. 밥상에 오른 몇 조각 고깃덩어리에서 옛날에는 익숙했던, 소의 눈빛과 울음소리를 떠올리기는 어려웠다.
    소가 사회적 관심거리로 떠오른 적은 여러 번 있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광우병 파동, 촛불집회가 그렇다. 하지만 쇠고기가 아닌, 살아 있는 소에 대한 관심은 아니었다.
    내가 살아 있는 소를 만나게 된 것은 2013년 가을, 남강의 유등축제를 구경하러 진주에 갔을 때였다. 보고, 듣고 생각한 것을 글로써 ‘설명’하는 기자로 평생을 보낸 내가 글이 아니라, 사진으로 ‘표현’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고, 카메라를 들기 시작한지 3년쯤 되는 때였다. 진주에서는 매주 토요일 황소들이 싸우는 대회가 열린다.
    이즈음 나는 주로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놀이든 일이든) ‘몰두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처음에는 황소들의 싸움도 나의 ‘몰두하는 모습’ 연작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고,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특히 싸움에서 이긴 소와 패한 소의 표정을 잡으려고 애썼다. 이긴 소의 우쭐대는 모습과 패한 소의 처연한 모습을 대비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들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니, 싸움에 져서 등을 돌리고 달아나는 소와 마찬가지로, 이긴 소의 표정에도 슬픔이 묻어 있었다. 소싸움 대회장에 모인 구경꾼들은 황소들이 힘자랑을 하고 싶은 본능을 가지고 있고, 또래의 소를 만나면, 그저 싸우려고 으르렁거린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본 황소들은 스스로 싸우려 하지는 않았다.
    소 주인이 당기는 팽팽한 고삐에 끌려 대회장에 나와 상대 황소와 치고받는 싸움에 들어가지만, 마지못해 싸운다는 몸짓이 역력했다. 이마를 맞대고 힘겨루기를 하는 그 순간에도 그들의 표정은 슬픔을 담고 있었다. 싸우지 않고는 생명을 이어갈 수 없는 황소의 운명이 만들어 낸 슬픈 표정이었다.
    과거에는 소도 농촌 가정의 어엿한 가족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밭갈이, 논갈이라는, 소가 아니면 하기 힘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들은 스무 살이 훌쩍 넘어 일하기가 어려워지면, 그제야 우시장을 거쳐 생애를 마감한다.
    하지만 소가 자신의 일을 가지고, 가족의 일원이었던 것은 이제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밭갈이하는 소가 경운기로 대체되면서, 농민들에게 소는 막대한 사료 값이 들어가는 부담스러운 존재가 된 것이다. 일자리를 경운기에게 빼앗긴 소들은 인간에게 이제 ‘고기’이상의 의미가 없어졌다.
    인간의 입맛은 점점 고급화되고, 오래 살아 질긴 쇠고기보다 부드러운 쇠고기를 찾기 시작하면서, 한편으로는 사료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소들의 생명도 점점 짧아지기 시작했다. 광우병 파동 이후부터는 생후 30개월 미만의 소가 선호되는 세상이 되어, 세 살을 넘겨 살기가 어려워졌다. 대부분의 소들은 이렇게 그들의 짧은 생애를 마감하고 있다. 수소들은 암소처럼 부드러운 육질을 유지하기 위해, 송아지 시절 거세를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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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은 소의 운명에 맞서, 생명을 10년 이상, 20년까지 이어가는 극소수의 소가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기골이 장대하고, 뿔이 날카롭다. 송아지시절에 싸움소로 선택되어, 싸움소로 길러진 황소들이다.
    싸움소들은 소 주인에게 큰 재산이다. 잘 자란 소도 기껏 5-6백만 원에 고기소로 팔리지만, 싸움소는 보통 2-3천만 원, 대회에서 챔피언이 되면, 억대가 넘어간다. 황소가 대회에 나가면, 출연료도 나오지만, 이겼을 경우 상금으로 큰돈을 주인에게 안겨준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기력이 떨어지면, 대회에 출전할 수 있는 기회도 사라지고, 우시장에 끌려나가 단돈 2백만 원에 팔린다.
    나는 싸움장에 나온 황소의 슬픈 표정에서, 이들이 자신의 운명을 감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싸움장에서 치고받으며 싸웠던 ‘맞수’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 자기보다 훨씬 젊고, 팔팔한 상대가 새로 나왔을 때, 자신이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가를 알아채는 것 같았다. 더욱이 이마로 상대의 이마를 받을 때나 받혔을 때, 날카로운 상대의 뿔에 찔렸을 때 이들이 느끼는 고통을 생각하면, 황소의 슬픈 표정과 때로는 싸우지 않으려고 뒷걸음치는 모습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싸우는 황소들을 관찰하면서 나는 인간인 우리들의 삶이 바로 그들의 모습을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들의 상당수는 이렇다 할 일자리가 없이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경쟁력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도 경쟁의 대열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피나는 싸움을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들의 표정도 황소처럼 슬프다. 오늘은 간신히 이겼지만, 언제 더 강한 상대에게 밀려날지 모르는 것이다. 지기만 하는 황소를 처분할 수밖에 없는 주인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지지 않으려고, 밀리지 않으려고, 처절하게 분투하고 있는, 인간인 우리의 운명 역시 황소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내가 황소들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은 이유다.
       


곽윤섭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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