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보다 그저 바라봤다, 사진은 그다음

사진마을 2018. 0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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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사진책/ 헬렌 레빗 <A Way of Seeing>


엘리베이터 없는 오래된 아파helen01.jpg트의 꼭대기층에 있는 헬렌의 집 현관 앞에서 나는 언제나 숨이 턱 끝까지 차있었다. 특히 마지막 층의 계단은 갑자기 더 좁고 가팔라져서 현관문을 두드리기 전 잠깐 서서 몇 차례 숨을 골라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헬렌의 집에 가던 날 역시 그랬다.
 더 이상 헬렌이 없는 헬렌의 아파트에서 그녀의 조카는 나에게 이 책을 건네주었다. 헬렌이 나에게 남겨준 것이었다. 헬렌이 그녀의 책 중 가장 좋아했던 책, 내가 이 걸 갖고 싶어 했는지 헬렌은 어떻게 알았을까.
 짐을 정리하던 헬렌의 조카는 무엇이든 가져가고 싶은 게 있으면 가져가도 좋다고 했다. 헬렌이 있을 때는 항상 단단히 쳐있던 커튼이 걷혀 집안이 환했다. 헬렌의 물건은 거의 그대로 있었지만, 완전히 다른 곳처럼 느껴졌다. 나는 냉장고에 붙어있던 까만 고양이 자석과 빨간 무당벌레 자석 2개, 그리고 그녀가 오트밀을 만들 때 사용하던 나무 주걱을 챙겼다.
 헬렌은 늘 그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 다시 거리로 나가고 싶어 했다. 봄이 오면 근처 비싼 레스토랑에 데려가 주겠노라고 약속까지 단단히 했었다. 봄은 왔지만 헬렌은 훨씬 더 멀리 가버렸다. 더 이상 높은 계단 위 아파트에 갇혀 있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니 섭섭한 마음이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A Way of Seeing>은 헬렌이 1940년대 뉴욕 거리를 누비며 찍은 사진들로 구성되어 있다. 거리의 아이들은 정신없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뛰어다니고 새로운 놀이거리를 찾아 온갖 희한한 형태로 엉겨붙어 골목을 나뒹군다. 어른들은 둘셋씩 모여 이야기를 나누며 자못 진지하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성을 내기도 한다. 헬렌의 사진에는 유독 아이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헬렌이 딱히 아이들을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는 거리에 나가면 항상 아이들이 나와 있었기 때문에 사진에 아이들이 많은 것 뿐이라고 했다. 헬렌은 아이들보다는 동물을 훨씬 더 좋아했다.
 헬렌의 사진을 보면 어떤 것을 어떻게 찍어야겠다고 머릿속에 계산하지 않고 그저 카메라를 들고 열심히 돌아다니며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신나게 카메라에 담은 것처럼 보인다. 어떤 장면이 흥미 있을지 본능적으로 느끼고 망설임 없이 카메라를 들었던 것 같다. 이 사진이 근사한 사진이 될까, 이 순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왜 이 장면을 찍는가에 대한 구차한 생각이 발목을 잡는 일은 없어 보인다.
 그녀의 사진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에 대해서도 헬렌은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했다. 함께 사진을 볼 때 헬렌은 그저 ‘이건 재미있네’, ‘이건 볼 게 별로 없어’, ‘이건 좋다, 저건 모르겠어’ 그게 다였다. 마음에 안드는 사진 앞에서는 조금 곤란해했고 마음에 드는 사진을 보면 사진을 들어 얼굴에 조금 더 가까이 가져가 ‘맘에 드네’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헬렌은 볼 만한 것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생전 처음 보는 듯한 희한하고 멋들어진 것을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주변에서 늘 보는 것들 사이에서 볼 만한 일이 벌어지는 순간, 그것들이 볼 만한 형태를 이루는 순간을 찾아내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다.
 이마저도 나의 추측일 뿐, 헬렌이 이렇다 할 설명을 해준 것은 아니다. 헬렌은 그저 눈앞에 있는 것들을 열심히 바라보helen001.JPG았고 열심히 카메라를 들이댔다. 그렇게 열심히 보며 더 많은 것을 보기 위해 열심히 걸어다닐 수 있었던 시간을 헬렌은 항상 그리워했다. 멋진 사진을 찍는 것보다 사진을 찍는 것 자체를 좋아했고 그리워했다. 어떤 의미를 사진에 담는 것보다 어떤 것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고, 바라보는 것에서 찾을 수 있는 아름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일 년에 한 번 여름이면 헬렌은 그 아파트를 벗어나 뉴욕 근교의 시골집에서 여름을 보내곤 했다. 시골집 창문 밖에는 커다란 나무가 하나 서 있었는데 헬렌은 그 나무를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변덕스러운 시골 날씨 탓에 나무는 몇 시간 사이에 세찬 장대비를 맞기도 하고 뜨거운 햇볕 아래 바짝 마르기도 했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들은 이리저리로 뒤집히며 흔들렸다. 헬렌은 그 나무를 몇 시간이고 앉아서 바라보았다. 바람이 더 거세지면 신이 나서 곁에 있던 나를 불러 저걸 좀 보라고 했다. 그녀는 그런 것들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그런 것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사진은 그 다음이었다. 


이정현(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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