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포늪 사진가 정봉채씨
“한 컷 한 컷 신의 선물”
대학 1학년 때 아버지가 사준 카메라
“평생 사진을 찍겠다”고 다짐
연금 타면 취미로 그칠 것 같아
교사 13년만에 전업의 길로
어머니가 수놓은 단정학이
우연이 아닌 필연의 씨앗
홋카이도로 가 학 찍다가
비에이 풍경 알게 돼 흠뻑 빠져
그러다 문득 아름다움이 뭔지 의문
사진 정체성 고민 이어져
‘마음의 정화’ 화두로
연, 연꽃, 연못, 우포 늪…
10년 찍으니 겨우 하나 깨달아
나를 낮추니 풀잎이 말을 걸어
하루, 한 달, 1년, 10년…
안 보이던 게 보이고 다시 시작
“우포에 가면 늪 인근에 ‘움막’을 짓고 살면서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다더라”는 소문이 있었다. 소문은 일부 사실이었다. 사진가 정봉채(58)씨는 2000년부터 경남 창녕에 있는 우포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2005년까지는 1년 중에 150일 이상을 우포에 머물렀고 2005년부터 2010년까지는 1년 중 300일 이상을 우포에서 보냈다.
이때까진 자동차에서 먹고 잤다. 아침은 김밥으로, 점심은 라면으로, 해가 지고 나면 마을로 가서 국밥 한 그릇을 먹고 다음날 아침식사로 김밥 한줄을 싸갖고 늪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10년 하다가 세 가지 병이 났다. 비탈진 제방에서 대여섯시간 죽치다보니 관절염이 생겼고 늪지대에서 노숙하다 보니 천식과 습진이 따라왔다. 통원치료하면서 “이러다가 큰일 나겠다”싶어서 늪 가까운 세진마을에 빈집을 하나 빌려 수리해서 들어갔다. 주변엔 재실밖에 없고 밤엔 “귀신 우는 소리”가 들려 사람 살 형편이 안 되었지만 차에서 자던 것과 비교하면 감지덕지했다. 그것을 사람들이 움막으로 불렀다.
카메라만 끼고 살다 학사경고
지난 10월 사진가 정봉채는 6년 동안 지내던 우포늪 움막에서 드디어 나왔다. 16년을 찍었으니 이제 우포를 졸업하는 것이 아니라 우포늪이 가까운 이방면 옥천리에 집을 지었고 부산에 있던 식구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하동에서 태어났고 부산에 주소지가 있던 사진가 정봉채씨는 1년 전에 이곳으로 전입신고를 했다. 물론 우포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정씨를 우포주민으로 생각해왔다.
우포는 70만평 규모의 국내 최대 내륙습지이며 1998년에 람사르협약 보존습지로 지정되었고 2011년에 천연보호구역(천연기념물 524호)으로 지정되었다. 480여종의 식물, 62종의 조류, 28종의 어류, 55종의 수서곤충, 12종의 포유류, 7종의 파충류, 5종의 양서류, 5종의 패류가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물창고다. 지난 22일 새로 마련한 집에서 정봉채씨와 만나 사진과 우포 이야기를 들었다.
정씨는 대학교 1학년때 부친이 당시 한 학기 등록금만큼 비싼 렌즈 교환식 카메라를 사준 그날 이후로 “평생 사진을 찍겠다”고 작정했다. 그러나 본업으로 사진가의 길을 걷기까지는 갈 길이 멀었다. 사진클럽에 들어가 1학년 내내 카메라만 끼고 살다가 학사경고를 받아서 2학년 되는 봄 입대했다. 복학 뒤 “졸업은 해야지” 싶어 잠깐 카메라를 멀리했다. 전자공학과를 나와 엘지그룹의 시스템엔지니어가 되었는데 8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1984년에 당시 처음 시행된 고등학교 컴퓨터교사로 뽑혀서 부산 덕명여자상업고등학교(현 부산마케팅고등학교) 선생님이 된 것이다. 교사를 하면서 슬슬 여유가 생기자 사진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학교에서 수업을 하다가도 고개는 늘 창 밖을 향하기 일수였다. “지금쯤은 어딜 가면 빛이 좋은데...”
1997년 교사생활 13년 만에 마침내 관두고 말았다. 이유가 기가 막혔다. 정씨는 “내가 내성적이라 말을 잘 안해. 그러다보니 외국어를 공부하려고 했으나 좀처럼 안되었어. 가만 생각하니 절실하지 않아서 그런거다 싶었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교직 20년을 채우면 연금이 나온다. 나는 사진에 인생을 걸어야하는 사람인데 연금을 받게 되면 사진은 취미에 머물 것이고 편안하게 살게 되면 곤란하다. 그래서...”
당시 결혼을 한 상태였고 애들에게도 돈이 들어갈 시점이었는데 참 아무 생각이 없었다고 정씨는 회상했다. 다행히도 아들이 고등학교 중퇴 상태에서 대학을 포기하는 바람에 돈 들어갈 일이 줄었다. 정씨는 “농담이 아니고 당시엔 아들이 효자였다. 지금 아들은 대학 나온 거보다 훨씬 잘 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왜 우포로 왔는가? 고향도 아니고 큰 인연도 없다고 들었다.
“취미로 사진 찍을 때 우포를 몇 번 오긴 했지만 작정하고 온 것은 2000년이다. 왜 왔느냐고? 우연이 아니다. 내가 어렸을 때 처음 눈을 뜨고 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머니께서 정갈하신 분이어서 수를 놓아 햇댓보(벽에 걸어놓은 옷걸이를 덮는 보자기)를 걸어두었는데 거기에 단정학이 있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맹세했다. 내가 사진가가 되면 학을 찍으리라. 교사시절 방학 때 단정학을 찾아 훗카이도로 갔다. 450마리 정도가 있었다. 영하 30도에 카메라가 작동하지 않아 눈으로만 보고 왔고 다음해에 찍었다. 그러다 마에다 신조가 찍은 비에이를 알게 되었다. 하루에 100만원을 내고 사진가이드를 모셔서 비에이를 훑기를 세차례나 했다. 비에이가 내 손바닥처럼 여겨질 무렵 깨닫게 된 것이 있었다. 내가 너무 아름다운 사진만 찍고 있더라”
"나를 낮추니 풀잎이 말을 걸어와“
정씨는 그 때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사유를 하게 되었다고 했다. 생각이 깊어졌다. 아름다움과 추함에 경계가 없다. 아름다움이란 것은 사건이 될 수 없다. 사진은 사건을 보여주는 것이어야 하는데 마에다 신조가 다 찍어둔 아름다운 비에이를 또 찍는다고 새로운 사건이 될 수가 있겠는가 싶었다는 것이다. 고민이 사진의 정체성으로 이어졌다. 정씨는 “내가 사진을 좋아해서 사진을 하는 것으로는 명분이 불충분할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결국 마음의 정화라는 지점에 도달했다. 본인이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것, 동시에 그 정화의 기운이 세상으로 퍼져나갈 수 있다면 본인의 구도를 달성하고 동시에 사회적 소통으로 연결된다는 결론을 찾고 정화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정화하는 식물을 찾으니 연, 연꽃이 나왔다. 그리곤 연못을 찾기 시작했다. 경산, 청도, 부산 철마에도 연못이 많다. 그 무렵 텔레비전 다큐멘터리프로그램에 2,000년 된 연씨를 개화시킨 사례가 나오기도 했다. 가시연이 많다고 해서 우포에 왔다. 가시연, 물옥잠 등이 정화작용을 엄청나게 한다. 큰물이 지면 늪이 뻘겋게 되는데 우포는 곧장 맑아지더라. 마침내 본인의 사진 테마를 발견한 정씨는 2000년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아 “10년 찍어보리라” 마음 먹고 우포를 찍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2010년에 10년이 되었을 것인데 왜 더 찍고 있는가? 우포는 언제까지 찍을 것인가?
“10년이 넘을 무렵에 겨우 하나 깨닫게 된 것이 있다. 바라보기의 문제였다. 자기 중심으로투시형으로 바라보면 항상 내가 크고 상대방이 작아진다. 이걸 바꿔야 한다. 내가 작으면 상대가 커진다. 내가 겸손해져야 상대가 보인다. 우포의 나무 한그루, 곤충 하나를 보더라도 그의 존재를 인정해야 보인다. 10년 동안 잠자는 시간 빼고 하루 최소 8시간씩 우포를 바라보니 여기 있는 풀잎 하나가 반짝거리며 나에게 말을 걸더라. 내가 그 얘들과 친구신청을 했더니 풀잎이 ‘좋아요’를 눌러준 격이다.”
우포늪 홍보대사 되고 세계시장으로
-그게 말이 그럴뿐 사진으로 연결이 될까?
“곽기자는 오늘 여기 처음이라고 했다. 내일 한 번 더오면 더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달 동안 지내면 더 볼 것이다. 그게 1년이 되고 10년이 되면 안보이는 것이 보이게 된다는 뜻이다. 정화의 문제는 들여다보기의 문제이다. 사진에서 내가 반영을 많이 찍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10년이 지나고 나니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그냥 나는 우포에서 산다. 다른데 간다면 또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니 그냥 여기 있으려고”
-외국 사진시장에 자주 나간다고 들었다. 어떤 활동을 해왔는가?
“2008년 람사총회가 열렸을 때 (내가 날마다 이곳에서 사진을 찍으니) 이 동네 주민들의 추천으로 홍보대사가 되었다. 우포에서 자리를 잡은 이후로는 우포 사진만 발표하고 있다. 2009년부터는 아트파리, 비엔나페어 등 세계 사진시장에 연간 5회씩은 나가고 있다. 올해엔 세계에서 가장 대규모 예술시장인 스위스바젤에 갔다. 100호짜리 작품 석 점을 한 점당 1500만원씩에 팔았다. 당연히 » 정봉채씨가 우포늪 소벌 '비밀의 정원'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우포사진이다. 내가 해외로 나가는 것은 판매도 되지만 공부도 되기 때문이고 또 전세계 미술관의 디렉터들이 사진시장에 오니 그들과 교류하기 위해서다. 그들의 안목에 들어야 세계적으로 알려질 수 있다. 우포를 알리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지금 세계 예술시장에선 사진이 대세다”
-우포엔 삵, 수달, 고라니 같은 동물도 있는데 그런 사진을 발표하지 않는 이유는?
“당연히 찍어둔 것이 있으나 페이스북에만 올릴 뿐이고 나의 작품으론 발표할 생각이 지금으로선 없다. 나는 예술사진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내가 사진에 손을 댄다는 것이 아니다. 생태다큐멘터리로 찍지만 예술적으로 승화시켜야한다. 동물 사진은 현장성이 더 짙어져서 힘들 것 같다. 그래서 새도 주로 패닝을 하고 크게 찍지 않는다. 너무 쉽게 드러나는 사진이 싫다는 뜻이다”
인터뷰를 마칠 무렵 정씨는 이렇게 말했다. “밤에 귀신 우는 소리는 알고 보니 호랑지빠귀의 울음소리였다. 나는 달빛이 있는 밤에도 사진을 찍는다. 동물들이 다니는 소리도 들리지만 땅 밑에서 나는 물줄기 소리도 들린다. 어떤 날은 나무가 움직이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만약 내가 좋은 사진을 찍게 된다면 나는 그것을 신의 선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불쌍하게 열심히 찍고 있는 나를 어여쁘게 생각한 신이 주는 선물....”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사진 정봉채 사진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