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호 사진전 '인더시티' 갤러리브레송에서
» 인더시티, 김문호
김문호의 사진전 ‘인더시티’가 21일부터 30일까지 갤러리브레송에서 열리고 있다. 이 전시는 갤러리브레송의 기획전 ‘사진인들 찾아서 11’ 김문호론에 해당하는 전시다. 2009년 온더로드, 2013년의 섀도, 2015년의 웨이스트랜드에 이어 미발표신작인 인더시티까지 총망라되어있다.
‘온더로드’는 미국 비트세대의 선두주자였던 잭 케루악이 쓴 같은 이름의 소설을 떠올리게 한다. 사진가 김문호씨가 지난해인가 페이스북에서 소설 온더로드를 다시 읽고 있다고 썼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굳어졌다. 호기롭게 서점에서 1, 2권으로 된 온더로드를 샀으나 1권의 절반 정도를 읽다가 멈춘 채 지금도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못 가고 있다. 소설가 김연수가 한 포털사이트에서 ‘책을 읽고’라는 코너를 통해 온더로드를 읽은 소감을 쓴 글을 찾아봤다. 모르는 단어나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을 만나더라도 훌쩍 건너갔다고 했다. 그랬어야 했던 모양이다. 잭 케루악이 젊은 시절 미국 서부와 멕시코를 도보여행했던 것을 바탕으로 3주 만에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마약에 취한 상태로 ‘질주하듯’ 소설 온더로드를 썼던 것처럼, 김연수가 질주하듯 그 소설을 (그것도 영문으로 된 소설을) 읽었던 것처럼 했어야 하는 모양인데 또박또박 읽으려다 실패하고 말았다. 50살이 넘어서 그런 모양이다. 잭 케루악이란 이름은 로버트 프랭크의 걸작 사진집 ‘미국인들‘(The Americans)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잭 케루악이 서문을 썼기 때문이다.
» 온더로드, 김문호
그러므로 사진가 김문호의 ‘온더로드’를 이해 또는 감상하기 위해서는 질풍노도의 청춘을 이해하는 것을 전제되어야 한다. 비트세대와 잭 케루악과 케루악의 소설 온더로드와 로버트 프랭크의 ‘미국인들’은 두루두루 연결된다. 방황하고 뒤척거리고 불투명한 젊은 시절은 2016년 대한민국의 어수선한 정국과도 연결된다. 우리는 ‘길 위에서’ 멈추지 말고 달려가야 하는 것이다. 스위스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건너온 로버트 프랭크가 중고자동차로 미국을 횡단하면서 ‘미국인들’을 찍다가 수시로 경찰의 검문에 잡혀 추방을 당하면서도 질주했듯, 질주하다가 중고차 안에서 불편한 잠을 청하고 또 다음날 길을 떠나듯 우리는 여정을 중단하여서는 안 된다.
» 섀도, 김문호
2013년 발표한 섀도(Shadow)에서 김문호는 온더로드와 궤를 같이하지만 외형상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비틀거리고 휘청거리고 불길한 기운들이 도시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서로 다른 곳에서 찍은 여러 장의 사진을 통해 전체의 기운을 이야기한다면 각각의 이미지는 연결성이 없어도 좋다. 사진 A와 사진 B는 전혀 다른 내용을 담고 있지만 이 사진들은 내용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분위기로 소리치는 것이다.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가 김문호 본인의 이야길 하는 것이다. 시인이 남의 언어로 시를 쓰면 어색하기 짝이 없다. 본인이 체험하여 체화된 언어를 쓰기 위해 애를 쓰듯 사진가들도 자신의 언어로 말하여야 한다. 따라서 섀도에 찍혀있는 사람이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많든 적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은 김문호 자신이 투사된 상태다. 이제 사진을 읽기가 조금 편해진다.
» 웨이스트랜드, 김문호
지난해에 발표한 ‘웨이스트랜드’는 제목에 내용이 들어있다. 버려진 것, 버려진 곳, 버리고 온 곳에 관한 감정이입이다. 전작 온더로드나 섀도와 달리 도시에서 벗어났다. 집시와 프라하의 봄으로 널리 알려진 체코 출신 사진가 요셉 쿠델카의 사진집 ‘블랙 트라이앵글’이 떠오른다. 프라하의 봄을 찍었다가 나라에서 추방된 요셉 쿠델카는 1987년에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하여 1990년에 고국 체코를 방문할 수 있게 된다. 이후 4년간 체코의 버려진 땅을 파노라마로 찍은 사진집이 바로 ‘블랙 트라이앵글’이다. 강렬했던 집시 사진의 이미지를 기

억하고 있다가 넘겨본 ‘블랙 트라이앵글’은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한동안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황폐한 공간들이었다. 쿠델카가 왜 변신을 했는지 고민했었는데 김문호의 ‘웨이스트랜드’를 보면서 공감할 지점을 찾았다.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변신이 아니었다.
최근작이자 아직 미발표작인 ‘인더시티’도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사진의 무대는 다시 도시로 돌아온 모양이다. 전시장에 가서 확인해야겠지만 내가 보고 있는 석 장의 사진은 연결성이 없어 보인다. 당연히 나머지 사진들을 봐야 전체 윤곽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니 더 이상 쓸 수가 없다. 다만 이런 점은 말할 수 있다. ‘인더시티’는 ‘온더로드’와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길 위에 섰음을 알 수 있다. 더 걸어갈 것이다.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