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은 추억이 되고 문화·역사가 되는 흔적

곽윤섭 2010. 07. 08
조회수 9502 추천수 0
[미션 강의실 시즌2] <18강> 흔적
모든 사진은 기록일뿐 순수 사진은 없어 
시대와 삶의 풍경이 멈춰 그때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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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기록입니다” 누가  이 말을 했을까요?  아마도 사진이 공인된 이래로 170여 년 동안 수많은 작가, 평론가 등 사진과 관련된 쪽의 사람들이 반복해서 이 말을 했을 것입니다. 비교적 최근에 육성으로 들었던 것은 지난해 부산 고은사진미술관에서 만났던 일본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의 입을 통해서였습니다.
 
청계천사진과 북한사진, 그리고 1960년대의 격동하는 한국을 담은 사진으로 유명한 구와바라는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정확한 한국어로 “사진은 기록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다큐멘터리사진가이니 당연하지 않겠느냐고요?
 
 
“스타일과 시각의 차이만 있을 뿐”
 
50년 가까이 사진을 강의하고 있는 당대 최고의 사진 교육가인 필립 퍼키스는 그의 명저 ‘사진강의 노트’에 이렇게 썼습니다.
 
“사진교육이 안고 있는 가장 불쾌한 추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록(Documentary)사진’과 ‘순수예술(Fine Art)‘사진을 따로 갈라서 구역을 정해놓은 것이다. 모든 사진은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있으며, 모든 사진은 사진가가 결정을 내린 순간 찍혀지기 때문에 얼마간 사진가의 의도가 ‘표현된’ 것이다.” 그는 또한 이렇게 말했습니다.
 
“‘순수사진(Straight Photography)’에 대한 신화는 사진역사에서 가장 잘못된 생각 가운데 하나다. 결코 ‘순수’ 사진이라고 불릴 만한 사진은 한 장도 없다.……(중략) 에드워드 웨스턴의 사진을 보고 나서 그가 수 년 동안 촬영했던 캘리포니아의 포인트 로보스를 가 본다면 그의 사진이 얼마나 지나친 카메라 조작과 인화로 이루어진 것인지 당장 알 것이다. 웨스턴의 사진이 훌륭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웨스턴 역시 그가 궤멸시키려고 했던 회화주의자들만큼이나 사진을 조작했다는 사실을 지적할 뿐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진에는 스타일과 시각의 차이만 있을 뿐이며, 누가 더 순수하고, 누가 더 회화적인가 하는 논란은 한마디로 편협한 수작에 불과하다”
 
위에서 원로사진가들의 이야기를 예로 든 것은 사진의 조작에 대한 논란을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모든 사진은 기본적으로 기록의 속성이 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그 시공간이 기록됩니다. 그리고 멈춰버립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서울 남대문의 옛모습은 사진 속에선 언제든지 다시 볼 수 있습니다. 김기찬이 찍었던 1970~1980년대 서울의 골목길은 이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중림동, 도화동, 만리동엔 아파트가 즐비합니다. 그러나 그의 사진집에선 골목뿐 아니라 그 시절의 사람들과 강아지까지 모두 생생하게 등장합니다. 아이들은 세숫대야에 들어앉아 물놀이를 즐깁니다.
 
6.25전쟁이 막 끝난 무렵부터 현재까지 부산을 기록하고 있는 최민식의 사진집엔 피난민들이 즐비하던 임시수도 부산의 모습들이 남아있습니다. 20세기 초, 프랑스 파리엔 걸출한 사진가들이 넘쳐났습니다. 앗제, 케르테츠, 브레송, 카파, 윌리 호니스, 드와노, 부바 등이 저마다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 파리의 거리와 사람들은 사진집 속에 그리고 전 세계 카페의 벽에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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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지워버리는 도시와 모시는 도시

 
한국은 유례없이 급속도로 디지털카메라가 빨리 보급된 나라입니다. DSLR 보급률도 세계에서 손꼽을 정도이며 최근엔 미러리스가 서서히 시장점유율을 높이고 있습니다. 덕분에 최근 10년 사이에 사진을 시작한 사람들이 많이 등장했습니다. 그럼 지금 사진을 시작한 사람들은 뭘 찍고 있으며 뭘 찍을 수 있을까요? 
 
6.25전쟁 이후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20세기 후반 서울의 모습도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과거 새마을운동의 여파로 초가집이 전멸하다시피 사라져버렸던 적이 있습니다. 최근엔 전국의 강과 강 주변이 순식간에 제모습을 감추고 있습니다. 물론 세월의 흐름은 사람이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의 변화 앞에서 인간과 인간이 만든 문명은 나약하기 짝이 없어서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변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먼저 나서서 변화를 주도하는 것과 자연의 큰 흐름에 따라 모습이 서서히 바뀌는 것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건국역사가 짧은 미국에선 50년, 100년만 된 물건이나 건물도 문화재급으로 모십니다. 유럽은 자존심 있는 대륙입니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하루 버스여행을 했는데 시내 곳곳에 기원전에 세워진 건물과 그 흔적이 산재해있었습니다. 그곳의 사람들에겐 일상적인 주변인데 이탈리아를 찾는 외국인들에겐 모두 관광의 대상이 되는 셈이었습니다.
 
 
모내기 다듬잇돌 돌계단 노동당사…
 
설명이 길었습니다. 이번 테마는 흔적입니다. 그 대상이 건물이나 거리의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오래 전에 지어진 건물이나 형성된 거리의 흔적이 아직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때 기록해두면 그것은 바로 역사가 됩니다. 천년고도 경주에는 건물은 없이 터만 남은 사찰이 곳곳에 있습니다. 역시 세월의 흔적입니다.
 
시장이나 버스터미널의 풍경이 될 수도 있습니다. 터미널건물이 신식으로 바뀌고 사람들의 옷차림과 머리모양도 바뀌었지만 여전히 과거의 모습과 행동은 조금씩 남아있습니다. 지금은 대부분 기계로 모내기를 합니다. 아직 일부 지역에선 손으로 모를 심습니다. 과거 노동집약적 농사법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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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흔적은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민속박물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오래된 다듬잇돌과 방망이엔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합니다. 덕수궁, 경복궁에 가면 돌로 된 계단과 난간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로 걸어다닌 곳은 패여 있고 닳아 있습니다. 튼튼해 보이는 돌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합니다.
 
철원의 노동당사에는 전쟁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건물벽에 있는 총탄의 구멍이 눈에 들어옵니다. 올해는 6.25전쟁이 발발 한지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올해 초 강용석교수의 전시를 시작으로 여러 전시장에서 전쟁의 흔적과 상처를 상기시키는 사진전시가 많이 열리고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격전이 벌어졌던 태평양의 여러 섬나라엔 당시에 사용되던 전쟁무기들이 녹이 쓴 채 그 당시 그 자리를 여전히 지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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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쓴 편지에는 마음의 풍경 고스란히

 
계절의 흔적을 찾아볼 수도 있습니다. 올해 봄은 유난히 짧았습니다. 늦은 봄까지 눈발이 휘날리더니 갑작스럽게 더워져서 봄을 느낄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꽃은 피고 새싹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짧으나마 봄의 흔적을 볼 수 있었습니다. 4월에도 높은 산에 올라가면 응달쪽에 눈이 쌓여있는 곳을 볼 수 있습니다. 겨울의 흔적입니다.
 
노동의 흔적도 좋은 소재이자 테마가 됩니다. 잘 만든 유기그릇을 보면 장인의 정신이 느껴집니다. 경북 안동에선 그 지방에서 생산된 대마로 동네의 아낙네들이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만 직접 직조해서 삼베를 만듭니다. 이것이 안동포입니다. 손작업을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13새의 경우 한 명의 장인이 1년에 만들 수 있는 수량은  고작 네 벌밖에 안된다고 합니다. 껍질을 벗겨낸 삼을 머리카락처럼 가늘게 째고 맨 허벅지에 올려놓은 채 한 올, 한 올 잇는 공정을 지켜본 뒤, 매장에서 안동포로 만든 완성품을 보니 노동의 흔적이 절절히 떠올랐습니다.
 
집배원들의 이야길 들어보면 요즘은 손글씨로 쓴 편지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간혹 군대 간 남자친구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을 뿐이랍니다. 그래서 손글씨 편지가 있으면 주소지가 정확지 않아도 발품을 팔아서 반드시 배달해주는 것이 집배원들의 불문율이라고 합니다. 저도 얼마 전에 손으로 쓴 쪽지를 받았습니다. 거스름돈 5천 원을 미처 돌려주지 못했던 서울시사회 복지협회 담당자가 5천 원을 봉투에 담아 보내면서 사과의 뜻을 전달했습니다. 요즘 사람들 같지 않은 깊은 마음씀씀이의 흔적이 고스란히 눈에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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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윤섭기자 kwak1027@hani.co.kr
 
 
◈ 금주의  미션 ㅣ 흔적을 찍어라
 
모든 사진은 기록이며 다큐멘터리입니다. 여러분들이 흔적을 찍는 작업이 곧 다큐멘터리작업입니다. 세월의 흔적, 노동의 흔적, 계절의 흔적 등을 찍어봅시다. 누렇게 변색이 생긴 흑백사진, 눈밭 위의 발자국, 냉장고에서 발견된 한 잎 베어 문 사과, 주머니에서 떨어진 카드영수증 등이 모두 무엇인가의 흔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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