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빈 개인전 '또 하나의 경계'
30년간 동해 철조망과 일상 촬영
» 1998, 속초
엄상빈 사진전 ‘또 하나의 경계-분단시대의 동해안 1986-2016’이 14일부터 스페이스22에서 열린다. 5월 2일까지. 전시 개막 및 출판기념회가 14일 오후 6시에 전시장에서 열린다. 전시 문의는 스페이스22(02-3469-0822)
전시 제목에 그대로 들어있는 것처럼 이번 사진전의 내용은 동해안에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본 적이 있는 해안의 철조망 등 군 시설물과 그 지역 사람들의 모습을 가감 없이 담아낸 사진들로 구성되어 있다. 사진가 엄상빈은 그동안 ‘아바이마을 사람들’, ‘학교이야기’, ‘창신동 이야기’ 등의 사진작업을 통해 분단, 학교 현장, 민중의 삶 등을 발표해왔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 때 강원도 땅을 처음 밟았고 설악산과 더불어 강원도 동해안도 처음 구경했다. 그때 » <또 하나의 경계> 표지 생경하게 다가왔던 철조망을 아직 잊을 수 없다. 그 후 기자가 되고 여러 차례 철조망과 조우하게 되었는데 보면 볼수록 무신경해졌다. 나중엔 “동해안에 가면 철조망은 원래 있는 것”이라고까지 생각이 되었고 간혹 철조망이 없는 바닷가를 보면 허전하기도 했다. 이것을 사진으로 찍어서 전시를 하거나 사진집을 만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 엄상빈 작가의 전시소식을 접하니 탄성이 절로 나오면서 동시에 지루함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싶어 유심히 사진을 살펴봤다. 철조망 1, 철조망 2, 해가 뜬 날의 철조망, 눈이 오는 날의 철조망, 밤의 철조망……. 이런 식이면 곤란하다고 미리 선을 그었다.
기우였다. 철조망이 세워진 동해안에도 사람이 사는 마을이 있고 군부대도 있다. 그러므로 민간인도 있고 군인도 있으며 현지에 사는 사람이 아닌 피서객도 있었다. 오징어도 있고 기타맨도 있었다. 이로써 철조망 사진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 명확해졌고 눈으로 보는 재미도 가미했다. 1986년부터 30년간 고성, 속초, 양양 등지에서 찍은 이 철조망들과 그 인근의 풍경은 분단의 흔적이 아니라 분단의 상처 그 자체이며 현재진행형이다. 엄상빈 작가는 이 사진을 찍으면서 과거의 기록이 되길 희망했을지도 모르겠다. 해안을 따라 상업지역이 생기면서 철조망을 걷어낸 곳이 늘어났으나 여전히 철조망은 동해안의 상징물로 유력하게 남아있다. 철조망이 필요한지, 필요하지 않은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 1986, 속초
» 1986, 속초
» 1987
» 1990, 양양
» 1997, 속초
» 2001, 양양
» 2008, 속초
» 2016, 양양
존 자코우스키의 명저 <사진가의 눈>은 사진을 좀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훑고라도 지나가야할 필독서다. 물론 이 책 안보고도 사진 잘 찍는 사람이 있으니 이 책을 보지 않았다고 해도 자책하거나 딴청을 피울 일은 없다. 어쨌든 이 책은 사진의 다섯 가지 속성 혹은 본질에 대해 짚고 있다.
1. The thing itself » 존 자코우스키, <사진가의 눈>
2. The detail
3. The frame
4. Time
5. Vantage point
엄상빈 작가의 ‘또 하나의 경계-분단시대의 동해안 1986-2016’을 보면서 위 다섯 가지 본질적 관점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첫 번째는 우리말로 ‘사물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사물이 아닐 수도 있으니 ‘대상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철조망과 철조망 주변의 사람, 오징어, 바닷가는 그때 그 자리에 분명히 존재했던 것이다. 당연히 사진만이 가지는 힘이자 역사성이다. 기록이다. 두 번째는 세부묘사라고 옮길 수 있다. 철조망과 그 주변에 있는 것들을 잘 살펴보라. 왜 한 장의 철조망 사진으로 모든 이야길 다 할 수 없는지 이해할 것이다. 만약 철조망 1, 철조망 2, 철조망 3…. 식의 대동소이 반복해서 나열하는 유형학이었다면 힘도 없고 내용도 제한적이 되었을 것이다. 세 번째는 프레임이다. 특정한 크기의 네모 안에 대상을 가두었다. 이거 가장 힘들다. 힘들기도 하고 사진가마다 차이를 보인다. 어디서 어디까지 포함할 것인가에 따라 왜곡이 발생할 수 있고 오역이나 오독을 불러올 수도 있으나 사진은 전체가 아니라 부분이란 점에서 프레임의 속성은 벗어날 수가 없다. 아마추어의 사진을 보면 이 대목에서 많이들 무너진다. 엄상빈의 사진을 보면서 저 사진의 오른쪽 모서리 바깥에는 뭐가 있었을지를 상상해보라. 큰 공부가 된다. 네 번째는 시간이다. 셔터를 눌렀던 1986년 어느 날 그 시간대에 존재했던 장면이 사진 속에서 얼어붙어 있다는 이 놀라운 매력이 사진만이 가지는 특성이다. 느린 셔터는 느린 만큼 빠른 셔터는 빠른 만큼의 시간을 사진에 부여한다. 우리는 한 장의 사진 앞에서 125분의 1초라는 시간을 정지상태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금 더 다양하게 찍었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그건 사진가의 선택이고 존중한다. 다섯 번째는 관점이다. 이 대목에서 가장 큰 아쉬움을 느낀다. 엄상빈 작가만의 관점이, 혹은 이 ‘하나의 경계’ 사진들에 들어있는 관점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 그냥 평범한, 동해안에 처음 구경온 관광객의 관점에서 본 철조망처럼 보이는 사진이 꽤 된다. 어떻게 피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강조할 것인가는 본인의 몫이다.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