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전공학생 개별 사진 분석-1
사진전공자들의 어깨가 무겁다. 스마트폰 카메라의 성능이 날로 좋아지고 있어서 사람들이 수시로 사진을 찍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거의 대부분은 자신이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에 대해 별로 자신감이 없거나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진) 전문가의 입장에서 보면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이 큰 카메라로 찍은 사진과 다를 바가 없는 경우가 별로 놀랍지 않다. 사진전공자들의 어깨가 무겁다고 한 것은 날이 갈수록, 생각할수록 일반인들과 전공자들의 사진에서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차이는 실력의 차이, 관점의 차이, 깊이의 차이쯤 될 것인데 그 어느 접점에선가 전공자들의 설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백제예술대학교 사진과, 상명대학교 사진영상미디어학과, 중부대학교 사진영상학과의 졸업작품을 받았고 지난 기사를 통해 전반적인 분석을 했다. 이제부터 28명 전원의 사진을 한 명씩 리뷰한다. 이 리뷰의 목적은 일반인들과 전공자 모두를 위한 것이다. 일반인들은 전공자들에게 배울 것이 있으며(있어야 하며) 전공자들은 일반인들에게 알려질 필요가 있고 또 일반인들을 의식할 필요도 있기 때문이다.
학교 이름과 학생 이름 모두 가나다순으로 시작하여 백제예술대학교의 남보현이 처음이다.
남보현의 <홍대>는 홍대 앞 거리와 사람들을 찍은 사진이다. 짤막한 작가노트를 통해 그는 “홍대를 촬영한 이유는 많은 사람들을 그 한 곳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는데 동시에 그는 “가장 큰 어려움은 홍대의 많은 사람들이 카메라에 담긴다는 것”이라고 했다. 모순 같은 말이지만 사진을 보니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거리 사진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홍대 앞은 식당, 카페, 화장품가게, 포장마차, 각종 입간판 등이 무계획적으로 널려있는데다가 사람들도 복잡하게 왕래하고 있다. 거리사진에서 중요한 두 가지인 사람과 배경이 모두 어지럽다. 그러므로 남보현이 노렸던 특정한 대상이었던 버스킹을 하는 사람, 연인들, 그림을 그리는 학생들만 고스란히 담아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어려움을 감안하더라도 원래 노리던 대상을 별로 건져내지 못했다. 작가노트와 달리 삭막한 공간으로서의 홍대 앞은 잘 묘사가 된 것 같다. 사람들이 서로 분리되어 있고 입간판과 사람이 분리되어 있으며 입간판 광고 모델과 사람이 분리되었음을 역설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정교할 필요가 있다.
» 남보현 <홍대>
박승범은 <서울역>을 졸업작품으로 냈다. 이 대목에서 작가의 작가노트와 사진이 반드시 일치해야 하는지 생각해봤다. 왜냐하면 남보현에 이어 박승범도 그가 글에서 논하는 주장과 사진의 메시지가 따로 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작가노트를 잠깐 물리고 사진만 먼저 봤다. 1번 사진엔 독립운동가 강우규 의사의 동상과 시민과 서울역 고가 난간벽화가 보인다. 2번엔 부채춤 공연 그림이 그려진 걸개그림과 외국인 관광객 남녀가 보인다. 3번엔 상업용 입간판과 캐리어를 끄는 남자가 있다. 배경으로 거리에 놓인 매대가 있다. 4번엔 특정 대형 매장의 상호가 있는 외벽, 상업용 간판, 특정 브랜드가 보이는 신발을 신고 통화중인 여자가 있다. 5번은 선교를 위한 천막과 천막에 속하는지 100% 단정할 수는 없는 재킷 남자가 있고 오른쪽엔 노숙자로 보이는 시민이 있다. 종합하면 서울역 앞에 역사적 기념물, 시민, 자본주의, 일상, 종교, 도시빈민이 있다. 다섯 장의 사진을 한꺼번에 보고 내용을 말한다면 “서울역은 다양한 것이 혼재된 공간이다”라고 읽을 수 있다. 이제 박승범의 글을 읽으니 “서울역은 자본주의 현대인과 자본주의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공존하는 곳”이라고 요약할 수 있었다. 서울역은 서울의 관문일뿐만 아니라 서울의 랜드마크이고 역사적 공간이기도 하다. 현재 보여주고 있는 사진의 내용과 박승범이 찍고 싶었던 것의 차이가 크다. 1번의 남자를 노숙인이라고 하더라도 전체 5장에서 노숙인은 둘밖에 없다. 확대 해석하여 시민들도 자본에서 소외된 존재라고 하더라도 어색하다. 1번 사진에서 강우규 동상과 시민(노숙인)의 대비는 엉뚱하다. 동상의 실재 인물이 특정 강우규 의사가 아니라고 한다면 좀 다르다. 상징물 덩어리와 하루를 힘들게 사는 노숙인의 대비라면 자본주의과 그에서 소외된 자의 대비라고 읽을 수 있겠으나 억지스럽다. 왜냐하면 2번 사진의 외국인 관광객과 한국 전통춤을 보여주는 현수막 광고는 자본과 소외라고 보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확대해석 정도가 아니라 전유 혹은 저항적 해독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 사진들에서 자본과 소외를 끌어낼 수가 없다. 다만 1번에서 보이듯 동상과 시민과 고가벽화 속 사람의 다리를 위트 있게 비교했다는 정도, 5번에서 힘겨운 노숙자와 재킷 입은 남자와의 비교를 통한 풍자 정도에서 박승범의 재치는 인정할 수 있지만 더 이상의 의미부여는 무리다.
» 박승범 <서울역>
기껏 두 명의 사진을 봤을 뿐이지만 사진으로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것이 만만치 않은 작업이라는 느낌이 확 전해졌다.
박지환의 <경기도 평택시 미군기지촌>은 제목을 그대로 반영한 사진들이었다. 이태원, 동두천, 평택 등 미군기지가 들어선 곳의 변화를 말하고 있고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뭘 어쨌다는 거냐고 반문하자는 것이 아니다. 사진으로 선동하거나 주장하거나 단언할 필요는 굳이 없다. 그냥 보여주기만 해도 가치가 있는 것이 사진이다. 박지환은 미군기지로 인해 생긴 이질적인 공간을 이질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1. 삐딱하게 찍거나 어수선하게 찍었으며 2. 플래시를 터뜨렸다.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전달이 된 것 같다. 그런데 시각적으로 호소하는 재미가 없다. 미군기지, 군사문화, 개발과 파괴, 환경, 디아스포라 등 큰 흐름의 사회적 맥락을 사진전공자들이 다루는 것은 지난번 기사에서도 말한 것처럼 학구적인 태도이긴 하지만 그렇게 호소력이 강하지 못하다. 누군가는 분명히 다루어야 할 문제이긴 하지만 아주 긴 호흡으로 작업해야 할 주제들이란 말이다. <평택시 미군기지촌>은 너무 큰 주제라 대학생이 졸업작품으로 내기엔 벅차다. 그러다 보니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알겠는데 겉핥기에 그치고 말았다. 박지환이 하고 싶었던 주장 “박혀있던 돌은 오히려 굴러들어온 돌에 맞게 자신의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굴러들어온 돌에 맞춰 생활하고 있다”를 사진으로 보여주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했을 것이다.
» 박지환 <경기도 평택시 미군기지촌>
신한슬의 <유커>는 비교적 새로운 테마다. 지난 10년 사이에 한국을 찾는 중국 관광객의 숫자는 폭증했다. 신한슬은 “2016년 현재, 유커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일까 반문해 본다”라고 했다. 문제 제기가 명쾌하다. 역시 사진으로 “유커는 어떠하다”라고 단정할 필요가 없이 새로운 접근으로 유커가 어떤 사회적 현상인지 질문만 던져도 유용한 것이다. 1번 사진에서 (중국인이 맞다면) 주변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사회에 녹아들었다는 주장이고 그만큼 숫자도 늘어났다는 주장이다. 2번 사진에서 동대문 두타 앞 부엉이 조형물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유커를 보여준다. 이 부엉이는 심야쇼핑몰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왼쪽에서 하품하는 사람이 있다. 3번에서 마네킹처럼 서있는 관광객(이 맞다면)을 보여준다. 관광객이 마네킹처럼, 혹은 마네킹이 관광객처럼 서있다고 읽어달라는 뜻이다. 좋다. 전자는 1번 사진처럼 녹아들었다는 뜻이고 후자는 단체로 오는 유커의 특색을 보여준다. 4번 사진은 의문이다. 창 밖의 남자가 유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어찌 보면 이 남자가 유커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창에 비친 거리가 유커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라는 주장일 수도 있다. 5번도 우리 사회에 혹은 우리의 거리에 녹아들었다는 주장으로 읽는다. “이 사람이 유커라면”이란 지적을 거듭해서 하는 이유는 성의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중국 관광객은 소리 없이 외모만 봐서는 큰 차이가 없다. 입을 열면 성조가 뚜렷해서 금방 알겠지만 겉으로는 구분이 힘들다. 찍는 사람은 현장에서 유커라고 확인했겠지만 사진을 보는 독자에겐 호소력이 약하다. 친절하지 못하다는 지적을 하는 것이다. 어떤 방법이 있을지 모르지만 사진 속 유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시각적으로도 중국 관광객임을 보여주는 아주 작은 장치라도 있어야하겠다.
» 신한슬 <유커>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