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이 불편한 까닭
1. 성탄절이 불편하다.
성탄절이 불편하다. 성탄절에 들리는 캐럴송도 불편하고 성탄 축하도 달갑지 않다. 성탄 예배도 거북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성탄절에 교회 가기 싫은 까닭이다.
2.안식일과 하나님의 관계
신약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바리새인은 비판의 대상이다. 나쁨의 아이콘이다. 그러나 그들을 나쁜 부류의 사람으로만 치부하기는 어렵다. 그들은 신실한 사람이었다. 배우고 익힌 전통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성실했고 종교적 규율에 엄격했다. 바람직한 종교인이었다. 하나님을 대리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향해 예수는 끊임없이 비판을 퍼부었다.
예수와 예수의 제자들, 그리고 바리새인이 밀밭 사이를 걸어가다가 배가 고픈 제자들이 밀 이삭을 따서 먹는다. 이를 본 바리새인이 제자들을 힐난한다. 남의 밀 이삭을 따 먹었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안식일에는 밀 이삭을 수확할 수 없다는 규정을 위반했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종교적 규율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배 고팠기에 바리새인도 배 고팠을 것이다. 그들은 안식일이기에 배 고픔을 참으며 규율을 지키려고 했다. 그런데 예수의 제자들은 그것을 어겼고 그래서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바리새인을 비판한다. 규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종교의 규율보다 사람의 배 고픔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예수는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강조한다. 예수는 자신을 ‘사람의 아들(인자)’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의 인간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예수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은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신(하나님)이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주인이라는 것이다. 바리새인에게 안식일의 주인은 하나님이었는데 예수는 안식일의 주인을 사람으로 바꾸어 버렸다.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은 종교이고 →종교는 율법이며 → 율법은 안식일이라고 배웠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율법이고 → 율법을 지키는 것이 종교를 믿는 것이며 → 종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는 틀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은 하나님이다. 예수는 ‘안식일 = 하나님’이라는 관계를 끊는다. 아니라고 말한다. 안식일과 하나님은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3. 성탄절과 예수의 관계
성탄절과 예수의 관계는 안식일과 하나님의 관계와 유사하다. 성탄절과 예수 가르침의 연결고리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는 성탄을 축하할 것인가? 안식일과 하나님이 관계를 끊은 예수는 성탄 축하에 반대할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관계없는 것도 아니며,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십계명도 있으니 안식일과 하나님의 관계는 분명하다고 바리새인들은 주장할 것이다. 예수 탄생과 예수를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성탄 축하와 예수의 관계는 중요하다고 많은 신실한 현대인들은 말할 것이다.
다시 생각해 보자. 예수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의 가르침이다. 이것이 본질이다. 예수 가르침의 핵심은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안식일의 주인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 탄생과 예수의 가르침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예수 탄생과 예수의 관계를 강조하는 것은 종교이다. 예수는 신으로 태어나야 하는 종교의 틀에서는 이 관계가 중요하다. 바리새인들이 믿고 있던 종교의 틀과 동일하다. 성탄절과 예수의 관계는 바리새인들의 사고방식이다. 예수는 이 관계를 끊었다. 예수 탄생에 예수 가르침은 없는 것이다. 성탄절과 예수는 관계가 없다.
4.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과 사랑은 하나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사랑이고 사랑 그 자체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종교도 아니고 율법도 아니고 안식일도 아니다. 그냥 사랑이다.
예수도 사랑이라고 했다. 예수가 사랑이고 사랑이 예수이다. 예수는 교회도 아니고 성서도 아니고 성탄도 아니다. 그냥 사랑이다.
밀밭 사이를 걸어가는 배 고픈 사람에게는 배를 고프지 않게 밀 이삭을 따 먹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고통을 위로하는 것이 사랑이다. 외로운 사람을 위로하는 것이 사랑이다. 교회 가는 것이 사랑이 아니고 성탄 축하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다. 십일조를 내고 경건하게 기도하고, 기쁜 성탄 축하 노래 부르는 것이 사랑이 아니다. 밀 이삭을 수확하지 말라는 율법을 지키느라 배 고픈 사람을 내버려 두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과 사랑은 하나이다.
5. 원숭이 엉덩이와 맛있음의 관계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 빨간 것은 사과 → 사과는 맛있어’라는 관계에서 ‘원숭이 엉덩이는 맛있어’라는 결론을 도출하고 나서 자신도 모르게 ‘맛있는 것은 원숭이 엉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현대인이다.
‘하나님은 종교 → 종교는 율법 → 율법은 안식일’이라는 관계에서 ‘하나님은 안식일’이라는 결론을 도출하고 나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바리새인이다.
‘예수는 신 → 신은 믿음 → 믿음은 성탄 축하’라는 관계에서 ‘예수는 성탄 축하’라는 결론을 도출하고 나서 ‘성탄 축하는 예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다.
성탄절이 예수를 상징하는 것이 불편한 까닭이다.
6. 사람이 주인인 성탄을 위하여
거대한 교회로 갈 것이 아니다. 배 고픈 사람에게 가야한다. 기쁜 찬송 부를 일이 아니다. 슬퍼하는 사람과 같이 울어야 한다. 축하할 일이 아니다. 차별의 세상을 저주해야 한다.
예수는 사람이 주인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했다. 사람 사랑이 본질인 것이다.
어떤 신학서적보다도 , 어떤 목사의 설교보다도 더 명확하고 확실하게 하나님과 예수의 본질을 설파하셨네요.
예수를 믿을 것이 아니라 예수를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늘 갈등입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