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마당


 논산 관촉사 (1)

 
잠시 길을 또 잃고 말았다. 아니 이번에는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다만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갈림길에서 잠시 헤맸을 뿐. 

그래 봤자 그게 그거이려나? 어쨌거나 갈림길 하나를 잘못 골랐더니 내비게이션이 계속 우회전, 우회전을 외치며 난리가 났다. 

이렇게 멀쩡한 길에서 헤맬 때면 잠시 자책 모드가 되며 기분이 가라앉는다. 

오늘도 그렇게 기분이 무거워지던 찰나! 갑자기 눈앞이 환하게 밝아진다. 이건 뭐지?


hsy901.JPG

길 양쪽을 따라 피어있는 것은 ‘계란꽃’이라고도 불리는 개망초다. 

길을 걷다 보면 쉽게 만나는 개망초지만 이렇게 흐드러지게 모여서 피어있는 것은 처음이다. 

양쪽 길섶을 가득 메운 개망초에 2차선 도로조차 꽃 속에 묻힐 지경이다. 

개망초가 이렇게 예쁜 꽃이었나? 길을 잃지 않았으면 만나지 못했을 예쁜 풍경을 오늘 또 하나 만났다. 

잠시 길을 잃고 헤매어서 참 다행이다.


hsy902.JPG
 
오늘 가는 논산 관촉사 주변에도 그렇게 ‘길을 헤맨 덕분’에 만난 석불이 하나 있다. 

몇 년 전, 관촉사 입구에서 길을 잘못 들어 근처 동네를 한 바퀴 돈 적이 있다. 

‘추운데 이게 뭔 고생이람?’ 할 즈음, 문득 석불 하나를 만났다. 

길을 헤매는 것이 조금 답답해지던 참이었는데, 길을 잃고서야 만난 석불이 예사롭지 않다.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는 비로자나불인데 특이하게도 어느 가정집 마당에 서있었다. 

알고 보니 관촉사 은진미륵의 ‘어머니 석불’이라는 별칭이 있는 고려시대 석불로 유형문화재 88호로 지정까지 되어있다. 

원래 정해진 길로만 갔다면 이 석불은 만나지 못했으리라.


hsy903.JPG
 
다시 길을 찾아 도착한 절 입구에는 전에 방치되어 있던 공터가 연못으로 거듭났다. 

올해 처음 만나는 연꽃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잠시 길을 잃는 것도 정해진 시절 인연이 아닐까 싶다는 생각. 

모든 것이 운명론으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때 그렇게 길을 잃은 것도 어쩌면 어떤 만남을 위한 절차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그때 길을 헤맨 덕분에 결국은 이렇게 예쁜 풍경도 만나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정해진 길로만 갔으면 이제껏 보던 대로 익숙한 것들만 보았을 것이다. 

전에 없던 새로운 풍경을 만난 것도 어쩌면 길을 잃은 덕분은 아닐는지.


hsy904.JPG
 
길을 잘 찾아가는 사람들의 눈에는 길치의 합리화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길을 잃고 헤맬 수 있는 오늘 하루가, 그렇게 만난 예쁜 풍경이 고맙고 감사하다. 

내일은 또 어떤 길에서, 어떤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이 더 기다려지는 하루다.

 


한선영 작가는

hsy1001.jpg

 

길치 여행작가, 한국문화재재단 사진작가

대학과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회사를 다니며 열심히 숫자를 다뤘다.

길치여서 늘 헤매지만 그만큼 많은 생각을 얻을 수 있어서 좋다는 무한긍정주의자다.

‘길은 어디로든 이어진다’는 생각에 오늘도 길 위에서 헤매는 중이다.

저서로 <길이 고운 절집>이 있다.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댓글 작성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List of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