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사로 향하는 길에는 동백꽃이 점점이 뿌려져 있다. 동백꽃 길을 따라 올라오면 외투의 단추를 끝까지 꼭꼭 채운 듯한 외관의 백련사를 만나게 된다. 절집에 들어서는 길은 바로 이어지지 않고 채마밭을 휘휘 돌아 다시 만경루 아래를 지나야 한다. 게다가 만경루 양옆으로 이어져 있는 돌담은 대웅전을 지키는 호위 무사처럼 어깨를 겯고 서있다. 마치 절집에 오는 사람을 감시라도 하듯 빙빙 돌아 걷게 만드는 구조다.
이런 구조는 몽골과 왜구의 잦은 외침으로 폐사에까지 이르렀던 백련사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세종 대에 행호대사는 효녕대군의 후원을 받아 절을 중창하면서 또 있을지도 모를 외침에 대비하여 행호토성을 쌓기도 하였다. 백련사의 불친절한 외관은 이러한 배경에서 연유한 것이다.
백련사의 사명(寺名)은 독특하게도 ‘절 사(寺)’가 아닌 ‘단체 사(社)’를 쓴다. 신라 문성왕 때인 839년에는 만덕사(萬德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으나, 고려 때 원묘국사의 백련결사 이후로 ‘백련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참회와 수행을 통해 현세에서 정토를 이루고자 했던 백련결사는 보조국사 지눌의 정혜결사와 함께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불교 개혁 운동으로 통한다. 백련결사는 특히 외적의 잦은 침입으로 피폐해있던 민중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만경루를 지나면 돌담의 호위를 받고 있던 대웅전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원교 이광사의 유려한 글씨는 대웅보전을 더욱 아름답게 장식하고, 대웅전 안에는 신라 명필 김생(金生)의 글씨가 집자되어 전한다.
백련사의 만경다실에는 언제나 차향이 가득하다. 18년이라는 긴 시간을 강진에서 유배생활로 보냈던 다산 정약용은 동백꽃 향기와 차향이 어우러진 길을 오가며 아암 혜장선사와 더불어 깊은 교류를 나누었다. 차를 좋아했던 그는 아암 스님에게 ‘걸명소(乞茗疏)’를 보내어 차를 보내달라고 짐짓 떼를 쓰기도 했다. 지음(知音)의 교류를 이어주던 백련사의 차 맛은 차의 대가인 여연스님을 통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한선영 작가는
길치 여행작가, 한국문화재재단 사진작가
대학과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회사를 다니며 열심히 숫자를 다뤘다.
길치여서 늘 헤매지만 그만큼 많은 생각을 얻을 수 있어서 좋다는 무한긍정주의자다.
‘길은 어디로든 이어진다’는 생각에 오늘도 길 위에서 헤매는 중이다.
저서로 <길이 고운 절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