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마움 >
다리 수술 후 처음으로 그가 공원에 나왔다. 마약 진통제로도 고통을 견디기 어려워 한밤 중에 응급실에 실려 간 것이 불과 일주일 전인데 오늘은 전동 휠체어를 타고 공원에 나온 것이다. 반지하 어두운 복도 끝 쪽방에서 혼자 고통과 싸워 온 그가 유월 햇빛에 웃고 있었다. 밝아 보였다. 그는 방으로 가자고 했다. 전동 휠체어에서 내려 성큼성큼 반지하로 내려갔다. 두 발 없이 무릎으로 기어도 나보다 앞서 갔다. 긴 복도 양쪽 벽을 짚어가며 기어서 도착한 방 앞에 의족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왼쪽 의족이 없어 사용할 수 없는 오른쪽 의족이다. 방에 앉자마자 스케치북을 꺼내 그동안 그린 그림을 보여 주었다. 깜짝 놀랐다. 열 장의 동양화, 두 장의 기도문, 한 장의 편지였다. 두 가지 놀라움이었다. 동양화를 전공한 그가 수십 년 동안 그리지 못했던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는 놀라움과 그림의 수준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그림은 한눈에 봐도 전문가 수준이었다. 붓도 아니고 붓펜 하나로 그렸는데 완성도가 높았다.
그는 아이엠에프 사태의 희생자다. 중장비 사업 부도, 가족 간 불화, 이혼, 가족 단절, 10년 넘는 고시원과 쪽방 생활, 술, 당뇨와 뇌전증과 우울증과 신부전과 폐기종과 골수염, 최근 2년 사이 두 발 절단, 이 모두가 2000년 이후에 이루어진 일이다. 모든 걸 포기하고 살았었다. 바닥까지 갔었다. 이년 전 오른쪽 발 절단에 이어 지난달에 기어이 왼쪽 발마저 절단했다. 골수염으로 두 발을 잃은 것이다. 그 몸으로 쪽방에 살고 있다.
언젠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말에 붓펜과 스케치북을 선물했다. 다리 절단과 이후 계속된 통증으로 그림을 그리지 못했던 그가 며칠 전부터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수십 년 만이다. 이제 좀 안정이 된다고 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힘을 내자 힘을 내자라고 다짐한다고 했다. 스스로 변화된 것을 느낀다고 했다. 자기보다 힘든 사람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주위에서 도와준 사람들이 너무 고맙다고 했다. 도움을 갚고 싶다고도 했다. 나에게 고맙다고 했다. 나는 도와드린 것도 없다고 했더니 이야기 들어주고 공감해 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다시 그림 그릴 생각이 들게 해 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아니라고 이렇게 회복되니 내가 얼마나 고마운지 아냐고 말했다. 아니라고 자기가 고맙다고 했다. 쪽방 복도를 걸어 나오는 나에게 그는 기어 방문을 잡고 고맙다고 또 말했다. 그가 고맙다.
선생님의 사진 잘 보고 있습니다. 부탁드릴 말씀이 있어 글 올려 드려봅니다. 저도 뇌전증(간질)을 앓아 온지 몇십년이 되어 이 사진은 남의 얘기 같지 않았습니다. 뇌전증은 우리 사회에 장애중에서도 소수장애에 속합니다. 결혼과 사회 진출이 그만큼 힘듭니다. 그래서 간질이라는 명칭을 뇌전증으로 바뀐지 오래 되었고 법적으로 바뀐지는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허나 아직 우리들의 입에는 간질이 익숙합니다. 사실이구요. 저도 상담하다보면 그리나옵니다. 부탁드립니다. 선생님의 글에 간질을 뇌전증(간질) 이라고 제의 드립니다. 부탁드립니다. 우리 사회의 인식 변화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