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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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쪽방촌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까?
 
 가난한 사람들이니 돈이 필요할 것이다. 권력없는 사람들이니 정치적 권력이 필요할 것이고 능력없는 사람들이니 기적같은 능력이 필요할 것이다. 단순하고 상식적인 이야기이다. 그런데 돈과 권력과 능력을 주면 그들이 쪽방촌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로마 식민지이고 유대 종교사회이면서 가난의땅인 갈릴리에서 자란 서른 살 청년 예수의 꿈은 무엇이었까? 식민지 통치권력에게 착취당하고 종교적 율법으로 무장한 종교 지도자들에게 억압받으며 가난하게 살아가는 민중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로마 황제를 무너뜨리는 정치적 권력을 꿈꾸었을 것이며, 종교 지도자들의 압박을 넘어서는 놀라운 기적을 꿈꾸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배 고픔을 넘어서는 풍족함을 꿈꾸었을 것이다. 날마다 그런 꿈을 꾸면서 살았을 것이다. 로또를 샀을 것이고, 홍길동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하늘을 나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모세의 기적을 꿈꾸었을 것이고, 엘리야의 능력을 꿈꾸었을 것이다. 오래 전 죽은 선지자가 부활하는 꿈을 꾸며 하루 빨리 메시야가 오기를 학수고대 했을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그들 앞에 오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예수도 그런 꿈을 꾸며 살았을 것이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난 예수는 가장 먼저 그 꿈을 떠 올린다. 가난한 민중들을 위한 떡을 만들고 싶었고, 로마의 식민지 권력을 무너뜨리고 싶었고, 민중을 배반하고 자기들 배만 채우는 거짓 종교를 해체하고 싶었다. 그것이 삼십 평생의 꿈이었기 때문이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끝장내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혁명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선악과를 먹으면 세상이 바뀔 줄 알았던 아담과 하와의 유혹이 예수에게 온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 유혹을 넘어선다. 떡과 권력과 능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예수는 그 깨달음을 고백하면서 공적인 삶을 시작한다.
 
 예수는 유혹을 넘어섰지만 세상은 그대로이다. 사람들이 세상을 인식하는 틀은 바뀌지 않는다. 사람들은 예수가 옛 선지자 엘리야라고 생각한다. 죽은 요한이 부활한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그것이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범위이다. 제자들도 마찬가지다. 변화산에서 예수가 엘리야로 보이기도 하고 모세로 보이기도 한다. 수 백 년 동안 전해내려 온 종교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요한이 부활하고 엘리야와 모세가 눈 앞에 나타나는 상상을 한다. 신비한 존재, 기적의 존재, 능력의 존재를 바란다. 예수가 그런 존재이기를 바란다. 사람들은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수 천 명의 배 고픈 사람을 배 부르게 하는 기적의 능력을 예수에게 바란다. 로또적 예수이기를 바란다.
 
 예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본인이 증거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배 고픈 사람을 먹이고, 하늘을 날아다니며  신비한 기적을 베풀고, 놀라운 정치적 권력으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존재가 아니다. 예수는 가난한 쪽방 사람들에게 빵을 나누어주는 존재가 아니다. 놀라운 정치적 권력으로 쪽방촌을 없애는 존재도 아니고, 신비한 기적으로 쪽방촌을 천국으로 만드는 존재도 아니다. 슈퍼맨이 아니다.
 
 예수는 어떤 존재인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자각한다. 변화산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다’라는 하나님의 말은 ‘하나님의 아들’임에 대한 예수의 자각이다. 자기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다. 그럼에도 예수는 스스로를 말할 때 ‘사람의 아들’(인자)이라고 했다. 스스로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달은 것이다. 예수는 ‘사람의 아들’이면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다. ‘사람의 아들’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사람이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이다. 예수 밖에 있는 신비한 존재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의 하나님’이다. 존재의 변화이다. 사람의 아들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변화인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에서 사람의 아들로의 변화이다. 그것이 예수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존재의 변화이다. 사막과 같은 아무 것도 없는 들판으로부터 오천 명이 먹고도 남는 들판으로의 변화이다. 이 변화는 외부에서 주어진 변화가 아니다. 다른 동네에 가서 빵을 사 오거나 예수가 기적으로 빵을 만들어서 먹여주는 외적 변화가 아니다. 사람들의 외부에서 만들어진 신비한 기적이 아니다. 내적 발견으로의 변화이다. 요한의 세례를 받고 ‘사람의 아들’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변화이며, 변화산 위에서 ‘사람의 아들’인 예수가 ‘하나님의 선택된 아들’이 되는 변화이다. 예수의 이 변화가 오천 명에게도 일어난 것이다. 예수로 인해 모두가 변하여 예수와 같은 존재가 된다. 군중이 예수가 된 것이다. 예수가 된 오천 명의 군중은 물고기 다섯 마리와 떡 두 개만으로도 먹고 남길 수 있었다. 기적이라면 이것이 기적이다. 떡과 물고기가 뻥튀기되는 기적이 아니라 사람이 변하는 기적이다. 외부의 조건이 변하는 기적이 아나라 내부의 사람이 변하는 기적이다. 사람이 변하여 하나님이 되는 기적이다. 예수는 이것을 보여준 것이다.
 
 쪽방촌에도 이런 기적이 필요하다. 돈이 없어 쪽방촌을 없애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제도가 미비하여 쪽방촌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없어서 쪽방촌이 없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쪽방촌을 보는 사람들의 문제이다. 그 사람들의 생각 때문이다. 내가 아닌 돈과 정치와 종교로 쪽방촌이 해결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쪽방촌이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내가 변해야 한다. 돈과 정치와 종교 이전에 그들을 보는 나의 생각이 변해야 한다. 내가 변하여 사람에서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 내가 예수가 되어야 한다. 예수의 제자들처럼 사막 같은 벌판에서 배 고픈 오천 명을 보면서도 여기에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다. 내가 예수가 되면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 만으로도 오천 명을 배 부르게 할 수 있다.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로또적 기적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능력을 발견하는 것이다. 하늘 위에 하나님이 아니라 내 안의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되는 것이다.
 
 예수가 되어야 쪽방 사람들을 인정할 수 있다. 그들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고, 그들의 아픔에 연민할 수 있다. 존중할 수 있다. 예수는 돈과 권력과 신비함의 슈퍼맨도 아니고 로또도 아니다. 예수는 평범한 ‘사람의 아들’일 뿐이다. 다만 스스로를 포기하고 스스로를 잊음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그래서 함께 비를 맞을 수 있다. 연민의 능력, 그것이 예수의 능력 전부이다. 그 능력이 오천 명의 배 고픈 사람을 배 부르게 할 수 있었다. 그 능력만이 쪽방촌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기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기적은 없다. 다만 내가 예수일 뿐... 다만 내가 부처일 뿐... 

 

 

김원 작가의 여시아견(如是我見)

 

 직장인이다. 틈나는 대로 사진 작업을 한다. kw10001.jpg 쪽방촌과 기독교 수도원을 장기 작업으로 계속하고 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계속할 것이다.
 
 여시아견(如是我見)은 금강경에 나오는 말이다. 사진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본 것을 전달하는 것이라는 의미와 통한다. 내가 보기에는 그랬다는 것에 대한 상징이다. 쪽방촌, 수도원, 소소한 일상, 이 세 가지 주제가 내가 카메라로 보고 있는 것들이다. 내가 카메라로 본 세상, 그것이 여시아견(如是我見)이다.
 
 김원 페이스북 www.facebook.com/won.kim.5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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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관

2019.06.25 15:41:18

"예수 밖에 있는 신비한 존재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의 하나님'이다. 존재의 변화이다. 사람의 아들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변화인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에서 사람의 아들로의 변화이다. 그것이 예수이다"

 

"없는 것은 만들어 내는 로또적 기적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능력을 발견하는 것이다. 하늘 위의 하나님이 아니라 내 안의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되는 것이다."

 

"예수가 되어야  쪽방 사람들을 인정할 수 있다. 그들의 존재를 인정할수 있고 그들의 아픔에 연민할 수 있다"

 

'내가 예수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쪽방 사람들을 알수가 있고, 그들에 아픔을 함께 할수 있다'는 말씀,

정말 가슴을 울리는 말씀입니다. 어느 교회 목사나 신학자에게서도 들을 수 없는 귀하고 진실된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복내려주는 하나님으로만 믿을 뿐, 아무도 예수를 살아 내거나  예수가 되어야 한다고는 전혀 생각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을 것이 아니라, 예수를 살아야 하는데 ...그리고 내가 예수가 되어야 하는데...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salim40

2019.06.26 13:03:33

긴 글 정성스럽게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로또적 예수나 슈퍼맨적 예수만 있는 세상을 공감해 주시니 더욱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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