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인생, 소품 인생

사진마을 2017. 06.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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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한 일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지난 주말 존 버저의 ‘말하기의 다른 방법’ 특강을 하러 춘천에 갔고 거기서 소설가 하창수씨를 만났고 그의 소설집 <서른 개의 문을 지나온 사람>(문학과 지성사)을 선물 받았으며 넘겨보다 대뜸 “단편집이라 다행입니다. 잘 읽겠습니다. 장편은 체력이 딸려서 못 잡겠습니다”라고 했으며 열 개의 단편 중 첫째인 ‘엑스 존’을 읽은 것이 모두 우연한 일이 아니다. ‘엑스 존’은 소설 속에서 사람들이 통상 ‘자살 성소’ 혹은 ‘자살의 집’이라고 부르는 곳이며 소설의 화자인 ‘나’는 자살 시행자를 도와주는 일을 수행하는 간호사다.

 지난 주에 기사 ‘누구나 누르면 찍히지만 모두가 사진은 아니다’를 쓰던 중 눈빛 출판사 이규상대표가 전화로 사진집 <고시텔>에 대해 짧게 말했고 눈빛에서 보내준 사진집 <고시텔>을 보다가 심규동씨 본인이 쓴 ‘사진가의 노트’를 읽다가 “나는 간호사를 하기 싫었다”라는 문장을 발견한 것이 모두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릉에서 살고 있는 심규동씨와 5일 전화인터뷰를 했다. 궁금한 것이 많았는데 강릉에서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간호사 면허까지 취득해놓았는데 간호사를 하기 싫어서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한 것도 궁금했다. 전적으로 하창수의 소설 ‘엑스 존’이 겹쳤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심규동씨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물었다.
 -간호사를 하기 싫었던 이유가 뭔가?
 “23살 겨울에 서울로 불쑥 와서 고시텔 생활의 첫발을 디뎠던 것이 군대 다녀와서 복학시기를 조절할 때다. 간호사가 싫은 이유는? 공부엔 관심이 있었으나 실습을 하면서 보니 (간호사의) 문화가 맞질 않았다. 적응하기 힘들었다. 사실 복학하기 싫었으니 어떤 아르바이트를 하든지 서울로 간 것이다. 나중에 기어이 복학하여 졸업을 한 것은 부모님의 뜻이다. ‘어쨌든 졸업은 해라’ 그래서 면허까지 땄는데 지금도 여전히 간호사를 하기 싫다. 실습하다 보니 느낀 점이 있다. 생명을 다루는 일인데 만약 실수를 하게 되면 어쩌나 싶은 트라우마 같은 것도 미리 걱정이 되고 그렇다.”
 
 심규동씨가 군에서 제대한 뒤 복학하기가 마땅치 않아서 서울의 고시텔을 찾았던 것이 7~8년 전이고 신종플루 때문에 두 달 만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다시 역삼동의 고시텔을 거쳐 서울대 입구에 있는 고시텔을 찾았다. 여기 살면서 동국대 여행작가과정을 등록하였고 야간에 할 수 있는 헬스장 아르바이트를 찾았다. 작가과정을 수료하고 여행 잡지사에 기자로 취직했고 정착하리라 기대하며 응암동에 시설 좋은 고시텔로 옮겼다. 기자 생활이 만만치 않았고 정신과 몸이 피폐해져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복학해 2년 후에 졸업하고 간호사 면허를 땄으나 병원에 취직하지 않고 서울로 와서 신림동에서 다섯 번째 고시텔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웨딩스튜디오의 어시스트 일을 했다. 출퇴근이 멀어서 스튜디오가 있는 압구정의 고시텔로 옮겼다. 이때 일은 재미있었으나 본인이 좋아하는 사진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사진을 찍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고민에 빠졌다. 이 무렵 처음으로 ‘내가 찍고 싶은 것을 내 멋대로 찍고 싶어졌다’라고 심씨가 표현했다. 스튜디오를 그만 두고 다시 신림동의 한 고시텔로 옮겼다. 여기선 엑스트라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는데 고시텔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엑스트라 같다고 생각했다. 고시텔의 엑스트라 앞에서 카메라를 들 수 있기까지 6개월이 걸렸다. 그렇게 사진을 찍어서 마무리한 것이 2016년 추석 무렵이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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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텔 사진 작업을 하려고 고시텔에 살았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시텔 작업의 명분에 대해 이야길 들려달라.
 “직접 살았던 기간만 따져보니 약 4년간 모두 7군데 고시텔을 전전했다. 그중 사진을 찍은 곳은 맨 마지막 신림동의 고시텔이었다. 내가 사진을 찍으려고 한 것은 어떤 사회적 문제의식 같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이 가장 컸다. 이런 고시텔이란 거주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뭔가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글도 있고 그림도 있을 것인데 내가 사진을 찍을 줄 아니 그게 사진작업이 되었을 뿐이다”
 
 -그럼 사진은 언제부터 배웠는가?
 “사실 애매하지 않느냐? 물론 취미로는 예전부터 했겠지. 꽃도 찍고 여행가면 여행사진을 찍는다. 배운다는 것이…. 디지털이니 자동 놓고 찍으면 찍히지. 여행작가과정에 등록해서 여행사진을 배웠다. 기술이나 후보정 같은 것은 웨딩스튜디오에서 어시스트를 하면서 제대로 배웠다. 사진 철학이나 이런 것은 혼자 하는 거지 배우는 게 아니지 않은가? 하다가 막히면 주변의 사진가들에게 조언도 받고 그랬다”
 
 -<고시텔>에 등장하는 사람은 몇 명인가? 어떻게 찍었으며 허락은 어떻게 받았나?
 “나를 포함해서 7명이다. 허락 받는 것이 제일 힘들다. 사진 찍는 것보다 더 어렵다. 카메라를 꺼내기도 힘들었다. 복도나 옥상 같은 공간을 담았다. 한 6개월 그러고 다니니까 ‘저 사람이 사진을 찍는 사람이구나….’라는 이야길 듣게 되었다. 옥상에 휴게실이 있으니 사람들과 대화를 하게 되었다. 내가 제일 막내급이니 주변 모든 이들이 형이고 형님이었다. 30여 명의 고시텔 식구들이 있었는데 거의 거절당했고 6명만 동의했다. 내가 고시텔에 오래 살고 있으니까 그 형님들이 ‘우리와 같은 처지구나!’라고 생각하고 도와준 것이다. ‘성공하라’고 격려해주는 사람도 있고 그랬다. 책 표지에 등장하는 문신한 형님이 적극 도와줬다. 천장에서 찍은 사진은 카메라를 달아놓고 타이머를 설치한 것이다. 광각렌즈가 필요했고 현실감을 주기 위해서 중형필름 카메라를 썼다. 중형디지털은 너무 비싸서 어디 빌릴 곳도 없었다”
 

 -당신이 쓴 ‘사진가의 노트’를 읽다보니 몇 가지 표현이 와닿았다. 촬영장의 소품, 투명인간... 이런 표현 말이다. 
 “씨에프나 드라마 촬영장에서 엑스트라로 일한다는 것이 어떤지 아는가? 그냥 걷거나 서있는게 전부라서 엑스트라의 존재는 사무실 서류뭉치나 테이블의 커피잔 같은 소품으로 취급된다. 커피잔은 말이나 없지 엑스트라는 오히려 시끄럽고 움직이는, 더 곤란한 소품인 듯 우리에게 짜증을 내기도 했다. 일을 마치고 고시텔로 돌아오다가 문득 이 곳 사람들도 사회의 엑스트라같고 처치 곤란한 소품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책을 낼 수 있게 된 것은 어떤 계기가 있었나?
 “지인의 도움을 받아 눈빛 이규상 대표께 사진 파일을 100여장 보냈다. ‘진행하자’고 연락이 왔다. 이규상 대표는 ‘고시텔이란 공간에 대해, 그 공간에 머무는 청춘들에 대한 어른들의 책임을 통감한다’며 공감을 표현했다. 그래서 책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사진집이 나오고 나서 책에 실린 6명의 반응은 어땠는가?
 “한 명은 아직 연락이 안되었다. 표지에 실린 형은 ‘응원한다’고 격려했다. 또 누군가는 책 보내준다고 하니 ‘응? 그래 알았어’라고 하기도 했다”
 
 -또 고시텔에 들어갈 생각이 있는가?
 “내가 사진을 찍은 고시텔엔 갈 생각이 없다. 지금 당장은 서울에 갈 일이 없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조금 시설이 좋은 고시텔이라면 다시 가서 살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인터뷰를 마쳤다. 이곳에서 살아본 사람, 사는 사람이 아니면 찍을 수 없는 사진이다. 심규동은 사진가의 노트 첫 머리에서 여러 고민 끝에 사진집을 내기로 한 것은 “우리도 한 번은 주인공이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어서였다”라고 했다.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사진 제공/눈빛


 

 사진가의 노트/심규동

 
고시텔 사진을 찍으면서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이 사람들을 이용하는 것은 아닌지, 상처 주는 일은 아닌지, 그리고 나도 똑같은 삶을 사는지, 왜 자괴감이 드는지….’
 이런 고민이 극에 달하자 도망치듯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다시 많은 생각을 했다. 결국, 사진집을 내기로 한 것은 우리도 한 번은 주인공이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고시텔에 내가 처음 들어간 때는 23살 겨울이었다. 군대를 다녀오고 복학을 기다리며 고향에 있을 때, 나는 친구들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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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언제까지 강릉에 있을 거야! 아르바이트 하려면 차라리 서울에서 하자!” 언제나 그렇듯 매우 쓸모없는 얘기도, 매우 중요한 얘기도 술을 마시다 한다. 그리고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나와 친구는 서울에 있었다. 방은 알아보지도 않고 왔다. 무작정 상경해도 고시텔이라는 곳이 널려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여러 곳을 다녀 보고, 어두워져서야 한 곳에 계약하게 되었다. 위치는 지하철 2호선 봉천역 주변이었다. 방 안에 샤워 부스와 좌변기가 있어서 비쌌고, 창문을 열면 하늘이 보여서(‘외창’이라서) 더 비쌌다. 그 방을 월 30만 원에 계약할 수 있었다. 원래는 1인실이지만, 돈이 없던 우리는 둘이 함께 그 방에 사는 것으로 사장에게 허락을 받았다. 그리하여 보증금이라는 목돈 없이 한 달에 15만 원으로 대찬 서울살이를 시작할 수 있었다.
 다리를 겨우 펼 수 있는 좁은 방에서 한 명은 침대에, 한 명은 바닥에서 잠자기를 번갈아 했다. 나와 친구는 대화도 하고 가끔 술도 먹었다. 그럴 때면 옆방에 들릴까 걱정하며 소곤거렸다. 외창은 환기에 좋지만, 칼처럼 날이 선 겨울바람을 막아 주진 못했다. 추위에 덜덜 떨 때면 샤워 부스에 들어가 따뜻한 물로 한동안 온몸을 적셨다. 그러다 전기장판을 사고, 온풍기까지 사게 되었다. 전기세와 수도세 걱정이 없었기 때문에 거침없이 썼다. 우리가 내는 30만 원도 부담되어 뽕을 뽑자는 심산이었다. 이런 못된 심보는 주방에도 작용했다. 라면과 김치,
 밥, 심지어 계란까지 무료제공이었다. 계란이 공짜여서 이곳에 왔다고 봐야겠지. 물론 아끼지 않았다. 공동 주방에 다른 사람이 있으면 안 들어갔다. 들어간다고 해도 누구도 인사를 하거나 말을 걸지 않았다. 고시텔 김치는 정말 먹을 게 못 되었다. 그 후 여러 고시텔을 전전했지
 만 마찬가지였다. 김치는 집에서 원조를 받아야 했다. 방 안에 작은 냉장고에 있는 김치를 보고 고향을 떠올렸고, 한국 사람임을 느꼈다. 그곳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들어갈 때처럼 나오기도 수월했다. 방 열쇠를 돌려주고 키 보증금 1만 원을 받는 것이 다였으니까.
 다음 고시텔은 역삼동 뒷골목에 있었다. 이 인근 고시텔은 봉천동보다 대체로 10만 원 정도 더 비쌌다. 그러나 내가 살던 곳은 오히려 처음보다 싼 방이었다. 그만큼 시설도 안 좋았다. 하지만 한 달 교통비를 생각하면 현명한 선택이었다. 화장실과 샤워실은 공용 칸을 이용했
 다. 나는 오히려 방이 습하지 않아 더 잘됐다고 생각했다. 차마 외창은 포기할 수 없었다. 파란 하늘은 고층 빌딩에 가려 볼 수 없었지만, 그 창이 있어 밖에 하늘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곳 주방에서볶음밥 정도의 요리를 시작했다. 당연히 계란이 없었고, 볶음밥에 계란은 꽤 중요했다. 당시 주변 고시텔에 사는 친구를 알게 되었는데, 내가 사는 곳보다 무려 15만 원이나 비싼 곳이었다. 그 친구는 주방에 갈 때마다 몰래 계란을 자기 방으로 가지고 와서 10개쯤 모이면 내게 건네주었다.
 내가 살던 방은 옆방과 뚫려 있었다. 벽에 달린 에어컨을 반으로 가르는 벽이 있었다. 그렇게 에어컨 하나를 반반씩 공유했다. 리모컨은 건넛방 아저씨가 쥐고 있었다. 그는 매일 전화로 싸웠다. 목소리가 분명하게 들렸지만, 어떤 상황인지 알기에는 내가 너무 어렸던 것 같다. 나는 숨죽이고 없는 척했다. 방문을 나서다 그와 마주쳤을 때, 나는 당황해서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백발이었다. 족히 예순은 되어 보였다. 왜 그 나이에 혼자 이런 곳에서 사는지 매우 궁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처럼 젊은 사람보다 나이 든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눈치챘다. 결국 ‘다 돈이 없어서’였다.
 그때 나도 돈이 없어서 친구에게 5만 원을 빌렸다. 3만 원은 엑스트라 회사에 보증금을 냈고, 1만 원은 교통카드를 충전했고, 마지막 1만 원은 마트에서 먹을 것을 샀다. 그때부터 보조출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일한 다음 날 바로 돈이 들어왔다. 그 돈으로 과일은 못 사고, 달곰한 시리얼을 사서 아작아작 씹어 먹었다. 고기 굽는 냄새가 술에 취한 사람들의 목소리에 밀려 작은 창문에 가득 끼어 오면, 힘차게 창문을 닫으려다 옆방에 들릴까 봐 조심히 닫고, 애꿎은 시리얼만 더 힘차게 씹었다.
 세 번째 고시텔은 정말 대책 없이 들어갔다. 나는 간호사를 하기 싫었다. 집을 뛰쳐나와 친구에게 100만 원을 빌려 서울대 입구에 자리 잡았다. 30만 원은 고시텔 한 달치로 내고, 50만 원은 동국대 여행작가과정을 등록하고, 나머지는 생활비로 썼다. 나는 여행작가가 되어, 여행하고 글 쓰고 사진 찍으며 살고 싶었다. 다행히 야간에 할 수 있는 헬스장 아르바이트를 찾았고, 3개월에 걸쳐 빌린 돈을 갚을 수 있었다.
 여행작가과정을 수료하고 여행 잡지사에 기자로 취직했다. 나는 정착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응암동에 시설 좋은 고시텔로 옮겼다. 보증금도 10만 원 정도 있었고, 월 40만 원이 넘는 비싼 곳이었다. 이 방에서는 나 말고도 다른 생물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선인장 화분을 두 개 샀다. 그곳에는 엘리베이터도 있고, 도어 록도 있었다. 깨끗해서 원룸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방음도 매우 잘돼서 마치 이 큰 건물에 혼자 있는 것 같았다. 지하 세탁실에 가지 않는다면, 사람과 마주칠 일이 없었다. 주방이 있었지만 식사하는 사람도, 사용한 흔적도 없었다. 이상하리만큼 쓸쓸했던 네 번째 고시텔이었다.
 기자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동시에 여행 가이드북을 준비하느라 더욱 힘겨웠다. 정신은 피폐해지고, 건강도 안 좋아졌다. 생활고에 마음도 약해져서 결국 1년의 타지 생활을 마무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취직도 했었고, 책도 나왔으니 1년 동안 무엇을 했는지 명분이 있었다. 나는 다시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2년 후, 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사 면허를 땄다. 하지만 병원에 취직하진 않았다. 나는 서울에 올라와 신림동에 다섯 번째 고시텔을 잡았다. 그리고 웨딩스튜디오에 어시스트로 들어갔다. 압구정동으로 출근하는 길이 매우 고단하여, 스튜디오 근처에 고시텔로 옮겼다.
 압구정에 위치한 여섯 번째 고시텔은 외국인이 많았다. 동남아, 일본, 중국 등의 국적을 가진 젊은 여자들이었다. 이유인즉슨, 좋아하는 한국 연예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아키코는 슈퍼주니어의 동해를 좋아했다. 그녀는 동해가 다니는 헬스장 앞에서 선물을 들고 기다렸다. 팬심이라기보다 정말 한 남자를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했다. 외국인들을 주방에서 자주 마주쳤다. 동남아 친구들은 저녁마다 모여서 자기 나라 음식을 해 먹었다. 나는 라면을 먹고 싶어도 그냥 참았다. 방에 있다가 조용해지면 주방으로 나갔다. 한번은 주방에서 라면을 먹고 있는데, 아무렇지 않게 여자 둘이 바로 내 옆에 앉았다. 일본인이었다.
 정말 나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나도 일본의 개인주의 성향을 익히 들어온지라 의식하지 않고 맛있게 라면을 먹었다. 그리고 내가 다 먹은 뒤에 그 둘은 라면을 끓여 먹었다. 그중에 한 명이 미야코였는데 나중에 얘기해 보니까, 내가 너무 맛있게 라면을 먹더라고. 역시나 내가 민망하지 않게 신경 안 쓰는 척했다고.
 스튜디오 일은 재미있었다. 운 좋게 카메라를 빨리 잡을 수 있었다. 하루하루가 같은 일의 반복이었다. 그래서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적응의 또 다른 이름은 권태였다. 곧 웃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기계적으로 변했다. 신랑 신부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사진은 샘플에 맞춰 찍어야 했다. 결국, 대표님의 사진이었다. 인물의 개성과 감정을 끄집어내 나의 사진으로 만들어야 했지만,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대표님의 천부적인 재능 앞에서 나는 좌절하기 일쑤였다. 신랑 신부는 내가 좋아하는 사진을 싫어했고, 내가 별로라 생각하는 사진을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서로의 만족을 위하여 이렇게도 저렇게도 찍었다. 그것은 내 자존심에 생채기를 남겼다.
 나는 내가 찍고 싶은 것을 내 멋대로 찍고 싶었다. 다행히 마음 한편에 찍고 싶은 것이 있었다. 신림동에 고시텔을 알아볼 때, 더 싼 곳을 찾다가 들어간 곳이었다. 숨 쉬기 힘들었고, 어지러웠고, 바닥은 찐득했다. 잠깐이었지만 강렬했다. 사진을 찍고 싶다고 혼잣말을 했었다. 하지만 내가 왜 그곳을 찍고 싶으냐는 질문에 어렴풋이 답을 찾은 것은 6개월이나 지나서였다. 그리고 나는 스튜디오를 그만두었고, 그때 그 고시텔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은 분명히 빈민층의 주거공간이었다. 나는 그간의 고시텔 생활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이곳에 10년 넘게 사는 사람들을 보며 내 미래일 수 있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으로 했다. 결혼을 안 할 것이고, 그럼 자녀도 없을 것이고,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인생,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내 미래였다. 그래서 나는 사진을 찍어야 했다. 희망을 잃고 현실감까지 잃은 것인지 알아야 했다.
 나는 엑스트라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일은 그냥 걷거나 앉거나 서 있는 게 전부여서 전혀 부담이 없었다. 부담이 없는 만큼 촬영 스텝들도 엑스트라에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았다. 사무실의 서류 뭉치나 테이블에 놓인 커피잔 정도의 소품으로 취급했다. 오히려 시끄럽고 움직이는 더 곤란한 소품인 듯 짜증을 내기도 했다. 일을 마치고 고시텔로 들어오다가 문득, 이곳 사람들도 사회의 엑스트라 같다고 생각했다. 분명 주인공은 아니었다. 잔인하게도 처치 곤란한 소품 같았다. 그 엑스트라 앞에서 카메라를 들기까지 다시 6개월이 걸렸다.
 그동안 고시텔의 좁은 복도와 벌집같이 다닥다닥 붙은 방들, 그리고 공공시설과 풍경을 찍었다. 고시텔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며 좋은 취미를 가졌다고도 했고, 그런 것 찍지 말고 꽃을 멋지게 찍으면 사진작가가 될 수 있다고 충고하기도 했다. 이런 대화를 나눌 때면, 나는 조심스럽게 모델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사진을 찍게 되었고, 잘 나온 사진은 뽑아서 선물하기도 했다.
 어느새 나는 고시텔 사람들과 매우 친해졌다. 처음에는 고시텔 사람들이었다가, 몇 호 아저씨가 되었다가, 땡땡 형님이 되었다. 형님들도 나를 “규동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형님들과 함께 방에서 막걸리도 먹고, 3천 원짜리 삼겹살집도 갔다. 하지만 그렇게 친한 사람들도 시비가 붙고, 폭력이 빈번했다. 유독 심했던 때는 일주일에 한 번씩 고시텔에 경찰이 왔다. 겁에 질려 방에만 있던 초기와 달리, 나중에는 나도 구경하러 복도로 나왔다.그때 경찰과 눈이 마주쳤다. 나와 비슷한 나이였다. 나를 보는 그 눈빛을 잊을 수 없다. 그 경찰의 눈은 나를 그저 고시텔 사는 사회부적응자에 범죄위험인물로 경멸하고 있었다. 나는 이곳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이 처참히 무너졌다. 나의 가치는 결국 그 경찰의 눈에서 판단되었다. 마침내 나도 완벽히 고시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셀프포트레이트를 찍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내 방에서 형님 두 명과 함께 막걸리를 마셨다. 침대에 3명이 겨우 앉을 수 있었다. 술과 담배 심부름을 하러 나갈 때마다 내 방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결국, 막걸리는 이불과 바닥에 쏟았고, 담뱃재는 자연스럽게 들고 있는 채로 타들어 아무 데나 떨어졌다. 내 옷과 이불에 온갖 냄새가 찌들었다. 그날 밤 모두 돌아간 내 방에서, 혼자 눈물을 흘렸다.
 다음 날 아침, 거울 속의 내 모습은 초췌하다 못해 피폐했다. 살이 찌고 피부는 더럽고 머리는 덥수룩했다. 그제야 내가 놓치고 있었던 것들이 보였다. 입고 있는 옷은 아무리 빨아도 깨끗해지지 않았고, 초등학교 졸업 이후 처음으로 손톱에 때가 끼었다. 술 없이는 잠들기 힘들었고, 내 몸에 개미가 기어 다니는 것도 몰랐다. 아마 그때 경찰에 눈에 비친 내 모습이 이랬었나 보다. 경찰의 그 눈빛은 내가 이렇게 되어도 괜찮다고 위로해 주었다. 오히려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격려해 주었다. 뭔가가 잘못된 것을 알고 서둘러 고시텔을 나왔다. 고향으로 내려왔다.
 윌리엄 제임스가 『심리학의 원리』(보스턴, 1890)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회에서 밀려나 모든 구성원으로부터 완전히 무시를 당하는 것보다 더 잔인한 벌은 생각해 낼 수 없을 것이다. 방 안에 들어가도 아무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을 해도 대꾸도 안 하고, 무슨 짓을 해도 신경도 쓰지 않고, 만나는 모든 사람이 죽은 사람 취급을 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물건을 상대하듯 한다면, 오래지 않아 울화와 무력한 절망감을 견디지 못해 차라리 잔인한 고문을 당하는 쪽이 낫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나는 드디어 제임스의 이야기에 완전히 공감할 수 있었다.
 나는 반년쯤 지나서 다시 고시텔을 찾아갔다. 내가 나오고 3개월 후에 원장이 바뀌었다. 나와 친했던 아저씨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떠나고 없었다. 처음 보는 총무에게 나는 방을 처음 보러 온 척하고 둘러보았다. 제일 먼저 보여준 방은 내가 떠나기 직전에 사람이 죽어 나간 방이었다. 나는 그 방이 비어 있는 것 같지 않아,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내가 살던 방은 여전히 창문이 떨어진 채로 있었다. 화장실과 샤워실, 휴게실, 주방 모두 여전했다. 내가 어떻게 이곳에서 살았는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다시는 그 고시텔에서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도 참 많이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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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현 사진전 '검은 산 하얀 길' 석탄 산업이 남긴 강원도 탄광지대 김승현의 사진전 ‘검은 산 하얀 길2’이 서울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취재

카메라의 진화, 더 가볍게 더 빠르게

  • 사진마을
  • | 2017.07.04

캐논, 니콘, 소니의 신제품과 이벤트 2012년에 보급형 풀프레임 카메라로 출시된 캐논의 6D는 캐논코리아에 따르면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판매량...

취재

너무 싸면 역으로 속는다, 액세서리에서 덤터기 [5]

  • 사진마을
  • | 2017.07.04

  [카메라 뭘 어떻게 살까]    음식 인물 여행 맞춤형 따로 없고 제조사별로 품질도 엇비슷 입문-중급-전문가급 따른 차이뿐    병행수입품은...

사진이 있는 수필

세월을 낚는 꼬마 파이터 [1]

  • 사진마을
  • | 2017.06.30

사진이 있는 수필 7 부산 국제시장엔 ‘꽃분이네’도 있고 ‘청년몰609’도 있다. 2016년 11월에 문을 열었는데 부산경제진흥원이 글로벌 명품시장 ...

전시회

파도와 싸우는 사진가

  • 사진마을
  • | 2017.06.30

사진마을 작가마당 ‘파도의 중심에 서다’를 연재하고 있는 추연만 작가가 ‘추연만 파도전(戰), 파도의 중심에 서다’ 전시를 연다. 7월 1일부...

사진이 있는 수필

밥 숟가락 놓지마소 [4]

  • 사진마을
  • | 2017.06.22

사진이 있는 수필 6 영도대교가 공식 명칭인 ‘영도다리’ 도개행사를 보려면 유라시아대륙의 종점마을이란 뜻으로 이름 붙여진 유라리광장으로 가야...

취재

세계 가장 비싼 사진집 ‘스모’ 43만달러

  • 사진마을
  • | 2017.06.20

헬무트 뉴턴 1999년 펴내…무게 30㎏ 저자와 등장인물 80명 서명 들어 있어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거래된 것 중에서 가장 비싼 책(문서)은 <코...

전시회

풍경의 틈, 마음의 틈 [3]

  • 사진마을
  • | 2017.06.16

 김원섭의 개인전 ‘풍경의 틈’이 19일부터 7월 10일까지 갤러리 ‘꽃피다’에서 열린다. 이 전시는 장소를 옮겨 7월 12일부터 18일까지 경인미...

전시회

실패한 탈프레임, 성공한 사진 실험 [1]

  • 사진마을
  • | 2017.06.15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한 축 로드첸코의 실험적인 사진 분당 예술스페이스 J에서 알렉산더 로드첸코 사진전 ‘혁명의 사진, 사진의 혁명: 로드첸코 ...

전시회

공간과 사진가의 합이 어우러져야 [3]

  • 사진마을
  • | 2017.06.14

신희옥 사진전 ‘시간공작소’(Time Atelier)가 14일부터 20일까지 서울 종로구 가나아트 스페이스에서 열린다. 가나아트 스페이스는 서울 지하철 ...

전시회

서울로7017에서 사진 찍자

  • 사진마을
  • | 2017.06.08

서울로7017에서 다양한 거리예술 행사가 열린다. 서울문화재단이 준비한 이 행사는 6월 8일에 시작해 18일까지 2주 동안 총 8일에 걸쳐 진행될 예...

전시회

대한민국 193일의 기록 [2]

  • 사진마을
  • | 2017.06.08

중부대학교 사진영상학과 포토저널리즘 전공 학생들이 기록한 ‘다큐 193일전- 대한민국을 바꾼 193일간의 기록’사진전이 중부대학교 고양캠퍼스 세종...

사진책

엑스트라 인생, 소품 인생 [1]

  • 사진마을
  • | 2017.06.05

 우연한 일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지난 주말 존 버저의 ‘말하기의 다른 방법’ 특강을 하러 춘천에 갔고 거기서 소설가 하창수씨를 만...

사진이 있는 수필

내 마음에 내려 앉은 단풍열매

  • 사진마을
  • | 2017.06.05

사진이 있는 수필 5  전날 비가 내렸다. 회사 야외휴게실 나무테이블에 수막이 생겼다. 순간 눈 앞에서 마법이 펼쳐졌다. 영화 ‘포레스트 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