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회 ‘장날 반추’-이수길 ‘대한민국 장터 이야기’
시끌벅적한 낯섬, 혹은 밍밍한 익숙함…그나마 갈수록 흐릿
모든 사진이 다 기록이지만 기록이 똑같이 읽히는 것은 아니란 관점에서 지금 동시에 부산과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두 사진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부산 고은사진미술관에서 ‘정정회, 장날 반추’가 열리고 있다. 10월30일까지. 서울 노량진 케이지(KG)패스원에선 이수길의 ‘사진으로 맛보는 대한민국 장터 이야기’가 10월31일까지 열린다. 두 전시를 같이 소개하는 것은 모두 사라지고 있거나 사라진 ‘장터’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40년 동안 주말사진가로…70~80년대 장날 풍경
정정회(1939~ )는 다니던 부산은행에서 1970년 ‘사진 서클’을 만들면서 사진을 시작했다. 이후 정년퇴직할 때까지 평생 주말사진가로 40년 넘게 활동해왔다. ‘정정회, 장날 반추’는 1970~80년대 장날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1970년대는 여전히 조형미를 더 강조하는 ‘살롱사진’이 주를 이루고 있던 시대였다. 그러나 부산 사진의 1세대였던 정인성과 최민식이 소속된 ‘청사회’의 영향력이 큰 부산의 지형 덕에 상대적으로 리얼리즘의 냄새가 더 짙을 수 있었다. 사실상 리얼리즘과 조형미를 완전히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치열하게 사진에만 전념했던 최민식의 사진에서 조형미는 나중에 자연스레 따라붙은 것이지만 주말사진가들에겐 사진의 외형이 우선되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전화 인터뷰에서 정정회는 “열심히 찍었다. 평생 주말사진가로 살았던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러나 전업으로 사진을 찍는 것과 비교하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솔직히 말했다.

경남 산청. 정정회

경북 청도. 정정회

전남 곡성. 정정회

전남 곡성. 정정회
“‘정정회, 장터의 반추’는 기획전이다. 전시의 구성에 미술관의 의도가 짙다. 정 선생에게 현대의 장터를 기록해달라고 부탁한 것도 그 때문이다”라고 고은사진미술관의 이미정 큐레이터는 설명한다. 이씨는 “1970~80년대를 찍을 당시 사진가의 의지와 달리 2013년 지금 30~40년 전 장터를 본다는 것은 다르게 읽힐 소지가 크다. 사진가는 촬영 당시 삶의 현장을 찍었지만 지금의 관객은 그 기록에서 ‘고단한 삶의 현실을 배제하고’ 읽을 수 있다. 따라서 2013년 현대의 장을 같이 전시해 과거와 현재를 대비시켰다”고 말했다.
최근에 5일장을 찍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과거의 5일장과는 아주 다른 풍경이 보인다. 인정이 살아있던 ‘만남의 장’을 찾긴 힘들지만 어쨌든 ‘삶의 장’이긴 하다. 옛 장터는 극적이고 과장된 측면이 있다면 현대의 장터는 밋밋하다. 건조해 보이는데 이게 바로 현실이다. 그러므로 정정회의 옛 장터 사진이 잘못 읽힐 가능성에 대비해 미술관에서 ‘배려’를 한 것이라고 봐도 좋은 것이다. 요약하자면 고은사진미술관의 이번 전시는 관객들에게 “장날은 과거의 향수를 불러오는 그리움의 대상인 동시에 치열하고 역동적인 삶의 표상이다”라고 역설하고 싶었다는 뜻이다. 과연 사진의 창작성은 찍을 때 처음 태어나고 전시 기획자의 뜻을 거쳐 두번째 태어난다고 할 만하다.
대학교수로 주말 장돌뱅이처럼…전국 177곳 돌고 돌도 또 돌고
이수길(1961~ )은 부산의 대학에서 일본어를 가르친다. 따라서 학기 중엔 주 3일 정도 시간을 내 가까운 경남의 장터에 다니고 방학 땐 먼 장터를 ‘장돌뱅이처럼’ 순례한다. 장터의 상인들을 사진 전시에 초대했다. 가족들과 함께 전시장을 찾아와 자신이 일하는 사진 앞에서 기념사진도 찍으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부산 노포동. 이수길
경북 청도. 이수길

경북 청도. 이수길
2009년부터 5년간 찍어온 전국의 장터 사진으로 이번에 전시를 열고 있다. 서울 노량진 학원가라는 전시 장소가 특이했다. 이수길은 “누가 사진을 어떻게 보느냐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이번 전시는 사진전이기도 하지만 문화전시다. 학생들, 젊은 사람들이 사진을 많이 봐주길 바랐다. 학원가라는 공간은 공무원, 경찰 등이 되기 위한 시험을 공부하는 곳이다. 그들이 이번 전시의 이미지를 갖고 나중에 사회에 진출했을 때 효과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수길은 고2 때 잠시 필름카메라로 사진 공부를 시작한 이후 생업 탓에 사진을 접었다. “25년 만에 다시 카메라를 잡으면서 전력을 다해 장터를 찍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만의 장터지도를 만들었고 전국 177개 장터를 많게는 수백번씩 다니면서 찍었다. ‘장터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라고 자부한다”고 강조했다. 장터의 의미를 물었다.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곳이며 활기차게 어울리는 문화가 있는 곳, 그런데 이 문화가 사라진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사라지는 것을 기록하겠다는 사명감으로 사진을 시작했고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5일장의 마지막 날까지 찍겠다. 장터 외엔 아무것도 찍지 않는다”고 밝혔다.
곧 사라져 그냥 그림처럼 보일 날 오겠지만 그렇다고 어쩔 것인가
정정회의 사진 속 장터는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기록이다. 그래서 당시를 모르는 현대 관객에겐 자칫 ‘그림처럼’ 읽힐 소지가 있다. 이수길의 기록은 현재의 장터다. 그런데 이수길에 따르면 2009년에 찍은 장터가 2013년엔 벌써 사라진 곳도 있다고 한다. 역시 가까운 미래의 관객에겐 이수길의 장터도 ‘그림처럼’ 읽힐 소지가 있다는 뜻이다. 어쩔 것인가. 사진은 늘 그랬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사진의 세번째 창작성은 관객의 몫이다. 새겨 읽어야 한다.
두 주말사진가에게 앞으로 뭘 찍을 것인가 물었다. 이수길은 “이번 주말이 24일이니 4·9장이라…” 모란장에 가겠다고 한다. 강화와 일산장을 거쳐 성남으로 오는, 개와 닭을 파는 아주머니들을 아마 만나게 될 것이다. 모란장의 천막 아래서 먹는 닭칼국수가 제격이라고.
정정회는 국악 분야 등 인간문화재를 사진으로 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장터는 안 찍느냐고 물었더니 “보이면 그냥 지나갈 수가 없지”라고 답하는 수화기 너머로 환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장터를 찍는 사진가들에게 장터에 대한 애정이 없을 수가 있는가. 길게 말하면 군말이다. 사라지는 모든 것은 기록할 가치가 있다.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